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씨.
메일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새삼 님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님의 음성에 목말라 항상 전화를 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 보내는 편지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으나 여행 기간만이라도 그대 향한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해 보려 합니다.
터미널까지 지옥철을 경험하고 겨우 늦지않게 도착했습니다. 전날 설레임과 걱정으로 이루지 못한 잠이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쏟아졌습니다.
2시간 30분. 속초로 가는 시간은 의외로 짧게 느껴지더군요. 속초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겨울씨의 미션을 하루라도 빨리 하고픈 마음에 미리 검색해두었던 물회를 먹으러 갔습니다. 식탁에 설치된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자 로봇이 서빙을 하더군요. 모든 것이 대형화, 자동화되어갑니다. 속초는 유명 관광지니 더 속도가 빠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아쉽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던 작고 허름한 맛집은 고향 같은 기분이었는데 말이죠.
물회는 맛있었습니다. 주말이었다면 번호표 받아 한참을 기다렸을 곳인데 월요일 오전이라 바로 서빙을 받았습니다. 시장하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맛이 있는지라 물회와 밥, 반찬까지 남김 없이 먹었답니다.
그리고는 네..맞아요. 바다를 보러 갔습니다. 이곳에 온 유일무이한 이유였죠. 솔직히 아무도 없는 적막함 속에 저를 반기는 건 파도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 인근에만 오육십명은 돼 보이는 일련의 관광객들이 있었고 저 앞으로 해안을 따라서도 상당한 인파가 있었습니다.
파도와 단둘이 대화하려던 기대는 헛웃음과 함께 날아갔지만 젊은 연인들의 웃음, 노부부의 애틋한 동행, 반려견과 함께 온 가족들..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겨울씨. 제가 파도를 강아지로 묘사했던 거 기억해요? 동해 바다를 보자마자 그 파도의 기세에 놀랐습니다. 귀여운 강아지보다는 늑대개에 가까운 맹렬함이었지요. 조금만 더 앞으로 갈라치면 겨울 바다에 흠뻑 젖을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답니다. 아이들이 인근에서 뛰어노는 게 어찌도 불안하던지요. 다만 그대를 향한 마음은 이 위험한 동해 바다를 닮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대의 마음 깊은 곳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들어야 하는 운명이니까요.
해안가에서 한 블록 안으로 들어오니 그새 파도 소리는 잠잠해집니다. 저는 설악대교와 금강대교를 연이어 건넜습니다. 해안가에서는 파도의 노래에 넋이 빠져 있다가 인도로 올라온 후에야 이어폰이 생각이 나더군요. 좀 오래된 노랜데..가수 나윤권의 '나였으면'을 아시나요? 워낙 유명한 노래라 겨울씨도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시간 연속듣기를 해놓고 설악대교를 건너는데 눈앞의 청초호와 저 멀리 보이는 설악산이 어우러져 무슨 뮤직비디오 찍는 착각이 들더군요. 노래 가사도 제 심정을 오롯이 표현한지라 더 감정 이입이 됐던 것 같습니다.
걷다보니 저절로 발길이 속초 시내로 향하더군요. 속초의 명물 황소 동상 앞에서 셀카도 찍었습니다. 고즈넉한 가운데 약간의 생기가 도는..평일 오후의 속초다운, 아니 속초에서 기대했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겨울씨의 특별 미션인 이발을 위해 미리 예약해 둔 곳이 시내에 있어 찾아갔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 제 담당이었습니다. 눈매가 서늘한 전체적으로 단아한 인상이었습니다. 바쁘셔서 머리를 못자르신거냐 묻더군요. 그냥 기르고 싶었다고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오늘 처음으로 대화한 것이더군요. .
머리를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잘 오지 않는 뜨네기 고객이면 그렇게 하지 않을수도 있었을텐데..
길을 걷다 보이는 로또 판매점 두 곳에 들려 자동으로 로또를 몇 장 샀습니다. 저는 낯선 곳에서 로또 사는 취미가 있거든요. 서울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1년에 한 번 올지 확신할 수 없는 속초야 두말할 것 없지요. 제 지갑에 항상 현금 몇 만원은 들고 다니는 이유입니다. 로또를 사거나 코인 노래방에서 발라드 몇 곡 부르는 용도로..
