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이직 속에 숨겨진 계단식 성장의 비밀
여러분은 이력서를 볼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보시나요? 저는 보통 회사 이름을 먼저 봅니다. 최근에 만난 분의 이력서에 적혀 있는 회사 이름이 정말 화려했어요. 카카O, 컬O, 우아한OOO, 비바OOOOO. IT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곳들이죠.
그런데 재직 기간을 보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2년을 채운 곳이 없었어요. 평균 1년 6개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채용 시장에서 이런 패턴은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잦은 이직, 안정성 부족 같은 단어들이 자동으로 따라붙죠.
실제로 만난 주인공도 왠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냥 퍼블리셔예요."라고 계속 강조하시더라고요. 마치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은 것처럼요.
혹시 어린 코끼리 이야기 아시나요? 어릴 때 말뚝에 묶여 지낸 코끼리는 어른이 되어 말뚝을 뽑을 힘이 생겨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분도 그런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걸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력서를 천천히, 꼼꼼히 읽으면서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한마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경력은 사실 별거 없어요. 이직은 잦았고, 대부분 단순 퍼블리싱이나 유지보수 작업이었거든요. React를 하긴 했지만, 그냥 UI만 겨우 만지는 정도라..."
먼저 경력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볼게요.
- 2010 - 2014 | OO대학교 컴퓨터공학과
- 2015 - 2017 | 카카O
- 2017 - 2019 | 컬O
- 2020 - 2022 | 이OO
- 2022 - 2023 | 우아한OOO
- 2023 - 재직 중 | 비바OOOOO
겉으로 보면 그냥 짧은 재직 기간들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이 점들을 선으로 이어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이야기 : 말뚝을 뽑아낸 사람
2020년 이전까지, 이 분의 주력 기술은 HTML, CSS, jQuery였습니다. 전형적인 웹 퍼블리셔의 기술 스택이죠. 주로 마크업과 스타일링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부터 상황이 완전히 바뀝니다.
React, TypeScript. 완전히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것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이 선택한 이직이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핵심 프로젝트를 맡습니다. 기존의 레거시 시스템을 React로 리팩토링하는 작업이었죠.
개발자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건 단순한 업무가 아닙니다. 레거시 시스템을 완전히 새로운 기술로 옮기는 건, 집을 리모델링하는 게 아니라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해요. 기존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새로운 설계를 하고, 하나하나 옮겨 심어야 하니까요.
"저는 퍼블리셔예요"라고 말씀하셨던 분. 하지만 이력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이미 그 말뚝을 뽑았어요. 그런데 본인만 그걸 몰랐던 겁니다.
두 번째 이야기 : 패턴을 찾아보세요
이직 경로를 한 번 자세히 봐주세요.
카카O(포털) → 컬O(이커머스)포털 서비스에서 쇼핑몰로 이동했습니다. 같은 퍼블리싱 기술이지만, 훨씬 복잡한 사용자 여정과 구매 전환율을 고민해야 하는 도메인으로 옮긴 거예요.
이OO(jQuery) → 우아한OOO(React)
이커머스는 그대로 유지합니다. 대신 기술 스택을 완전히 바꿨어요. jQuery에서 React/TypeScript로 대대적인 점프를 한 거죠.
우아한OOO(B2C) → 비바OOOOO(B2B)
이번엔 React를 그대로 가져갑니다. 하지만 도메인을 바꿨어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에서 기업용 툴로 이동한 겁니다.
패턴이 보이시나요?
하나의 기술 스택이 익숙해지면 → 새로운 도메인으로
하나의 도메인이 익숙해지면 → 새로운 기술 스택으로
이건 잦은 이직이 아닙니다. 이건 성장을 위한 전략적 이동이에요. 마치 계단을 오르듯이 한 발은 안정적으로 디디고 다른 한 발은 새로운 곳으로 뻗는 거죠.
세 번째 이야기 : 변하지 않는 것
흥미로운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기술 스택도 바뀌고, 산업도 바뀌었는데 변하지 않은 게 있어요.
이 분의 이력서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퍼블리셔"
보통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말이죠. 하지만 경력을 쭉 읽어보면, 이게 단순한 소개 문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프로젝트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용자가 더 편하게, 더 빠르게 쓸 수 있게.'
기술은 수단이었어요. 목적은 언제나 사용자 경험이었습니다. jQuery를 쓰든 React를 쓰든, 이 축은 흔들리지 않았죠.
첫인상 : 잦은 이직 이력과 소극적 태도를 가진 퍼블리셔
실제 : 명확한 성장 전략을 갖고 실행한 프론트엔드 개발자
이력서는 때때로 거짓말을 합니다. 정확히는 절반의 진실만 보여주죠. 숫자로 표시된 재직 기간은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만 말해줍니다. 왜 떠났는가, 무엇을 얻었는가는 말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력서를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요.
평균 재직 기간 약 1년 6개월. 채용 담당자라면 누구나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전략적 이동이었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장은 냉정하거든요. 안정성은 여전히 중요한 평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해요.
이미 기술적 성장은 증명했습니다. jQuery에서 React까지, 퍼블리셔에서 프론트엔드 개발자까지의 여정은 충분히 인상적이에요.
어른이 된 코끼리가 말뚝을 뽑는 것이 1단계였다면, 이제는 그 말뚝이 있던 자리를 떠나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걸어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2단계가 남았습니다.
이제 필요한 건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한 곳에서 2~3년 이상 머물면서 단순히 코드를 작성하는 것을 넘어 팀을 리드하고, 시스템을 설계하는 경험을 쌓는 거죠.
그게 이 분의 커리어 서사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될 겁니다.
그의 한마디 :
"제 커리어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보여주는 방법을 이제야 알게 된 거 같아서 기쁩니다."
마치며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성장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한 곳에서 10년을 머물며 깊이를 팝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곳을 옮기며 폭을 넓힙니다. 둘 다 성장입니다. 방식이 다를 뿐이에요.
중요한 건 그 이동에 의도가 있느냐는 겁니다. 도망치듯 떠나는 이직과 다음 단계를 향해 뛰어오르는 이직은 겉보기엔 똑같아 보여도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력서를 읽는 능력은 결국 그 의도를 읽어내는 능력이에요. 그리고 제가 읽은 이 이력서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도로 움직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