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설거지

by 근영

나는 집안일을 어릴 때부터 제법 해왔다. 부모님이 식당을 해오셨기에 나 또한 그 일을 도우며 주방일은 자연스럽게 익혔고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집안일의 일부는 내 몫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20살 대학교를 가면서 1년간 하숙한 이후부터는 내내 자취를 했는데 그 내공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자취했던 집은 아주 작았지만 고요했고, 혼자만의 시간의 소중함을 그때 알았다.

혼자 살기 전에는 인생이 소란스러웠고 정신없었다.

혼자 사는 집에 있으면 온전히 시간을 느끼고 나의 감정을 더 깊이 표현할 수 있었다.


자취 전에는 누가 들을 새라 숨죽여 울었다면 자취할 때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또 전에는 화날 때나 기쁠 때를 표현할 때는 주변인들을 의식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아도 돼서 솔직하게 온전한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듯이 갈무리하거나 다스리는 방법 또한 그때 터득했다.

특히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 같은 육체적인 노동을 해야 좀 가라앉는다.


거품이 잘 나는 수세미로 그릇을 부시고 흐르는 물에 그릇을 닦고 정리해 비어져 있는 설거지통을 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또 설거지하는 동안은 나름 집중하느라 부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화장실 청소할 때도 거친 솔로 바닥과 물때를 벅벅 문지르고 물로 화장실을 씻어 내릴 때 그렇게 후련할 수 없다.

이불빨래를 하고 나서 빳빳해진 이불과 향긋한 세탁세제 냄새를 맡으며 누워있다 보면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생각이 조금 쿨해진다.


번뇌는 한번 시작하면 몰아치듯 쏟아져온다. 그 생각을 잠시 멈추면 부정적인 마음이 가라앉고 내가 견딜 수 있을 정도가 되는데, 그 '멈춤'이 어렵다.


사람마다 '멈춤' 버튼이 필요하다.


나는 그 버튼을 간편하게는 설거지, 많게는 집안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 또 터득한 것은 러닝이다. 설렁설렁 걷는 것보다는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근육이 딱딱해지고 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만큼 뛰어야 한다. 한동안 나를 잠식했던 무력감이나 무료함, 우울함을 이렇게 극복했다.


설거지는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힌다면 러닝은 해소를 하는 것 같다. 겸사겸사 설거지하면 주방도 깨끗해지고, 러닝 하면 건강해지니 아주 좋은 버튼인 것 같다.


요즘 나는 이런 버튼을 하나씩 늘려가고 있다. 그 버튼이 일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멘탈을 건강하게 단련해주다 보면 나의 삶이 조금은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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