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출산 · 초고자살 사회 톺아보기(3)

가혹한 교육과 변화의 필요성

by 리드부흐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다. 1952년 영국 'The Times'의 한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생겨나길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Expecting democracy to bloom in Korea was like expecting a rose to bloom in a trash can.)"고 했다. 하지만 한국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냈다. 선거를 통해 집권정당을 갈아치우는 양당체제의 안정화를 이뤄냈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는 대단한 혁명을 무려 3차례나 해냈다.


정치뿐인가? 경제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1950년대 100달러도 안되는 1인당 국민소득에서 현재 3만 불이 넘는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동시에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국가가 됐다. 3050 클럽(1인당 GNI 3만 불, 인구 5천만 명 이상의 국가) 가입국 중 식민지를 동반하는 제국주의 역사 없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유일한 국가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룬 급격한 발전의 현대사는 가히 '전설Legend'을 방불케 한다. 렇기에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이 한국을 흠모하고 보고 배우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지 국민(독자)들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한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아서 자랑스럽고 매사가 만족스러우며 행복이 자아나는 삶을 살아가고들 계신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2023년 기준 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자살율 24.8명(OECD 평균 약 10.7명)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OECD의 여타 국가들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이쯤되면 장관급 정부부처로 '자살부(Ministry of Suicide)'를 신설해야 할 판이다. 당최 한국사회의 이러한 이중 면모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드러난 순한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기보다는 그 근간을 이루는 '교육'을 돌아봐야 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어떤 교육을 해왔나? 구한말 김홍집 내각에서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운 교육이 도입됐고, 그 교육은 과거 송나라의 주희(1130~1200)가 집대성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대표되는 사서 중심의 유학으로부터의 탈피였다. 학교에서는 국어를 일본어로 대체했고 영어를 외국어로서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술과 황국신민화를 위한 일본사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관료를 뽑기 위한 시험 과목으로는 법학이 주됐으며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 역시 서양의 학문으로 도입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쓸모있는 인간'이 되기 위함이 교육의 목표였다. 사회에 유용한 인재가 되어 일을 실수없이 잘 해내고 물품 및 서비스를 생산하여 시장에 공급하는 것. 그럼으로써 국가에 기여하는 것. 이것이 교육의 목표였다. 1945년 8윌 15일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면서 일본어와 황국신민화 교육이 없어지고 한글과 국사로 대체됐을 뿐, 교육의 근간은 크게 바뀐 게 없다. 이후 이승만 및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며 전후 미국의 원조와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경공업 및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대표하는 중공업 활성화를 통해 급격한 산업 발전을 이뤄냈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경제이건 한 세대의 희생적 노력 없이는 성장을 이어갈 수 없다"는 논리로 국민들을 가열차게 밀어부쳤다. 그래서 정말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무척 대단한 일이다. '한강의 기적'이 일이났고 1997년 IMF 이전까지 다들 휘황찬란한 미래를 꿈꿀 정도로 나라에 풍요가 흘러 넘쳤다. 모두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했다. 그동안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들을 쥐어짜내는, 선진국이 할 수 없던 전략을 취하고 세계화와 무역 활성화라는 전지구적 시대의 흐름을 타 한껏 쏟아지는 과실을 듬뿍 담아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며 더이상 값싼 노동력을 함부로 부리며 생산해낼 수 없다. 그것이 높은 효율성과 효과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제는 그 강점을 중국이 모조리 흡수했다. 그들이야말로 막대한 노동력으로 맹렬한 성과를 창출한다.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기술력을 마찬가지로 추구한다면 막대한 물량을 자랑하는 중국을 이겨낼 수 없다. 태양광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들이 만들어내는 셀, 웨이퍼, 모듈 등은 과잉생산까지 되어 전세계로 값싸게 공급된다. 이러한 물량을 시장에서 다 받아내면 여타 국가들의 태양광 관련 에너지 기업은 도산할 수밖에 없다. 안보 차원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서방 국가들의 협력 내지 원조로 인해 그 타격을 피해가고 있을 뿐이다.


즉, 지금까지의 '산업화 시대 맞춤형 교육'은 수명을 다했다. 더이상 이런 교육으로는 국가의 산업을 지탱할 수 없다. 하지만 교육은 그제나 지금이나 아주 여전하다.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평가한다. 똑같은 방식으로 줄 세우고 똑같은 방식으로 보상한다. 선진화된 표준에 부합하는 더 고등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게임의 룰'이 그대로기에 마지못해 따른다. 그렇기에 그와 같은 기만에 분노하고 그와 같은 어른들을 증오한다. 그러나 반항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못해 따른다. 지금의 시기만 넘기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장한 청소년 및 학생들이 미래에 어떠한 어른이 될까? 단 공부는 체제와 제도에 자신들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진실을 감각적으로 느끼기에 평생 학습을 저주한다. 오로지 남들에게 평가받기 위해 하는 게 공부다. 그러므로 그럴싸한 학벌만 따냈다면 더 이상의 수학은 필요없다. 대충 회사에서 요구하는 IQ 테스트와 유사한 '적성평가'만 잘 수행하면 된다. 나머지는 이리 까불고 저리 까분 스펙들로 채워낸다. 그렇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참인재'로 나아간다. 회사에 취직하면 어찌 되는가? 하라고 하는 걸 의문없이 잘 해낸다. 명령과 규정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냥 하라고 하니 할 뿐이다. 그것이 옳은 것이기에.


