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까이 있는 것들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크기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새겨진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외곽에는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바투 케이브’라는 힌두 사원이 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산 정상의 일부가 뚫려 있어 햇빛이 거대한 원형으로 떨어지는데, 어둠과 빛이 갈라지는 그 광경은 오래된 신화 같은 느낌을 준다.
가족 여행에서 우리는 그 신비로운 동굴을 보러 수백 개의 계단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뜨거운 공기는 비 오듯 한 땀으로 옷을 적시었다. 나는 뒤에 따라오는 아내와 딸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속도를 조절했다. 초등학생인 딸아이도 땀범벅이 되어 끝까지 올라왔고, 정상에 서자마자 나는 반가움과 기특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운동을 제대로 안 하니 힘들지!”
딸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빠는 쉬면서 올라왔잖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같은 계단’을 올랐지만, 딸에게 그 계단은 나보다 훨씬 가파른 산이었다.
내가 쉬었다고 생각한 지점이, 딸아이에게는 숨이 넘어갈 듯 끝까지 내디뎌야 하는 구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 계단을 떠올린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 대부분은, 사실 내가 오른 계단의 높이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 한 베이글 가게에서 일하던 청년이 과로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젊고 건강했으며,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냈다는 주변의 증언이 이어졌다. 여자친구에게 보낸 문자에도 짜증보다는 ‘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그 열정과 책임감은 결국 무거운 짐이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때 우리 사회는 이를 ‘열정 페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열정을 갖고 임한다면, 낮은 보수와 고된 노동쯤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은 청년들의 계단 높이를 헤아리지 않은 채, 기성세대가 스스로 걸어왔던 계단을 기준으로 만든 말 같기도 하다.
기성세대도 긴 시간 고생하며 살아왔다. 대가 없는 야근, 까다로운 상하관계, 보장되지 않은 미래. 그 모든 걸 버텨냈다고 해서, 오늘의 청년들이 똑같이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내가 힘들었으니 너도 버텨라는 논리일 뿐이다.
철학자 에피테토스는 “고통은 나를 단련하는 훈련장이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화생방 훈련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을 같은 고통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찾아오지만, 고통의 무게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누군가가 쉽게 오른 계단이, 누군가에겐 평생의 체력과 용기가 필요한 가파른 비탈일 수 있다.
그날 바투 케이브의 계단에서 뒤돌아보던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한참 뒤에서 작은 다리로 힘겹게 나를 따라오던 딸아이를 기억하며 깨닫는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오른 계단의 수가 아니라, 그 계단이 그에게 얼마나 가파른 길이었는가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재단하지 않겠다고, 내 기준으로 타인의 계단을 평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높이를 가진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누구도, 그 계단의 기울기를 대신 느껴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