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우리 삶은 사라지는 것들로 이루어진 기록 같다.
나에게 분명 있었고, 내 손에 잡혔고, 내 하루를 차지하던 것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떠났다는 인사도 없이,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않은 채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남아 있는 것들보다, 사라진 것들을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시간은 가장 먼저 사라진다.
어릴 적의 하루는 길었고, 저녁은 오지 않을 것처럼 느리게 왔다. 그때의 나는 시간을 잃는다는 개념 자체를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하루는 눈을 깜빡이는 사이 지나가 버리고, 한 해는 달력 한 장처럼 넘겨진다. 분명 나에게 있었던 시간인데,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뒤늦게야 깨닫는다. 시간은 남아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고, 사라지고 나서야 무게를 가진다는 것을.
사람은 더 조용히 사라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연히 곁에 있던 사람, 매일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어느 순간 대화는 줄어들고, 답장은 늦어지고, 결국 서로의 일상에서 이름이 빠진다. 관계는 꼭 다투거나 배신당해야 끝나는 게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기에 더 쉽게 사라진다. 그래서 더 허전하다. 분명 나에게 있었는데, 이제는 “잘 지내겠지”라는 추측으로만 남아 있다.
감정도 나에게 있었다가 사라진다.
이유 없이 모든 게 잘될 것 같던 확신, 누군가의 한마디에 하루가 빛나던 설렘, 밤이 깊어져도 꺼지지 않던 열정. 그 감정들은 다시 돌아올 것 같지만, 같은 모습으로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 감정을 가졌던 나 자신조차 낯설게 느낀다. “내가 저랬었나?” 하고 묻게 된다. 하지만 분명 그 감정은 나를 살게 했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사라졌어도,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남는다.
물건들 또한 나에게 있었다가 사라진다.
손때가 묻은 가방, 닳아버린 신발, 금이 간 보호필름. 처음엔 소중히 다루다가, 익숙해지면 당연해지고, 결국 필요 없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그런 물건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사람도 그렇게 쓰이다가 버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가장 조용히 사라지는 건, 예전의 나다.
쉽게 웃던 나, 모든 걸 믿었던 나, 상처받아도 다시 기대하던 나.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약하다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다. 세상에 실망하지 않았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세상을 이해한다. 그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나를 지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라지는 것들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사라졌다는 건, 적어도 한때는 내 삶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것들은 애초에 나에게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떠난 것들은 떠났지만, 그 자리에 남긴 흔적은 아직 나를 붙잡고 있다.
나에게 있었다가 사라진 것들.
시간, 사람, 감정, 물건, 그리고 과거의 나.
그것들은 더 이상 내 곁에 없지만,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수많은 것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라지는 건 끝이 아니라, 내가 살아왔다는 증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