그러나 이 같은 순종은 어디서 오는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체제와 제도에 기반한 교육 체계가 양산한 인재 모델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기만당하고 조작당한다는 사실을 가슴 한켠에서 여렴풋이 인지한다. 하지만 그러한 공포와 고통이 마음에서 자라나기 전에 재빨리 뿌리 뽑아 버린다.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타인을 괄시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 자기들처럼 제도권에 의해 길들여진 훌륭한 인재가 되지 않으면 그 삶은 무조건 틀린 것이라 믿어야 한다. 그렇기에 주변에 있는 한량이나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을 한껏 증오하고 혐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으로써 고개 숙이는 불쌍한 이들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치로운지 증명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이 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 현상이다. 저주받은 인간들의 비참한 묵시록이다.


사람들의 삶은 황량하지만 막대한 경제 성장이라는 결실을 낳기에 괜찮은 게 아닐까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와 같은 방식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중국이 훨씬 더 잘한다. 게다가 중국은 소위 '하나의 중국'이라는 표명이 의미하는 바처럼 전국민이 대동단결하여 통일성을 이룬 채로 단일한 목표로 나아가는 묘한 특성이 있다. 1966~1977년간 이뤄진 '문화대혁명'이 대표적인 예로서 그들이 얼마나 자의식을 무자비하게 내던지고 일치된 의사를 통해 단결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근래의 '한한령'이나 최근의 '한일령'처럼 자신들의 각별한 취미나 욕구도 다 저버린 채 중국공산당 중심의 국가 의사에 순종하는 각별한 행동 양식을 지닌다. 어딜 가든 죄다 검사하고 기록하여 개인의 사생활 따위 단박에 무시하는 사회 질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는 중국이 아직 대약진 운동(1958~1962)과 문화대혁명(1966~1976)이라는 미몽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강력한 중공업 활성화 정책 추진을 통해 산업화 시기의 과실을 비옥히 따냈다. 이를 현재 베트남과 같은 국가에서 한국의 모델에 기반해 이뤄내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이미 적시를 놓쳐도 단단히 놓쳤고 중국이라는 잠자던, 아시아의 막대한 호랑이가 덩샤오핑(1978~1992년간 집권)이라는 실용주의적 지도자를 통해 깨어나 버렸다. 게다가 중국 역시 타이밍을 너무 잘 잡아서 2001년 9.11. 테러를 통해 미국이 중동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미국의 견제를 따돌리고 WTO에 가입(2001.12.11.)하는 대성과를 이뤄낸다. 지금의 중국은 그와 같은 흐름이 현저하게 눈앞에 드러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육의 근간이 바뀌어야 한다. 빠르게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야 한다. 경제적인 발전으로 인해 당연 정신적인 발전도 갈구하기 마련인데 불구하고 여전히 인격을 모독하고 조작하는 순종적 인재 양산의 교육 모델에서 탈피해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자연히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또한 그렇기에 행복하게 배우고 학습하는 교육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의 뼈대를 뒤흔드는 증오와 혐오가 난무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 내리는 모욕이 이웃들간 연대를 해친다. 이런 사회에선 누구도 세상을 위해 노력하자는 동기를 지니기 힘들다. 누군가 그러한 동기를 지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패한 자기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미 세상이 지독하고 이기적인데 자신만 우아하고 이타적이라는 건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근간을 바꾼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무기로 세상에 직면하는 강점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똑같은 수단으로 누가 더 값싸고 잘 만드는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세상에 내보이게 된다. 이 같은 방식은 자고로 본연의 창발성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이기에 삶이 뿌듯하고 만족스럽게 된다. 더이상 다른 누군가와 경쟁함으로써 자신이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참해질 필요가 없다. 꾸준히 본인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 낸다. 그것이 당장 대단한 성과를 이뤄내진 못할지라도 타인을 깔아뭉개려는 지독한 사디즘과 이에 버무려진 우매한 나르시시즘에서 탈피하는 현명한 방법이 된다.


더불어 남들에게 평가받는 학습과 노력이 아니기에 공부에 진정한 흥미를 붙인다. 평생토록 배워나갈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매진한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기쁘다. 이러한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공동체는 다같이 세상을 공구하는 포용력 깊은 사람들의 모임이 된다. 어른들은 지속적으로 진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고 이를 보며 자라는 아이들은 '진리 탐구'를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 이 같이 비옥한 문화 풍토에선 대단한 결과물들이 창출된다. 과학 부문 노벨상을 우리라고 못 탈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현재 한국은 어떠한가? 인재 양성에 무던히도 몰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회사에서 행정업무나 잘 처리하는 '빨리빨리'의 기계들말고 대단한 인재라는 걸 찾아볼 수나 있나? 독서라도 많이 하는지 의문이다.


