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허공을 쳐다보다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올릴 결재는 없었다. 바이어와 면담은 오전에 끝냈다. 팀장에게 휴가를 올린 후 선영에게 전화를 했다.
선영아. 오늘 저녁에 일 있어? 괜찮아? 다행이네. 나랑 저녁 먹자. 응..그래. 내가 그 쪽으로 갈게.
선영은 다희의 고등학교 단짝 친구였다. 과는 달랐지만 대학도 같이 갔다. 지금도 출장갔다 오는 길이면 선영이의 선물을 꼭 챙겨오곤 했다.
다희는 선영을 만나러 가는 사이 카톡으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여름과의 통화도.
선영아. 여기.
어. 다희야. 배고프지? 뭐 먹을래? 여기 파스타 잘하는 집이야. 맥주도 한 잔 할거지? 멀리서 왔으니 언니가 쏠게. (웃음)
회사 일 이것저것을 말하는 다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선영이 한마디 툭 던졌다.
자기답지 않게 왜 그래? 그런거 말고 말하고 싶은 거 있잖아. (웃음)
다희는 까르르 웃더니
기집애. 다 알면서. 그래. 그 사람.
너도 참 딱하다. 아니 언제까지 그 선배 쫒아다닐거야.
쫓아다니는 거 아냐. 그냥 신경쓰이는 거지.
그게 그 말이지. 도대체 그 선배 어디가 그리 좋냐. 처음 펜팔한 건 나였는데..엄하게 왜 네가 십수년을 그리 헤매니..
그러게..지겹겠지만 한 번만 더 얘기해주라. 너 그 때 펜팔명이 뭐였지?
다희와 선영의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합반은 아니었다. 둘이 1학년이었던 시절 반 회장이 주도하여 윗층 남자 선배들과 펜팔을 한 적이 있었다. 필명을 지어 익명의 편지를 보내면 남자 반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나눠져 그 후로 서신 교환을 하는 식이다. 이즘 같이 조숙한 시대에 순수하다면 순수한 놀이였다. 왜 동년 남학생들이 아닌 선배의, 그것도 그 반과 연결된 건지는 둘 다 기억이 분명치 않다. 반 회장들끼리 아는 사이라는 얘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밀키웨이..
두 사람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얘. 밀키웨이가 뭐니..왜 그런 필명을 쓴거야?
몰라. 그 때 외우던 단어가 그거였나..여하튼 그 선배가 파트너가 됐었지. 필명이..
폐허. 폐허였어..
다희는 선영의 필명은 몇 번을 들어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름의 필명은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 폐허. 안녕하세요. 이번에 편지 교환하게 된 2학년 3반 폐허입니다..그렇게 시작하는 첫 번째 편지 받고 이 사람 뭐지..했었어.
왜? 다희는 여름에 관한 얘기를 스토리를 알고 있는 선영과 할 때 그냥 기분이 좋았다.
아니..폐허..좀 이상하지 않아? 벤허도 아니고..(웃음) 뭐랄까. 좀 우리 나이에는 안맞는 단어같고..너무 염세적인 느낌도 나고..안그래?
선영은 그 때를 떠올리는 듯 눈썹을 약간 치켜뜨며 말했다.
그런가..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그 때는 별 생각 없었거든.
그래. 넌 그 때 왜 참여 안하고 내 펜팔 내용은 그리 궁금해했니?
아니..난 처음 회장이 제안했을 때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 남자한테 끌리지가 않았으니까. 근데 다른 애들이 막 난리치는거 보니까 괜히 궁금하더라. 그래서 네가 내 짝꿍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보게 된 거지. (웃음)
그래. 하여튼 여름 선배..문장력이 비범했잖아. 좀 어른같은 말투긴 했어도..너랑 나랑 답장 올 때마다 무슨 애정하는 작가에게 연락온 거 마냥 좋아했었지. 기억나?
다희가 기억못할 리가 없었다. 몇 차례 서신이 오가고..대충 필명과 실존 인물 매칭이 끝나갈 무렵 (좁은 학교에서 익명성이란건 애시당초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은 1학기 기말고사 준비로 이 펜팔 놀이에 흥미를 잃었다. 밀키웨이와 폐허의 서신도 마찬가지였다.
난 한동안 여름 선배 잊고 있었는데 넌 따로 연락한거니? 선영은 못믿겟다는 듯 물었다.평소 이성 보기를 돌 같이 하던 다희였기에 더더욱.
아니..나도 너랑 같이 여름 선배 먼발치에서 보고 인물 나쁘지 않네..그러고 말았거든. 근데..에휴..그 뒤로 못볼 걸 몇 번 봐서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이다.
못 볼 거?무슨 말이야? 선영은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이전에도 여름 선배 얘기 몇 번 했고 다희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고교 시절의 세세한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는 듯했다.
체육 시간에 친구들이랑 공놀이 하고 있는데 공이 빠져서 운동장 끝에까지 굴러갔거든. 근데 선배가 의자에 누워있는거야..등받이 없는 의자 있었잖아..거기..운동장 끝에..
그래 그래. 선영은 기억이 흐릿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일단 맞장구를 쳤다.
그 의자에 누워 한 쪽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있더라고. 난 처음에 눈이 부셔서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자세히 보니 울고 있더라고..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데..심지어 체육복도 아니고 교복을 입은체로. 한 쪽 다리는 이렇게 세우고..
다희는 그 날이 아직도 선하다는 듯 여름을 재연하려고 폼을 잡았다.
나 근데 왜 그런지 궁금한 것보다 그냥 그 장면에 압도돼버렸어. 남자가 멋있을 수 있구나..처음으로 느꼈거든. 그 날 반해버린 것 같아..아마도.
선영은 파스타를 둘둘 말다 말고 다희를 쳐다봤다.
얘 좀 봐..선배가 무슨 아이돌이니? 선영은 핀잔을 주면서도 다희가 묘사한 그 장면을 상상해봤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또 있어? 선영은 웃었다. 어떻게 그간 말안하고 참았을까 싶어서.
선배 담임쌤이 여자분이었잖아. 선배 얼굴이나 보고 오려고 쉬는 시간에 윗층 올라갔는데 그 분이 청소하고 계시더라구.
응..얼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복도에 학생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선생님을 돕질 않았어. 그냥 제 갈 길 가고 있었지.
근데?
갑자기 선배가 나타나서 맨손으로 쓰레기 더미를 움켜쥐고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야.
....
난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돌처럼 서 있었어. 담임 선생님도 눈만 크게 뜨시고 아무말도 못하고..
상남자네..선영이 읊조렸다.
난 순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냥..미친건지..미치게 멋있는 건지..
반할만 하네..인정. 선영이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뒤로는 네가 아는대로야. 찾아가서 말 걸었다가 까이고..몇 차례 그러다가 자존심 상해서 그만두고 공부했지만..가슴 한 켠엔 항상 선배가 남아있더라.
그랬구나..아..근데 그 날 왜 울었대? 이후에 물어봤을거 아냐..
어..그게..선배 1학년 때 친한 친구가 사고로 죽었는데 그 날이 기일이었나봐. 친구가 생각나 자기도 모르게 울었다고..수업 시간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선영은 다희와 맥주를 부딪쳤다. 선배가 결혼이 늦어져 다희도 계속 미혼으로 남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