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테세우스의 배

by 왕잔치


방금 고민하고 있던 주제다. 분명히 언젠가 읽었던 내용이다.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이었다. 그는 그리스 신화들이 항상 그렇듯이 아주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그 당시의 조선 기술이 당시의 영웅들만큼 위대하지 못했는지 배에 자꾸 문제가 생겼다. 그는 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의 부분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했다. 그의 여정이 끝나고 나자, 그의 배에는 처음 그가 길을 떠날 때 함께했던 나무판자들이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조리 새로운 부품들로 교체된 뒤였다. 그래도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였으니까, 사람들은 그가 여행을 처음 떠날 때 불렀던 그 이름 그대로,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테세우스가 맞았나? 분명 이 이야기는 처음 읽을 때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지금까지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지금은 주인공이 테세우스였는지, 아니면 오디세우스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아가멤논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까먹은 거겠지. 다르게 말한다면 내가 테세우스의 배가 된 것이다(정말 이야기의 주인공이 테세우스라면 말이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뇌 속을 비집고 들어가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있을 터라고 믿으며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는다. 우리의 감각이 하나라도 작동하는 동안에는, 아니, 하나조차 작동하지 않더라도 이런 생각은 계속해서, 마치 <터미네이터 1>에서 처음 등장하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처럼 연기와 번개와 함께 갑자기 머릿속에 태어난다.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라면, 우리의 문제는 물이 샌다거나, 돛이 찢어졌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품이 너무 많아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멀쩡한 부품을 배가 배이기 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닷속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사실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따분한 책을 읽는 습관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관념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도 이 주장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격렬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도 난다. 자신이 그저 생각 덩어리에 불과하며,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 확실한 존재가 아니라는, 경고와도 다름없는 문장을 읽고도 전혀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나를 이루는 관념들을 백사장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조개들만 골라 담는 어린아이처럼 고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사실 우리는 우리를 이루는 관념들에 대한 통제력이 조금도 없다. 그것들은 백사장에 떠밀려오는 조개껍질들처럼 의지와 전혀 무관한 파도에 의해서 떠오르고, 의지와 조금도 상관없는 바람에 의해서 모래 아래로 덮여 사라진다. 관념들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들을 자주 떠올리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생각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방금 새로 떠밀려온 조개들을 살펴보기만 해도 하루는 금방 지나간다. 인간이 관념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지금에서야 어떤 이야기보다도 나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공간은 현존재로서 스스로를 성찰하거나 기억을 붙잡아둘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끊임없이 무료 임대인들의 손에 의해 무질서하게 개조되며, 설계도를 잃어버린 채 제멋대로 증축되는 테세우스의 배가 되어 간다. 내가 사는 신촌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록이 필요하다. 우리는 신촌의 문화와 예술, 그 속에서 부딪히고 스쳐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글로 남긴다. 그것은 파괴와 증축 속에서도 신촌이 여전히 신촌임을 증명하는 각인이며, 무너져가는 설계도를 대신할 새로운 뼈대이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서정적인 설계도다.


글에도 값어치가 있다. 예를 들어 신문에서 연재되곤 했던 러시아의 도박중독자-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글들을 보자는 거다. 별 말 같지도 않은 장광설을 죽을 때까지 늘어놓는 인물과 서술자로 점철되어 있다. 읽는 것은 고역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페이지 수에 따라 원고 값을 쳐 주었고, 가난뱅이 노름꾼 표도르는 오늘 공중으로 날려 먹을 판돈이 시베리아의 메마른 싸락눈만큼이라도 더 늘어났으면 했다. 고전적 미의 측면에서 그런 유형의 글들이 썩 자랑할 만하지 못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적확하게 남긴다는 측면에서, 키릴 문자로 빼곡하게 휘갈겨 쓴 누런 원고지는 작가의 현주소를 여실히 남겨 보여주고 있다. 이제 쓰는 글들도 그런 거다. 즐거운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한 장 모두 의미 있는 사진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거기 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여러분도 댓글 하나씩 남기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신과 세계를 잃어버리지는 않지 않을까 싶다. 독사진보다는 단체 사진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함께 벌입시다. 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