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지켜진 약속
집을 나갔던 오빠는 몇 달 후 나타나, 나를 인근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에 등록시켰다. 인천 어느 치킨집에 취직해 배달일을 하며 내 학원비를 마련해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모든 돈을 가져가,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오빠가 생각해 낸 대안이었다.
그런데 이미 개강일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있어 모든 과목의 진도가 꽤 나간 상태였다. 알파벳조차 몰랐던 나는 모든 과목의 놓친 단원들을 혼자 공부했다. 그렇게 한 달 쯤이 지난 어느 날, 버스에 앉아 내다본 자동차들 뒤에 붙은 영어 단어들을 스스로 읽은 순간의 놀라움! 내 눈앞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어린 시절, 한글을 혼자 깨치고 거리의 모든 간판과 과자 포장지의 글자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댈 때의 기쁨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한글의 소리를 알아갈 때의 기쁨이 다만 글자를 읽는 재미였다면, 영어 단어를 읽는 순간들의 기쁨은 세상은 내가 아직 모르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생물 수업에서 배우는 온갖 지식도, 수학 수업에서 배우는 온갖 계산법도, 국어 수업에서 배우는 시와 소설도... 모든 배움이 흔쾌하고 신기했다.
하지만 내가 학원을 가기 위해 늦은 오후에 가게를 나선 첫날부터 아버지는 내게 입을 닫았다. 먼저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게에서 8시간 넘게 같이 장사하면서 대화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언(無言)에 가득 찬 긴장감을 감당하는 일은 참으로 불편했다. 공부를 그만두면 해소될 불편이었다.
당신 돈이 들지 않는대도 내가 공부를 하는 일이 그렇게 못마땅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알 수 없었고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난 공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그 기쁨을 다시는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찬란한 열여덟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게가 위치한 성남시 안에는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반을 운영하는 학원이 없었다. 서울로 다니려면 학원비에 교통비까지 필요했다. 하지만 오빠는 사정이 있어 당장은 내 학원비를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동안 오빠는 혼자 공부해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내가 공부를 중단하고 있던 해의 겨울, 오빠는 만성 맹장염이 터지기 직전에 응급실에 실려 갔다. 오빠는 수년 동안 병명을 알지 못한 채 맹장염의 통증을 혼자 참은 것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탈진한 채, 다시 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오빠를 보았을 때 미안하고 미안했다.
다시 살림과 가게에 매달려 시들어 가던 나는 아버지에게 두 번째 반항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받는 돈을 조금씩 빼돌려 책 살 돈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근처 작은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요즘은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어 책을 사지 않아도 읽을 방법이 있지만 그 시절엔 사거나 지인에게 빌리지 않는 한 책을 읽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산 책을 굳이 아버지 몰래 읽지 않았다. 가게에 가득 찬 꼬마 손님들이 아버지와 놀이를 하고 장난을 주고받는 소란의 한가운데에서 내놓고 읽었다. 내가 그 책들을 어떻게 사는지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빼돌린 돈으로 책을 사 읽던 열일곱 겨울, 뒷방에 사는 동갑내기 여학생이 방학 동안 가방 공장에서 시다 일을 하기로 했는데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는 방학에는 어차피 가게도 한가하고, 돈 버는 일이니 가타부타 말 없는 아버지가 못마땅해할 일은 아닌 듯하여 동의했다.
하루 열 시간쯤 많은 재봉사들이 박아낸 가방의 실밥을 샅샅이 찾아 쪽가위로 잘라내는 일이었다. 지극히 단조로워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함께 다닌 동갑내기 덕분에 무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겨울 방학 내내 공장에서 일해 받은 월급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책을 사기 위해 빼돌린 돈들에 대한 부채감을, 그 겨울이 끝날 즈음 털어내 버린 것이었다. 그 사람에겐 아무것도 빚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팽배한 무언의 비난 속에 내 열일곱이 끝나갈 즈음, 언니가 나타났다. 동사무소를 뒤지고 뒤져 우리가 사는 주소를 알아냈다고 했다. 20대 초반이 된 언니는 안양 어느 반지하 단칸방에서 남편 그리고 어린 아들과 살고 있었다. 언니의 남편은 일을 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은 듯했다. 언니는 어린 아들을 돌보며 온갖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고 있던 언니가 검정고시 공부마저 쉬고 있는 나를 위해 몇 달 동안 돈을 모은 모양이었다. 이듬해 늦은 봄, 언니는 서울에 있는 대형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에 나를 등록시켜 주었다. 천만 다행히도 그 학원은 매달 월말고사를 치러, 주야간 통합 석차 3등 이내 학생들에게 학원비를 면제해 주었다. 언니의 사정을 빤히 아는 나는 그 석차가 필요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집안일과 가게 일을 하다가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쯤 걸려 학원에 도착했다. 밤 10시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자정이 다 되었다. 주야간을 합쳐 천 명에 가까운 학원생들 속에서 전체 석차 3등 안에 드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루 서너 시간을 자며 공부해 대체로 학원비를 면제받았다. 면제받지 못하는 달은 언니나 담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늘 잠이 부족해 몸은 피로했지만, 공부는 신났다. 하여 나는 홀로 치열하고 홀로 찬란했다.
눈뜸
파울로 프레이리는 배움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세계를 읽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배움이란 시험을 통과하거나 신분을 상승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현실을 인식하여 이름 붙일 수 있게 되는 경험이다(『페다고지』, 그린비).
현실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다만 현실에 대한 이해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해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겠다는 선언일 수 있다.
내가 버스에 앉아 바깥의 자동차들 뒤에 붙은 영어 단어들을 스스로 읽어냈던 순간, 세상의 물리적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해도 내게 그 세상이 갖는 의미는 완벽히 달라졌다. 있는지도 몰랐던 의미의 세계로 들어서며, 내게 세상은 더 이상 완결된 공간일 수 없게 되었다. 그곳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의미들로 웅성거리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생동의 장소가 되었다.
프레이리가 가리킨 ‘세계 읽기’는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다만 생존뿐이던 목숨이 세계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부정형의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