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도 온도가 있다

6장 남겨둔 자리의 비밀

by 여백

나는 언어화가 느린 사람이다.


즉 언어적 표현보다 비언어적 사고가 강한 사람

그래서 나는 말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한다.


생각은 이미 마음속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만 그걸 문장으로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내가 생각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말을 하지 않으니, 겉으로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보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친구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 친구... 나 내가 생각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아서 슬퍼 ㅠㅠ너도 날 오래 봤으니까 알잖아 내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 그렇지 가끔 보면 우리 언니보다 생각이 깊은 사람 같아 "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오랫동안 묵혀있던 서러움을 한 번에 진정시켜 주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나의 진심을 조금은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내 마음을 읽어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느린 속도는 나의 방식이자 나를 지켜주는 리듬이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불안과 조급함을 자극하기도 한다.


나는 고민했다.


내가 언어화가 느린 사람이라서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을까?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남겨두는 용기'가 조금씩 내 안에 스며들면서 이 고민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채우지 않아도 모든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관계는 조금씩 스스로 맞춰지고 서로의 속도와 공간을 존중하게 된다.


빈자리는 더 이상 불안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되고 신뢰와 온기를 만드는 공간이 된다.


남겨둔 자리가 비밀인 이유는 보이지 않아서다.


말로 다 드러내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안에서는 서로가 스스로 다가가고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채워지는 일이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저 너와 나 둘을 동시에 지켜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우리만의 비밀이다.


때로는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을 때 서로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깨달았다.


내 속도를 지키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조금 느린 말투와 긴 생각의 시간조차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나에 관한 것도 관계에 관한 것도 여백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고 다 가질 수도 없다.


때로는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더 큰 이해이며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믿음이 된다.


남겨둔 마음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미완성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여백만이 줄 수 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