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부치지 못한 편지

by 정자까야


겨울씨.

어제는 좋은 하루 보냈나요?

저는 어제 꽤나 걸어 피로했음에도 밤에 쉽게 잠들지 못했답니다. 너무 피곤하면 외려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나봅니다.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인근 황태구이 전문 식당을 찾았습니다.


황태탕과 구이가 함께 나오는 정식은 2인 이상 주문해야 하는데 식탁에 앉으며 호기롭게 정식을 외친 제가 어처구니없었는지 주인께서는 1인분에 맞춰 양을 내오셨습니다. 그냥 해주는 거니 맛있게 먹고 가라고.


반찬 가짓수가 15개에 이르는..한 상 가득메운 인심에 놀라서 멈칫해 있는데 겨울씨가 전화를 걸어오셨죠.


여름씨. 아직도 숙소 이불속에 있는거 아니에요?

(웃음)


아뇨. 지금 식당입니다.


아..비교적 일찍 나오셨네요? 그럼 이제 뭐하실건가요?


음..식사하고 카페 가려구요. 님이 내 준 마지막 미션. 설악산이 보이는 로컬 카페 찾아놨어요.


아..그래요? 알겠어요. 저 지금 팀에서 기다려서 식사하러 가볼게요. 메일 잘 봤어요. 마지막은 감동이었습니다. (웃음)


전화를 끊고 갑자기 의욕이 타오르더군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고픈. 국, 밥, 반찬 거의 남기지 않고 먹었습니다.


이후 2km 정도 떨어진 카페로 걸었습니다. 날은 흐렸는데 다행히 비가 오진 않았습니다. 도로 옆에 인도가 살짝 붙어있는 수준이라 걷기 좋은 길은 아니더군요. 속초뿐만 아니라 강원도는 전반적으로 차가 꼭 필요한 지역인 듯 합니다.

가는 길 중간에 순두부 거리가 나온답니다. 할머니, 어머니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


약 40여분 걸어서 도착한 카페. 외관도 예술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통창으로 설계한 내부였습니다. 카페 어디를 앉아도 설악산이 보였거든요.


병풍처럼 진열된 울산 바위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 했습니다. 점심 시간 잠시 짬을 내 연락해 준 겨울씨가 고마웠습니다..


속초는 멋진 도시입니다. 산과 바다, 호수를 모두 지닌. 하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일각이 삼추와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남은 일정을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님과의 물리적 거리를 견디기 어렵더군요. 이곳이 제주인들 혹은 라스베가스인들 다를게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겨울씨의 마음씀이 고마웠던 겁니다. 1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바쁘게 일하다보면

까마득히 잊게 되는지라..

그 1분의 통화를 복기하며 저는 세시간 가까이 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는게 믿기시나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다섯시간이고 여섯시간이고 그랬을겁니다.


이곳은 연인들이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쁜 곳이었습니다. 내외관 모두 예술적으로 고심한 티가 났습니다. 어떻게 찍어도 평타 이상의 샷이 나왔을 겁니다. 찍는 각도에 따라 제 신체가 혹여 나올까봐 자리를 살짝 옮기기도 했습니다. 여자분들의 웃음 소리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대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한 커플 여자분이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본의 아니게 보게 됐습니다. 시쳇말로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하나요?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싶었습니다.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길 방법도 없는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로미오를 바라보는 줄리엣의 시선이 저러했을까요.


하지만 겨울씨.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이 현실을 마주하곤 그리도 쉽게 무너질 수 있나요.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매겼던 걸까요? 아무리 사랑해도 전 재산을 걸 수는 없나요? 미치게 사랑해도 자신의 유망한 미래를 내던지긴 싫은 건지요. 아니면 목숨은 어떤가요?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나요? 이런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사랑이란 어찌나 보잘것 없게 보이던지요.


겨울씨. 전 이런 상상도 해봤습니다. 저 청년은 여자를 사랑해요. 그렇게 써 있어요. 당신 없인 못산다고. 근데 상대방 부모가 반대해요. 더 나은 신랑을 원해서요. 그럼에도 둘은 결혼을 감행했어요. 이즘 보기드문 용기를 가진 연인이었죠. 그런데 명절에 인사를 드리러 갈 때마다 온 처가댁 식구들이 부동산, 주식 얘기를 해요. 이번에 50억짜리 아파트로 이사간다고. 해외주식에 한 10억 넣어놨는데 언제 팔아야할지 고민이라고. 아이들 학원비가 월 천만원 들어가서 일을 쉬지도 못한다고..그런 얘기를 웃으면서 하죠. 정작 저 청년과는 동떨어진 현실일텐데. 그 앞에서 이번에 만기가 돼서 또 이사를 해야 한다고. 빌라 말고 이번엔 소형 아파트를 보고 있다고. 애들은 공부는 못하지만 건강해서 만족한다고. 애들 엄마 고생시켜서 미안한데 그래도 우리 가족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저 청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겨울씨. 저는 저 울산 바위를 두고 맹세합니다. 다음 번에는 꼭 당신과 함께 오겠다고.


당신을 고생시키지 않을 거라고 약속 못해요. 당신은 남편의 박한 월급 때문에 힘들어도, 상사가 개같아도 일을 그만두지 못할 수도 있어요. 집은 청약 통장 하나 믿고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야 하고 애들은 바람과 달리 말도 잘 듣지 않는 사고뭉치일 수도 있어요.


모든게 당신의 기대와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을거에요. 당신이 절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저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겁니다. 어머니께서 아무리 면박을 주고 인간 이하로 취급하셔도. 처가 식구들과 비교되어 끊임없이 자존심이 뭉개지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도 절대로 당신을 포기하는 일 없을 거에요. 그런 것들은 달게 받겠습니다. 당신만 옆에 있어준다면 그런 모멸감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겨울씨. 저 청년에게는 그런 일이 없길 바래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그런 일이 꼭 생기길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울산 바위를 보며 한 맹세를 잊지 않을거에요. 겨울씨..겨울씨도 기억해줘요. 삶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순간이 오고..누구의 말을 신뢰해야할지 고민된다면..여름이란 사람의 무엇을 보고 판단할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이 편지를 부디 기억해줘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2025.12.

속초에서 두번째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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