비 오는 날이 유독 싫어진 이유

by 이승우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고 말하면, 사실 그건 비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그 시절의 나를 좋아했다는 말에 더 가깝다. 비를 맞아도 별일 없던 나, 젖은 신발로 웃을 수 있던 나, 내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던 나. 그때의 비는 늘 가벼웠다. 하늘이 잠시 장난을 치는 것 같았고, 세상은 잠깐 멈춰 나를 쉬게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의 비는 언제나 허락된 탈선이었다. 뛰어도 되고, 늦어도 되고,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봐도 괜찮은 날. 비는 늘 변명이 되어주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렇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일들이 이해받았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비는 나를 숨겨주는 커다란 우산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는 더 이상 나를 숨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비 오는 날이 되면 평소에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괜찮다고 넘겼던 일들,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말들, 애써 잊으려 했던 장면들이 빗소리를 타고 하나씩 떠올랐다.


비는 조용한데, 마음은 시끄러웠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릴 때마다, 마치 기억이 나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으냐”라고 묻는 것처럼. 그래서 비 오는 날이 싫어졌다. 비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비는 기다려주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내가 준비되었는지 묻지도 않고, 괜찮은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냥 내렸다. 지친 날에도, 아무 생각 없이 보내고 싶은 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세상은 비가 오든 말든 계속 돌아갔고, 나만 조금 더 무거워졌다.


비 오는 날의 거리는 늘 낯설다. 같은 길인데도 다르게 보인다. 회색빛으로 젖은 도로, 반사되는 불빛,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각자의 우산 속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이 꼭 각자의 사정을 혼자서만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누구도 타인의 비를 대신 맞아주지 않는 풍경. 그 속에서 나는 괜히 더 외로워졌다.


사실 불편한 건 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젖은 신발도, 눅눅해진 옷도 견딜 수 있다. 진짜 힘든 건 비가 내 마음을 너무 또렷하게 비춘다는 점이었다. 맑은 날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감정을 미룰 수 있다. 웃고 떠들며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그런 가벼운 방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비 오는 날의 시간은 유독 느리다.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잘 해냈다고 스스로를 속였던 순간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상처였던 기억들. 비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가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 싫어졌다. 솔직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비를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이어폰을 끼고, 일부러 다른 소리로 빗소리를 덮었다. 비 오는 날이면 괜히 할 일을 만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생각이 너무 많아질까 봐. 그렇게 비는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비는 늘 돌아왔다. 아무리 피해도 계절처럼 다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변했다. 예전처럼 비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좋아하지도 못한다. 다만 비 오는 날의 나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약해지는 날, 솔직해지는 날, 괜히 흔들리는 날이라는 것을.


비 오는 날이 유독 싫어진 이유는, 내가 더 많은 것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켜야 할 마음이 생겼고,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생겼고, 잃어버린 것들도 쌓였다. 비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한다. 언젠가는 다시 비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날, 솔직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아 지는 날.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비를 싫어해도 괜찮다. 좋아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있다는 것, 그것마저 받아들이는 과정이니까. 비 오는 날이 유독 싫어진 이유는, 내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그래서 계속 변하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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