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_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에게

얕잡음이 남긴 차가운 감정의 잔여

by Evanesce

Hatred [ heɪtrɪd ]

1. 증오[혐오](감)


증오라는 감정의 가장 깊은 지점에는 대개 한 가지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다. "저 사람은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라는 상대의 오만한 확신에 대한 분노이다.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자신의 행동은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는 그 태도는 상처보다 먼저 모욕을 남기고 그 모욕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단단한 형태의 증오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사람을 향한 가장 큰 경멸은 대놓고 하는 공격이 아니라, 몰라줄 것이라는 전제 아래 행해지는 은근한 기만에서 비롯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는 눈빛,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데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느슨함, 자신의 치졸함을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리라 믿는 확신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서서히 마음 깊은 층을 긁어내고, 그 긁힌 자리가 반복될 때 분노는 더 이상 흔들리는 감정이 아닌 서늘하게 굳어버린 증오로 변한다.


'증오'는 뜨거운 감정이 아니다. 차갑게 응고된 감정의 표현이다. 그 차가움은 이해의 부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가장한 무시에서 출발한다. 마치 "너는 그냥 속아 넘어가면 돼"라는 말 없는 선언처럼, 상대를 깔아뭉개는 그 태도는 말로 표현되는 공격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인간은 모욕을 받으면 잠시 흔들리지만, 약자로 취급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 감정은 비열함을 감지한 동물의 본능처럼 단단히 결을 세운다. 그리고 그렇게 세운 결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기만을 알아채는 순간, 공기는 비정상적으로 맑아지고 이상하리만큼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아, 이 사람은 나를 모자란 존재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 깨달음은 짧고 날카롭고, 어쩌면 그 어떤 폭언보다 더 단호하며, 마음의 깊은 층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과정은 항상 감정적인 폭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얼마나 계산적이었는지, 얼마나 약삭빨랐는지, 얼마나 나를 만만하게 여겼는지,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깨닫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보가 아니기에 어느 순간엔 반드시 눈치채게 되어 있고, 그 눈치챔 이후에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보다 묵직하고, 상처보다 차가우며, 실망보다 오래가는 증오의 결과로 표출된다.


증오는 이해받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상대의 오만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그 확신이 반복되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둠이 만들어지고, 그 어둠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어둠은 더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마침내 하나의 '결'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그리고 그 결은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증오는 의외로 쉽게 일어나지 않지만, 한번 생성되면 거의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정적이고 냉혹한 질감은 다시 돌아가 상처를 헤집지도 않고, 정면으로 폭발하지도 않지만, 단단하게 응고된 암석처럼 누군가에게 차갑고도 선명한 경계를 새기게 된다.


어쩌면 증오의 본질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나를 과소평가한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 기억은 깊은 곳에서 가라앉아 다시는 그 감정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변화하고, 그 다짐은 사람을 더 날카롭게, 더 단단하게 만들게 된다.



이전 16화G _ 빛바랜 갱지와 같은 마음의 투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