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저녁은 하셨나요?
고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겨울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간단히 했어요.
그럼..저녁은 말고..바로 근처에..제가 봐 둔 곳이 있거든요.
고객은 조금 앞서서 걸었고 겨울은 조용히 따랐다.
5분여를 걸어 도착한 곳은 전통찻집.
겨울은 왠지 모르게 스며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매장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겨울은 그제야 마스크를 벗었다. 매장에서나 지하철 등에서는 항상 끼고 있어 벗으면 오히려 허전할 정도였다.
겨울을 본 고객은 아무 말도 못하고 시선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겨울이 웃으며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커피 한 잔 간청하시더니 정작 오신 곳은 전통 찻집이네요?
아..혹시 싫어하시나요?
아뇨. 저 쌍화차에 환장하는 사람입니다. 말해놓고는 입을 막고 웃는 겨울..환장이라니..초면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다행입니다..정말..
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다..
혹시 쌍화차만 드시나요? 아직 안드셔보셨으면 십전대보차 한 번 드셔보면 어떠세요? 여기 잘하더라구요..
십전대보차요? 메뉴를 보며 겨울은 또 입을 막고 웃었다. 이 모든 상황은 왜 이리 웃긴가..생각하면서. 초면의 스타벅스 직원에게 십전대보차로 데이트 신청이라니..
네 좋습니다. 추천 감사드려요. 근데 댁이 이 근처신가요? 저희 매장도 자주 오시고..여기도..잘 아시네요. 대보차..도 많이 드셔보신 것 같고. (웃음)
아..네..시선을 떨구며 고객은 말했다..
그렇진 않구요..집은 거의 반대방향입니다..
아..그럼 직장이 이 근처신가 보네요.
아뇨..그것도 아니고..직장은 그나마 조금 가까워요. 집이랑 여기 중간쯤..
겨울은 말문이 막혔다. 그럼 매일 자신을 보러 퇴근 후 집과 반대 방향인 매장까지 와서 커피를 마시고..늦은 시간에 또 한참을 집으로 갔단 말인가..
그런 기운을 느꼈는지 고객은 멋쩍어하며 말했다.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미쳤냐고 하더라구요. 저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님과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시원하게 거절당하면 그 땐 미련도 없어지려나 해서..일전에 님께서 정중히 거절하셨을 때..그 때 포기했으면 좋은데..그게..잘 안되더라구요. 좀 약했나봐요. 펀치가..쨉이 아니라 큰 거 한 방 훅으로 맞아야 정신차릴 것 같아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객은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뇨..절 좋게 봐주셔서 너무 황송할 뿐이에요. 제가 뭐라고..그 걸음을 해주셨나요..지난번엔 너무 매몰차게 대해서 안그래도 내내 죄송한 기분이었거든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뵙고 감사한 마음, 죄송한 마음 전하고 싶었어요.
네..감사합니다. 너무..
그리고는 고객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님을 처음 뵀던 건 출장 때문이었어요. 여기 매장 제가 올 일이 없거든요. 말씀드렸듯 제 행동 반경과 달라서..그 날 제 닉네임..그건 제 평소 닉네임은 아니고..친구들과 장난치다가 바꿔놓은 걸 다시 안바꿔서 그리 된건데..그러니까 그 날의 닉네임은 평소 것도 아니고 의도된 건 더욱 아니고..그냥 사고였던 건데..님께서 너무 웃으셔서..제가 정신이 나갈 정도로 당황했었죠. (웃음)
겨울은 그 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신을 약간 차리고 나니 님의 눈이 제 눈에 들어오던데 그 맑은 기운이 정말..너무 눈부셨어요..엉뚱한 얘기지만 미켈란젤로는 다비드 상을 조각할 때 그런 얘기를 했대요. 그 대리석을 보자마자 그 안에 있는 다비드 조각이 보였다고..님은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님의 얼굴이 제겐 보이는 듯했어요. 처음에는 님의 웃음에 정신을 못차리고 다음에는 님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못차렸죠..진짜 이런 얘기 하고 있으려니 정신 나간 사람 같네요..근데 추호도 거짓이 없는 100% 사실이구요..
겨울은 처음엔 이 상황이 웃기기만 했지만 점점 그의 말에 빠져드는 듯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 같았다. 무엇보다 그의 표현력과 안정된, 다소 저음의 목소리는 인상적이었다. 멋진 사람임을 직관적으로 느꼈다.
근데 실제로 뵈니..제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깨닫게 됐네요. 많이 들으셨겠지만..정말 아름다우시네요
감사합니다. (웃음) 마음이 그런 사람이 되러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말씀도 곱게 하시네요. (웃음)
겨울은 처음 환장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민망함에 웃었다.
아..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마포에서 근무중인 김여름이라고 합니다. 정부기관에서 근무중이고..올해로 서른입니다. 네? 네.. 김광석님의 그 서른. (웃음)
겨울은 현재 스벅에서 근무중이고 이름은 정겨울. 올해로 서른 즈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여름과 겨울은 서로의 이름에 대해 놀라워했고 비슷한 나이라는 점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이에요. 전 겨울씨가 혹여 저보다 한참 어리거나 하면 다가가는게 민폐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거든요. 근데 서른 즈음이란건..위라는 건가요 아님..
