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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Feb 26. 2024

나폴리의 마지막 태양

Nomad in Roma (10)

나는 라파엘레 루바티노 씨(Raffaele Rubattino)와 함께 지중해에 떠 있다. 나폴리를 떠난 지도 어느덧 두 시간. 그러나 목적지인 팔레르모까지는 아직도 여덟 시간을 더 가야한다.


아마 수백의 페리 탑승객 중 한국인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아직 동양인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혹여 한국인과 마주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거나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행운이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까.


안내방송에서 로밍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루바티노 씨가 드디어 이탈리아를 벗어난 모양이다. 심(sim)은 일찌감치 작동하기를 그만두었다. 무료로 제공된다는 루바티노 씨의 와이파이도 먹통이다. 이럴 때를 위해 아껴두었던 소설을 꺼낸다. 언제나 그렇듯 남자와 여자의 우연한 만남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책과 함께, 나는 금세 70년대 로마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사실 오늘은 기억에 남을만한 날이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낮에는 내가 여성들에게 말을 걸었고, 저녁에는 한 여성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서울과 몬테비데오만큼이나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이 하루 새 벌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침의 나는 한동안 얼이 나가 있었다. 오늘 밤 묵을 호텔과 야간 페리를 겹쳐 예약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천사의 심장을 가진 팔레르모 호텔 직원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정말이지 친절하게도 그가 나의 예약을 하루 미뤄준 덕분에 나는 어느 것도 취소하지 않고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페리가 출발하는 저녁 8시까지 무얼 할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체크아웃 시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냈음에도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수행이 아니라 여행을 하는 거라고 자위하며 호텔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코르소 움베르토의 온 도로를 러너들이 점령한 것이다. 알고 보니 오늘은 나폴리에서 하프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란다. 불과 몇 시간 전 늦은 새벽까지도 숙면을 방해하던 자동차 경적과 소음이 -그저 아침이 되었을 뿐인데- 응원과 격려의 함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사이 바뀐 건 하나가 더 있었다. 날씨다. 줄곧 비가 내리고 흐리던 나폴리 하늘이 마침내 태양을 수복한 것이다. 지중해의 항구 도시에 걸맞은 빛깔을 되찾은 나폴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나는 골목의 아무 카페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계획 없는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여전히 눈이 부시게 따사로운 오후였다. 루바티노 씨의 얼굴도 확인할 겸 항구에 가본 나는 좋아 보이는 자리에서 햇살을 만끽하는 이들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일본인 여자 세 명, 카드 게임을 벌이는 두 소년과 노년의 부부, 낮잠에 빠진 청년이 저마다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지려는지 나를 위한 자리도 하나 남아 있었다.


그렇게 30분쯤 앉아 있는데 문득, 행복하지만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날씨는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나는 평소답지 않은 일을 고안했는데, 그건 바로 일본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고교 시절 제2 외국어로 공부한 일본어와 그보다 조금 나은 영어를 스프리츠처럼 섞으면, 적어도 10분은 씁쓸한 무료를 달랠 수 있으리라. 일본인들은 마침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국가의 대표로서 신사답게 예의를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쿄에서 온, 카오루와 친구들, 모두 대학생이며 전공은 각기 다른 예술, 나폴리와 밀라노에서 일주일씩 머물 예정, 오늘 특별한 계획은 없으며, 그저 치루(chill)한 시간을 보내는 중.


한국에서 온, 교육학을 전공한, 사카를 좋아하는 사카(일본어에서 축구와 작가는 비슷하게 발음된다.)와 그녀들의 대화는 예상보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어떠한 기약이나 아쉬움 없이 ‘치루’하게 마무리되었다. 날이 갑자기 추워지면서, 먼저랄 것 없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어서, 길을 나선 것이다. 우리가 떠난 자리에는 여전히 카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소년들만 남게 되었다. 태양도 남아 있는 힘을 쏟으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루바티노 씨의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시작된다. 나는 갑판에서 나폴리의 야경에 심취해있었고, 우측으로 60피트 떨어진 곳에서는 한 여성이 계속 전화기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것이 여행을 떠나온 소설가의 행동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잠시 후 꼬리를 들어 올린 루바티노 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의 동시에 어딘가 숨어 있던 갈매기 수십 마리가 파문처럼 하얗게 흩어졌다.


“새들이 정말 아름답게 흩어지네요. 그렇지 않나요?” 여자가 내게 말을 건넨다.


“그렇네요. 정말 그래요.” 내가 대답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그녀의 물음으로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모니카, 인도 출신이지만 현재는 미국에서 건강관리연구원으로 일하는 중, 조금 전에는 녹음이 아닌 전화를 하고 있었고, 시칠리아에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길.


그리고 그녀는 멀리, 보름달 아래 솟아 있는 두 개의 산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영어가 너무 속도를 내는 바람에 나는 그중 더 크고 높은 오른쪽이 베수비오라는 것만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갑판의 대화도 치루하게 마무리되었다. 곧 갑판의 모든 조명이 꺼졌고, 루바티노 씨가 바다에서 빌려온 바람이 우리의 체온을 뺏어갔기 때문이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보름달과 오리온자리만이 선명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몫의 자리로 돌아온 나는 모든 짐이 그대로인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시칠리아에 닿기까지는 아직 하룻밤이 남아 있고, 새벽이 찾아오면 이 여행은 반환점을 돌 것이다.


아직 잠이 오지는 않으므로, 책을 꺼내 읽기로 한다. 오렌지색 표지가 객실의 어둠 속에서 빛난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라 이름 붙여진 이 소설을 나는 여행 내내 아껴두었다. 그리고 작가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에서, 마침내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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