이 같이 참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의 '대단한 성과'에 대한 환상과 연관한다. 본질적으로 이 지점에서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한국이 대단히 성장한 이유는 별게 아니다. '시기'를 잘 잡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오쩌둥이 1949년에 국공내전을 마친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나라를 이끌어갔을 때. 그가 사로잡힌 이념적 사유를 진즉에 끊어내질 못하고 어영부영 권력의 장기화를 도모하여 신념을 배반했을 때. 이때가 바로 한국이 단박에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이다.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고 함께 불리는 싱가포르, 대만, 홍콩이 이 기간을 풍성히 누렸다. 그래서 이 4마리의 용이 여전히 선전하고 있나? 아니면 앞으로도 선전할까? 아직도 20세기 중후반의 융성했던 영화 산업에 집착하는 홍콩의 모습을 보면 그 같은 생각을 하기 어렵다.


과거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찬연한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걸 홍콩은 보여주고 있다. 이미 금융산업 일변도의 급행열차 선로를 돌릴 수 없어 극한으로 치닫은 그들에게 새로운 여지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끝없이 양조위, 유덕화, 왕가위 등을 모시고 또 모시며 휘황찬란했던 과거를 되새기고 되새길 뿐이다. 그러한 방식을 고수하면 언젠가 세상이 또 알아봐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 어두운 자들에게 인자했던 역사가 그 어디 있던가. 인류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잉카-마야-아즈텍 문명,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및 태평양 군도와 북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들, 그리고 현재 가자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예수 탄생의 요람인 팔레스타인 등 다 어떻게 됐는가? 기존의 양식을 여전히 고수하니 세상이 알아봐주고 있던가? 세계가 그리 포용적이길 다들 바라 마지 않지만 인간세는 딱히 녹록치 않다.


그렇기에 우리나라가 지니고 있는 '국뽕 신화'에서 탈피해 새로운 국가지계를 마련해야 함을 자각한다. 수치로 그 근거를 증명하는 건 진부하다. 청소년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자살'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출산율이 전세계에서 단연 최하로 1쌍당 0.7명 내외를 낳는다는 건 주지의 참람한 진실이다. 편애한 수준의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으로 복지 공약을 남발하며 출산율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여기저기서 북을 치고 있다. 적군에게 행하던 성동격서를 국민한테 남발한다. 국민은 자신에게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전략적으로 기만해야할 적일 뿐이다. 그 누구도 국가 전체의 뿌리를 다시 내리도록 하는 장중한 대계를 꾸리고 있질 못하다. 쓸데없이 비위나 맞추며 대강 하고 넘어가려는 '포크배럴Pork Barrel'만 차고 넘친다.


이렇게 슬프지만 직면해야 할 현실 및 변화하는 세계로 인한 변곡점과 이에 기반한 당위성에 대해 두서없이 논해보았다. 현재 우리가 가진 문제점을 토대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기존의 가학적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진정 공부를 사랑하고 타인을 신뢰하는 포용적이고 안전한 교육 환경의 마련이 급선무인 것이다. 우리는 비록 지독한 방식으로 공부해왔지만 이후의 세대는 행복하게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것이 자신만의 소명을 알아가고 이를 세상에 펼침으로써 모두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상호 호혜적 문화풍토의 조성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이러한 나라에서는 조아한 문화가 꽃필 게 당연하고 그렇기에 진정 선진국다운 창조가 흘러 넘치게 된다. 그것이 현재 K-POP 및 드라마와 영화로 세상을 매혹하는 우리가 능히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초저출산 · 초고자살 국가인 우리나라를 톺아보는 글을 3부작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주 많은 부문에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피상적일지라도 충분히 다룰 만큼 다루기는 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게는 사실 그보다는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이들이 한국이 모국이기에 사랑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살아내는 게 무척이나 힘들 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그런 나약함을 함부로 드러내면 이를 약점으로 여기기에 어디 가서 티도 내지 못하고 묵묵히 견디며들 지내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참으로 인간에게 가혹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혼자 집 안에 은둔하는 이도 있을테고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방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을 터다. 그러나 Das Leben ist scho"n! 인생은 아름답다. 삶은 고로울지라도 그렇기에 되려 찬연하다. 끝없이 무너질지라도 다시금 쌓아올리는 '시지프스의 짐'을 우리는 짊어져야 한다. 허무해보이지만 그 끝없는 고군분투야말로 삶을 진정 아름답게 하는 무엇이다. 모든 게 무질서로 방향지어지는 '엔트로피'는 우주의 진리지만 그것을 거스르려는 생명의 작용이야말로 우주의 본질이다. 대체 왜 생명이 나타났는진 미스테리지만 그 목적은 분명하다. '엔트로피에의 저항'이다.


따라서 비록 비참하고 버거울지라도 다시금 힘을 내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내길 꿈꿨으면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단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 찬란한 삶으로 나아가기를,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구성원들에게 부탁해보며 조촐한 글을 총총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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