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속초

by 정자까야

여름은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어제도, 아니 정확히는 오늘 새벽 2시에나 잠이 들었다. 알람은 평소대로 6시 무렵부터 울렸다. 커텐을 걷고 바깥 날씨를 확인했다.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시내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을 챙겨먹지 않지만 속초먹자거리에 들어서자 한끼 먹고픈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속초에서의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으니.


정해진 일정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시내 카페에 있다가 바다를 한 번 더 보고 예약해둔 밤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비는 오락가락했다. 아점으로 먹은 중식당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짬뽕 국물이 담백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겨울에게서 카톡이 왔다.


여름씨. 어제 편지 기다렸는데..


여름은 당황해서 남은 국물을 흘릴 뻔했다. 어제는 무슨 일인지 감정의 과잉 상태였다. 몆 시간이고 설악산을 보고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다고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보낼 수 없을 뿐이었다. 아직 겨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그럴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여름은 전화를 걸었다.


겨울씨. 어제는 특별한 게 없었거든요.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웃음)


네..기다린 건 사실이죠. 그러면..어떻게 보상하실래요? 제가 마침 오늘 출장갔다가 일찍 파합니다. 저녁 어떠세요? (웃음)


여름은 저녁 표를 취소하고 가장 빠른 시간의 버스표를 끊었다. 바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진 못했다.


상경하는 길. 여름은 한숨도 자지 않고 흩날리는 풍경을 바라봤다. 아니..솔직히 무엇을 봤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제의 거칠었던 파도와 어제의 고고했던 바위만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만의 약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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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연락은 하나 더 있었다. 겨울을 기다리는 동안 다희에게 전화가 왔다.


다희야. 오랜만이네. 잘 지내?


오빠. 먼저 좀 연락하면 어디 덧나요? 내가 안챙기면 또 쓸데없는 감상에 허우적거릴까봐 걱정돼서 연락했어요. (웃음)


(웃음) 이즘 잘 지내. 걱정 마. 언제 귀국했어?


한달 정도..나 있는 동안 한번 오라니까.. 그렇게 말을 해도..오빠가 언제 유럽 와 보겠어요. 숙소에 삼시세끼 챙겨주는 가이드 있는 동안. 어쨌든 오빠가 차 버린 거니까 나한테 나중에 뭐라 말아요.


다희는 여름의 고등학교 1년 후배였다. 그러니까 삼총사의 후배기도 했다. 당시 일학년이었던 다희는 하교하는 여름을 다짜고짜 불러세우고는


저기요. 김여름 선배 맞죠? 라고 물었다. 둘의 인연은 그리 시작됐다. 여름은 처음엔 공부 때문에 후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름은 치열한 8학군에서 전교 석차를 유지하고 있어 공부 좀 한다는 후배들은 여름의 존재를 알고 있을 법했다. 후일 다희에게 들은 얘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그럼 당분간 국내 있는거야?


그럴 거 같긴 한데 모르죠. 회사에 메인 몸. 나가라면 또 나가는거고.


담에 또 가면 그 땐 꼭 한 번 일정 볼게. 삼총사랑 같이 가든지.


됐어요. 맨날 그 무책임한 담에..다음 다음 한두번 속아요? 케인즈가 뭐라 했어요? 장기적으론 우린 다 죽어요. 중요한 건 단기지 장기가 아니라구요.


엉뚱한 건 여전하다고 여름은 생각했다. 다희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냈다, 삼총사 중 그나마 티키타카가 되는 건 아라미스 정도였다. 브루토스는 다희에게 꼼짝을 못했고 아토스와 여름은 다희의 표현에 따르면 꼰대들이었다.


그리고..누가 삼총사 오빠들 오라고 했어요? 오빠 오라고 한거지..그 사람들 데려올거면 연락할 생각 말아요.


고등학생이었던 다희는 자기를 소개할 때 이미 여름에게 고백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후 하교할 때마다 여름을 불러냈으나 여름이 반응이 없자 한동안 공부에 전념했다. 여름과는 교내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졸업 후 원하는 대학을 갔고 대기업 상사에 취업해 해외 주재근무를 비롯 출장이 잦았다. 여름과 대학은 달랐지만 종종 여름의 대학 캠퍼스로 놀러가곤 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삼총사와도 연락하며 지냈다. 엉뚱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성격. 연애는 끊기는 적이 없었다. 적어도 여름이 알기로는.

언젠가 대학 구내 식당에서 다희와 식사를 할 때였다.


여기 밥 어때? 먹을만 하지?


나쁘지 않네요. 가성비로 치면.


오랜만에 봐서 저녁 먹으며 밀린 얘기나 할까 했는데..


저녁엔 남자친구 만나야죠. 오빠 만나면 뭐 있어요?


아..그래? 그러면 할 수 없네..(웃음)


오빠. 일전에 만나던 사람 헤어졌다는 얘기가 있던데..맞아요?


어? 아..에휴. 또 아라미스 이녀석..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구나.


얼마나 됐어요?


어..한 두어달..


그래요? 그럼 시간은 좀 지났네..오빠 그럼 나랑 사귈래요?


다희는 직진형이었다. 좌고우면이란 게 없었다. 여름이 아는 사람 중 적극성의 끝판왕다웠다.


다희야..있잖아..두어달은 아직 감정을 수습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야. 게다가 넌 남자친구도 있는 애가..


그게 뭐 어때서요? 여러 명 사귀면 안되나요? 한 사람에게 충실한 타입은 존중받고 여러 명 동시에 만나는 사람은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냥 성향이 다른거지.


그래도..좀 그렇지 않나? 상대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틀 수 있나..


그런 감정이 안들면 헤어지면 되요. 복잡할 거 없어요. 다수가 다수를 만나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며 정리될테니까.


내가 너랑 사귀면 나도 그 다수 중 한 명이 되는거군.


오빠라고 예외는 아니겠죠. 좀 특별하긴 하겠지만.


그러다가 불쑥 묻기를


제가 싫은 건 아니죠? 이성으로.


여름은 다희를 한동안 응시하다 말했다.


그런건 아니야.


그럼 됐어요. 언젠가는 이어지겠죠. 우유부단한 오빠 성격상 결혼은 쉽게 못할테니까. (웃음)


여름도 따라 웃었다. 이 녀석은 싫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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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오빠 한동안은 국내 있을 거에요. 설마 바로 또 보내겠어요. 회사에 불어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해 넘기지 말고 봐요. 제가 일정 좀 보고 연락할게요. 이즘 짝사랑이 심하다고 하던데 제가 또 전지적 참견해드려야죠. (웃음)


그래..다희야. 목소리 들으니 좋다. 너랑 전화 끊고 바로 영수에게 전화해야겠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건지 설명 좀 듣게. (웃음)


서울의 밤도 속초만큼이나 빨리 다가왔다. 서로 다른 두 도시의 밤낮을 결정하는 건 장소가 아니라 겨울이라는 시간이다. 여름의 심적 밤낮을 결정하는 것이 속초와 서울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겨울이라는 사람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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