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출산·초고자살 사회 톺아보기 (2)

언어의 문제

by 리드부흐

한국인들은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 한국인들이 특별히 똑똑해서가 아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덕분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자유롭게 연결하여 음절과 단어를 만들어내는 조어 능력이 월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니 많은 것들을 상징화할 수 있게 됐다. 많은 것들을 '상징화'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동안 사태나 사물을 고지곧대로,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대로 이해하던 방식에서 언어로 이뤄낸 상징성에 부합하는지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순수하게 느끼던 방식을 점차적으로 잃어가게 된다. 하지만 덕분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사고思考를 하게 되며 놀라운 문명의 발전을 이뤄낼 수 있게 된다. 나름 괜찮은 등가교환(?)인 것이다.


이 같은 언어의 발달이 심화하며 문명은 더욱 발전했을지 몰라도 크나큰 부작용 하나가 발생한다. 대상을 특정 방식으로 규정 짓고 이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언제부턴가 언어가 '약속'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후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게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고 끊임없이 떠들어 댄다. 자신이 언어를 할 수 있게 된 게 신의 천지창조와 다를 게 없다고 믿는다. 음소나 음절을 하나 뱉어낼 때마다, 단어를 하나 만들어 낼 때마다, 문장을 하나 구성할 때마다 창조의 기쁨으로 가슴이 충만해진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만물이 자신의 언어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결과 우리가 현재 구사하고 있는 언어야말로 '진리'라고 여기게 된다. 언어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쳐내기 시작한다. 말 한마디에 집착하며 "너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잘못됐다"거나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니 난 잘못 없다"라는 둥 언어로만 사태를 판단하며 장난질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또한 국적, 출신지, 거주지, 학벌, 외모, 직업명, 직장명, 거주 아파트 및 소유 물품의 브랜드, 월급의 범주화를 통한 등급화 등 언어로 온갖 짓거리를 다 한다. 인간을 이러한 언어의 체계 속에 파묻혀 끝없이 소외시킴으로써 세상을 파지把持해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된다.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이 언어로서 고정되니 만물이 로고스Logos 하에 질서정연해 보인다. - '빛이 있으라하니 빛이 있었고...'


개중에 언어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의 극단에 선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만큼 기초 문해력(비문맹률)이 높은 나라가 없다. 그렇기에 한국인만큼 언어로 이뤄낸 상징과 그 표준Standard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없다. 표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열 받는다. 언어로 이뤄지는 모순 없는 세계가 무너지는 걸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 비정상적이기나 기괴해보이면 어떻게든 고쳐주려고 안달이다. 비표준Nonstandard적인 사람은 비정상적Abnormal인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혐오 받아 마땅하고 이 혐오는 그를 고쳐주기 위한 약이지, 결코 비도덕적 감정 표출이 아니다. 그렇기에 언제든 혐오할 만한 대상을 하이에나마냥 찾아 다닌다. 뭐 하나라도 꼬투리 잡을 게 보이면 '드디어...!'와 같은 마음으로 득달같이 달려든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스트레스를 이제야 분출한다. 타인을 짓밟을 수 있는 무한한 전능함을 발휘한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보자. 스스로는 괜찮을까? 자기는 안 그러니 상관 없을까? 모르긴 몰라도 해당하는 모든 기준을 똑같이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자신을 단죄해야 할 것이다. 각자가 머릿속에서 집착하는 고정된 '언어적 구성물'이 다르기 때문에 예시를 들자면 천차만별이겠으나 한국인들의 가장 큰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 '외모'를 꼽아보자. 외모가 부족한 사람에게 그 사람이 제대로 자기관리를 하지 않았기에 무시받아 마땅하다는 사고를 가진 이를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아주 간단하게 자기혐오로 이어지는데, 아무리 자신의 외모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오만한 인간이어도 나이 들면 그 외모는 무너지게 된다. 자신을 죽이게 된다. 물론 어떤 사고나 사건이 중간에 벌어질지 모르고 외모에 대한 세상의 기준이 바뀔지도 모르며 더더구나 외모라는 건 상대적으로 누구보다 낫다이기에 타인들이 세상에 있어야만 비교하고 우열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기에 못난 사람들을 본인이 깔보며 하나하나 다 척결한 경우 이후에는 가장 우월한 외모를 가진 이들 밑에 있는 본인이 무시받다 소멸해야 한다. 자연스레 타자 비하 · 혐오는 자기 비하 · 혐오로 이어진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언어를 만들어대서 괴롭게 살아가는 걸까? 언어라는 천지창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걸 언어 속에 넣을 수 있다. 오만한 사람이 즐기는 어리석은 영역 중 하나가 '방법론方法論'의 추구이다. 어떤 방법을 쓰면 세상 문제가 마치 다 해결될 것처럼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사태는 무지 복잡하다. 대상을 어떻게든 언어화하여 묘사했을지 몰라도, 사태를 언어로 묘사한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대상 하나하나도 복잡미묘하지만 사태는 대상들이 얽히고설킨 복잡함의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대상 하나하나가 어떤 상태인지도 끊임없이 바뀌는데 그 끊임없이 바뀌는 게 상호작용하며 사태를 이뤄간다. 이를 한 문장으로 간단히 서술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런데 많이들 간단히 축약할 수 있는 것처럼 쉬이 여긴다. 게다가 그것에 대한 솔루션까지 제시한다.