여름씨. 초면에 여자 나이 묻는거 실례인 거 모르세요? 그리고 김광석 노래의 정확한 곡명은 서른 즈음에..랍니다.
아..실례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웃음)
근데 여름씨는 굉장히 낭만적인 분이네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내일은 없다..이 주의신가요?
(웃음) 겨울씨가 사람 잘 보시네요. 네..전 사람 일 한치 앞도 모른다는 주의라 오늘을 살자..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일 또 눈이 떠지고 하루가 시작될 가능성도 있으니 10분의 1 정도는 아껴두고 있구요.
수입의 10분의 1만 저축하신다구요? 겨울은 놀라서 물었다.
여름은 겨울의 반응에 외려 깜짝 놀라며..
아니..그게 감정적으로 그렇다는 거고..실제로는 더 남겨두죠. 암요. 열정을 미뤄두지 않는다..네 그렇게 이해해주시면..제가 그렇게 경제 관념이 없는 사람은 아니구요..네..
겨울은 여름이 식은 땀을 흘리며 해명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런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십전대보차도 바닥을 드러냈고 찻집 주인도 아까부터 시간을 보고 계셨다.
여름씨. 오늘 너무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근데 이 말씀 드리러 나온거에요. 저 사실 남자친구 있거든요. 그래서 그 때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린거에요. 찻집 들어오고 바로 말씀드렸어야 했나요? 그러려고 했는데..여름씨 얘기 듣다가 빠져들어서..타이밍을 놓쳤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
여름은 이미 식어버린, 얼마 안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겨울씨. 사실 저도 겨울씨가 혼자일거라곤..아까 들어오셔서 마스크 벗으실 때..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구나 싶었어요. 웃기는 얘기지만 겨울씨 이곳으로 모시고 오는 동안 겨울씨가 예쁜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처음 반했던 건 그 맑은 웃음이었으니..평범한 미모 때문에 세상이 겨울씨의 진짜 아름다움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저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겨울은 말없이 여름을 응시했다.
모르겠어요. 거짓말일 수도 있어요. 겨울씨에게 이미 누군가가 있다는 얘길 들어서 즉흥적으로 생각난 방어기제일 수도 있구요. 하지만 분명한 건..그런 기대를 이미 반쯤 접고서도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그냥..이상형과 대화하는 기분이었어요. 오랫동안 좋아했던 팬의 마음으로 연예인과 두어시간 독대하는..그래서 진짜 좋았고 감사했습니다.
네..제가 그 정도의 과찬을 들어서..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여름씨 한가지만 여쭤봐도 되나요?
네? 어떤?
아까 저한테 영어로 얘기하셨잖아요? A cup of coffee. That's all i'm asking for 맞죠?
아..네..여름은 멋쩍어 웃었다.
왜 그러신건지 여쭤봐도 되요? 혹시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오셨나요?
(웃음) 아뇨. 해외라고는 유럽 열흘 남짓 다녀온게 다인 전형적인 서울 촌놈입니다..이유는 있었는데..
여름은 잠시 생각하다 손을 꼭 모으며 기도하듯 말했다.
겨울씨..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만나주실 수 있나요? 이유를 그 때 설명드릴게요. 지금 매장 문 닫을 시간이고 주인 아주머니가 아까부터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세요. 그나마 제가 면식이 있어 참고 계신 것 같아요. 영어를 쓴 이유부터 겨울씨 궁금한거 있음 다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저도 겨울씨에 대해 너무 알고싶은 게 많아요. 다신 만나자고 하지 않을게요. 한 번만 더..딱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겨울은 순간 고민했지만 여름의 선해 보이는 낯빛을 보고 이내 마음을 정했다.
정말이죠? 다음번 만나서도 또 이런 식으로 연장하시면 실망할거에요.(웃음)
네..알겠습니다. 세번은 뵙지 못하고 절 괜찮은 인연으로 생각해주시는게.. 세번 네번 만나고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보다 훨씬 영광일거에요. 공교롭게도 피천득의 인연 같은 전개네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겨울은 먼저 나가 기다렸다. 여름이 찻값을 계산하며 주인 아주머니와 웃으며 담소하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겨울은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려면 여름은 여기서 겨울과 헤어져야 했다.
여름씨. 여기 찻집 단골이신가 봐요? 실제는 커피보다 전통 차 더 좋아하시는거 아닌가요?
(웃음) 아뇨. 겨울씨. 저 겨울씨한테 고백했다 퇴짜맞고 한 2주 매장에 안갔잖아요? 사실 매일 왔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여기 대신 온거였어요. 2주 연속으로 찾아와서 차를 시키니..아주머니랑 조금은 친해진 거랍니다..
겨울은 여름과 헤어져 버스정류장 쪽을 향해 걸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게까지 관심과 애정을 받은 적이 있었나 돌아보면서..자기도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