그러고 나니 시간이 4시 즈음이었는데 고민이 되더군요. 이제 숙소로 갈까 아니면 조금만 더 걸어서 영랑호를 가볼까. 속초의 겨울은 밤이 빨리 찾아와 5시 30분만 되도 어둑어둑해지거든요. 게다가 뚜벅이 신세라 버스 막차도 신경이 쓰였어요. 상당히 고민됐지만 영랑호를 가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영랑호수윗길을 보고 싶었거든요.
겨울씨. 영랑호수를 중앙으로 가로지르는 큰 부교가 있는 거 아세요? 이미 와 보셨나 모르겠지만 혹여 금시초문이라면 이른 시일 꼭 방문해보시길 권해요. 저와 아니더라도..친구분들과도 좋구요. 기사 검색해보시면 아실거에요. 부교가 호수 생태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철거가 결정난 상태랍니다. 보고싶어도 볼 수가 없어지니..
영랑호수윗길..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다녀왔어요. 무리수를 뒀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답니다. 해가 구름에 가렸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는데 시시각각 바뀌는 영랑호의 모습을 호수의 한가운데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으니 말이죠. 너무 황홀하고 경이로와서 한참을 부교에서 있었답니다. 동해 바다가 저라면 영랑호는 겨울씨일 겁니다. 차분하고 온화한 호수같은 사람. 바다에 포말이 넘친다면 호수에는 윤슬이 가득하더군요. 영랑호 한가운데서 당신을 찍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이 안갑니다.
아..겨울씨. 겨울씨를 위해 깜짝 이벤트도 하나 준비했습니다. 호수윗길로 가다보면 호수를 조망할 수 있도록 벤치 2개를 나란히 설치해둔 곳이 있어요. 그 가운데에 제가 땅을 파서 편지를 써놨습니다. 나중에 지인들과 속초를 방문하게 되면 한번 찾아보세요. 미션이 하나 있으면 여행의 재미가 배가 되는 것 같은 느낌. 이번에 겨울씨 통해 알았거든요. 작은 보답 정도로 봐주시면 좋겠네요.
해가 곧 넘어갈듯 하여 거의 뛰다시피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겨우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죠. 택시 탈 것도 각오는 했는데 다행히 버스 막차를 놓치지 않았답니다. 오늘은 뭐든지 클래식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이제 숙소에 들어와 옷가지를 정리하고 내일 일정도 생각해봅니다. 낮에는 걷느라 몰랐던 적막함과 외로움이 바로 엄습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움을 견뎠을까요? 조선시대나 70~80년대 근대사를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불과 90년대 중반까지도 연락할 방법이 편지 외에는 딱히 없었으니까요. 자주 연락할 수 없기에 한 번 편지를 쓸 때마다 절절한 그리움을 토해냈을테고 그러다보니 그렇게 아름다운 구절이 만들어진게 아닐까 싶어요. 이즘의 애정 표현은 직설적이고 단조로운 느낌이 없지 않아 있거든요.
겨울씨. 이 정도 표현이면 저를 쫒아 랜선 여행이 가능하실 것 같나요? 업무에 치여 못하셔도 괜찮아요. 이미 이 여행은 겨울씨가 함께 했으니까요.
지하철 인파에 치여도 겨울씨는 얼굴 한번 찡그린 적 없었고 버스에서 내내 골아떨어진 저를 나무라지도 않았으며 너무 많이 먹는다고, 너무 정처없이 걷는다고 핀잔주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핸드폰을 들 때면 늘 모델이 돼 주었고 제가 젊은 헤어 디자이너의 눈을 바라볼 땐 뒤에서 귀엽게 주먹을 들어 보이기도 했었죠. 겨울씨는 오늘 하루 모든 곳 모든 시간에 저와 함께였습니다. 진심으로 당신이라는 존재에 감사드립니다.
2025.12.
속초에서,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