기실 그 맹점은 명약관화하다. 사회생활이든 연애든 잘하려면 '이래야 한다'라고 설파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말은 잘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배경에 대한 통찰을 곁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사회생활에 너무 몰두해서는 안된다고 주창하는 이는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막바지에 배신 당했거나 보상받지 못하여 응어리가 졌을 것이다. 또한 연애에 있어 밀고당기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경우 자신이 더 많이 좋아해서 상처받았기에 그러고 있을 것이다. 혹은 너무 무관심하게 행동하여 반작용으로 이별통보를 받았거나. 뭐가 됐든 자연스레 삶에 녹아들었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자기 이미지Self-image'를 형성하여 추구한 결과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귀결했고, '왜 이렇게 됐지?'라는 후회와 함께 찾아오는 삶으로부터의 소외현상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의 서두에서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설한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일컬을 수 있으면 그것은 더이상 도가 아니요,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도 더이상 이름이 아니다. 함부로 언어로 규정짓고 이렇다 저렇다 하면 그 순간 그것은 더이상 그것이 아니요, 내 손아귀에서 저 멀리 사라져버린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다(如夢幻泡影). 그렇기에 함부로 과거의 어떤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도 이럴 것이라든지, 내가 그렇게 겪었기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 너도 그럴 것이라든지 하면 안된다. 차라리 수학적 통계로 확률을 제시할 수 있으면 모르겠으나, 그것은 일상 속에서 불가능할 것이기에 말이라는 건 기실 누구에게도 도움 안되는 수단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아무 말 말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민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BC318년, 양혜왕梁惠王이 맹자孟子를 만났을 때 나라에 어떤 이로움이 있을지를 묻다가 되려 '인의仁義'를 논해야한다고 혼쭐이 난다. 또한 맹자의 날카로움에 놀란 양혜왕이 편안하게 가르침을 듣고 싶다고 말하자 맹자는 사람을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하며 더 치열하게 파고든다. 한 나라의 왕을 알현하며 이렇게 행동하는 게 사형이나 거열형 등의 중형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맹자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에 길이남을 인물이 되는 시단이 된다. 이 같은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결코 언어로 함부로 형언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순간 순간에 투철한 이만이 해낼 수 있는 무엇이다.


성철 스님(1912~1993)은 그렇게 대단한 다독가多讀家이시면서도 제자들에겐 책을 읽지 말라고도 하셨다 한다. 이 일화를 통해 책 읽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해선 안된다. 오히려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책 속의 언어가 기실 언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꿰뚫어내야 한다. 언어라는 건 매우 유용한 소통 수단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정이나 몸짓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지만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상호 약속을 통해 구성한 언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다. 사태를 규정짓거나 적확히 묘사하는 진실한 수단이 아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선 책을 부지런히 읽어 언어의 모순을 직접 체감해내야만 한다. 그러면 세상에 흐르는 수많은 기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기만을 알아차리면 정신을 속박하던 언어의 망령을 퇴척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진정으로 공부하는 체제나 문화를 우리는 가지고 있을까? 독서를 통한 사유의 해방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고정된 표준만을 강요하는 문제풀이에 모든 학생을 몰두시킨다. '가장 적절한' 보기를 고르도록 하여 정확한 정답이 없더라도 알아서 출제자의 비위에 맞게 사고하는 인재로 성장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독서는 오히려 해롭다. 괜한 번민만을 야기하고 어깃장을 놓는 우매한 둔재로 여겨진다. 그러한 이들을 창의성이니 뭐니하며 장려하는 척하지만 막상 교육 체제와 보상 방식은 동일하니 기만하며 조롱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좀처럼 개인에게만 맡겨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사회 불행이다. 그렇기에 다음 번에는 교육 문제를 통해 불행에 치닫은 한국 사회를 살펴보 글을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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