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소의 남자
활자의 냄새는 늘 밤공기보다 진했다.
잉크가 마르기 전의 검은 윤기, 낡은 종이가 내뿜는 먼지.
민수는 그 냄새 속에서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이제 신문사도, 명함도 없지만 여전히 그는 ‘기자’였다.
다만 그의 글은 세상에 나가지 못할 뿐이었다.
작은 인쇄소, 지하의 습한 공간에 달랑 형광등 두 개.
기계는 오래된 철제 몸통을 달고, 틀린 글자를 찍을 때마다 징 소리가 났다.
벽 한쪽엔 찢어진 포스터가 반쯤 붙어 있었다.
‘자유언론, 국민의 눈.’
누군가의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
민수는 활자를 정렬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자유, 자유라…
그래서 자유는 지금 어디쯤에 있나.”
그의 목소리는 금속처럼 건조했다.
활자판 위로 담배 연기가 내려앉았다.
그는 밤마다 검열된 신문을 떠올렸다.
‘삭제’ 표시가 칠해진 문단들,
기사보다 긴 붉은 펜 자국.
그곳엔 죽은 이름들이 있었다.
“그때 그 아이 이름이라도 남겼어야 했는데…”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기억 속의 ‘그 아이’는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죽은 대학생이었다.
그 사건을 기사로 썼던 그는,
그 일로 모든 걸 잃었다.
문득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세요?”
낯선 목소리였다.
민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여자는 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공장에서 막 나온 듯, 옷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손등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피곤과 결심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혹시… 기자 맞으시죠?”
민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질문을 한 사람이 오랜만이었다.
“기자였죠. 지금은 그냥 인쇄공입니다.”
“그래도 글을 쓰실 줄 아시잖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민수는 담배를 끄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공장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기사도, 기록도 없어요.”
그녀는 낡은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근무일지와 임금체불 명세서, 납품 기록이 들어 있었다.
모두 손으로 쓴 것들이었다.
민수는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잉크 자국이 번져 있었지만, 숫자와 날짜는 또렷했다.
“당신 이름은?”
“정연이에요.”
민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문득 오래전 만났던 ‘그 아이’를 떠올렸다.
목숨을 걸고 팸플릿을 돌리던 대학생.
그때처럼, 눈빛 하나가 진심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걸 기사로 써달라는 건가요?”
“누군가는 써야 하잖아요.”
“이건 신문에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기록해 주세요.
우린 말할 수 없으니까.”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묘하게 강했다.
민수는 잠시 침묵했다가 노트를 닫았다.
“좋아요. 대신 내 이름은 안 나가요.”
“상관없어요. 진실이 나가면 돼요.”
그는 웃었다.
짧고 씁쓸한 웃음이었다.
“진실이라… 그게 요즘엔 제일 비싼 물건이죠.”
그녀가 떠난 뒤, 민수는 자리에 앉아 원고지를 펼쳤다.
활자 틀 위에 잉크를 붓고, 손끝으로 첫 글자를 눌렀다.
“청계천, 재봉틀 아래서 사람이 죽어간다.”
글자가 찍히자 기계가 철컥 소리를 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한 문장이 세상으로 나가는 데 얼마나 많은 벽이 있는지 알았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낡은 천장이 ‘뚝, 뚝’ 소리를 냈다.
민수는 낡은 재떨이에 담배를 하나 꽂으며 말했다.
“이건 그 아이의 기사이기도 하지.”
그는 원고지를 한 장 더 꺼냈다.
새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잔뜩 번진 글자를 다시 새겨 넣듯 썼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누군가는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철판이 부딪히는 소리와 잉크가 흐르는 소리가 밤을 채웠다.
그 소리는 마치 먼지 속을 헤집고 나오는 심장의 고동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