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의도치 않게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2급 자격증을 땄다.
대학원을 가기 위한 단계에서 얻은 좋은(?) 선물 정도였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에 뛰어든 난,
그나마 학벌을 잘 보지 않는 '젊은' 회사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뭔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내 의견이 거절되면,
그게 실력보다는 학벌 때문인 것 같았다.
맞다. 자격지심이었다.
그게 싫어서, 학벌을 레벨 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4년제 대학 편입을 생각했었다.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차라리 대학원 간판을 따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물론, 대학원 간판 따는 게 쉽겠냐마는....)
그렇게 대학원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학점은행제 시스템을 이용해 모자란 학점을 채우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학점도 인정되고 자격증도 딸 수 있는,
무엇보다 내가 평생 써왔던 '한국어'라서 쉬울 것 같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알게 되었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격증이 목적이었는데,
난 학점이 목적이라서, 사실 자격증을 따도 그것을 활용해 무엇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학점을 모두 이수했고,
이제 본격적인 대학원에 도전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그게.... 2년 정도 꾹 참고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나름 인정도 받고, 동료애도 생기고,
다양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경험도 쌓이고,
자연스럽게 경력만으로도 나를 알리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 어디 나왔어요? 가 아니라,
와! 그 프로젝트도 했어요? 말 다했네. 뭐, 이런 분위기.
자연스럽게 대학원에 대한 필요성도 떨어졌고,
대학원에 가게 되면 돈도 많이 들고,
회사에서도 공부는 그쯤하고 일에 집중해 달라는 요청도 있어서,
대학원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
아무튼,
그렇게 난 다시 일에 집중했고, 얼추 10년 넘는 시간이 흐를 동안,
나의 한국어 강사 2급 자격증은 서랍 속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02.
코로나가 터졌다.
부모 세대가 IMF때 휘청거렸다면,
우리 세대는 코로나로 휘청거렸다.
점점 어려워진 회사가 감봉, 감원을 시작했다.
그 무렵, 난 번아웃에 빠져있었다.
이제 그만해야지,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할 때였기에,
자연스럽게 퇴사 분위기를 타면서 사직서를 냈다.
03.
회사 일과 병행하던 글 쓰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업 작가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글쓰기라는 게,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글 쓰는 동안에는 내가 잉여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계속 싸워야 했다.
인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받아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봉사라도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바로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국어 강의를 하는 봉사를 찾았다.
자격 조건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강사 3급 이상.
어.
나 2급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던,
자격증을 깨웠다.
04.
집 근처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에서 1년 동안 부담임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직접 강의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수의 강사를 보조하면서 수업의 노하우를 배웠다.
그런데 이런, 봉사도 국가랑 손발이 맞아야 하더라.
정부가 예산을 확 줄이면서,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자체가 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자격증은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05.
"해외 봉사 해봐요. 해외로 여행도 많이 다녔고.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
대학으로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는 사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는데,
대뜸 해외 봉사를 알아보라는 권유가 돌아왔다.
"네? 해외 봉사요? 저 영어를 못하는데요...."
나의 시원치 않은 대답에 사수는 이렇게 말했다.
"영어가 필수는 아닐걸요. 제 지인도 영어는 못 했는데, 얼마 전에 해외 봉사를 다녀왔다고 들었거든요."
"정말요?"
영어가 필수가 아니라면, 도전해 볼 만했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도전이라도 해보지 뭐.
누가 알아?
정말 해봉달이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