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사
인쇄소의 새벽은 비밀을 품은 창고처럼 눅눅했다.
민수는 활자판을 닦다 말고 손을 멈추었다. 천에 까맣게 번진 잉크가 한 줄의 강처럼 길게 늘어졌다. 철제 작업대 모서리에 놓인 라디오가 잔기침을 하듯 지지직거렸다. 주파수를 바꾸자 멀리서 음악이 걸려들었다가, 다시 소음 속에 가라앉았다. 그는 라디오를 끄고 형광등 아래로 몸을 당겼다.
원고지 맨 위에 날짜를 썼다.
1986년 11월 28일, 청계천.
그 아래 첫 문장을 다시 눌러 적었다.
청계천, 재봉틀 아래서 사람이 죽어간다.
문장은 이미 전날 밤 한 번 완성했지만, 그는 문장 끝의 온점을 조금 더 눌러 채웠다. 마치 종이 속으로 구멍을 뚫어 그 문장을 고정시키려는 듯이. 활자 서랍을 열자 사람, 죽음, 공장, 납품 같은 단어들이 불규칙한 모양으로 굴러다녔다. 단어들은 이미 결정된 운명을 가진 쇳조각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형, 커피.”
조수 동철이 종이컵을 두 개 들고 내려왔다. 계단목이 삐걱거렸다.
“손, 떨리잖아. 잉크 튀겠네.”
“오늘은 원고가 무겁다.” 민수가 종이컵을 받아 들며 말했다.
“무거운 원고가 세상을 움직이는 거라면서요.”
민수는 웃지 않았다. “세상을 먼저 움직이는 건 늘, 사람의 다리야.”
벽시계는 새벽 다섯 시 오 분을 가리켰다. 인쇄기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민수는 기사 중간에 넣을 표를 그렸다. 공장의 교대근무 시간, 납품 마감일, 휴게시간—휴게시간 칸 빈칸 옆에 작은 별표를 달고 각주를 넣었다. ‘휴게시간은 있으나 실제로는 재봉틀을 끄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
종이 위에 남의 피 같은 잉크가 더해질수록, 문장은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안다. 선명하다는 건 곧 눈에 띈다는 뜻이고, 눈에 띈다는 건 지워진다는 뜻이다. 지워지면? 그는 다시 새길 것이다.
위층 창문에서 발자국 소리가 멈칫했다. 누군가 계단 난간 너머로 인쇄소 안을 훔쳐보는 기척. 민수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동철도 말없이 라디오 다이얼을 만지작거렸다. 창 너머로 희뿌연 새벽빛이 내려앉았고, 먼지 입자들이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형.”
“응.”
“어제 그 여자분—정연 씨. 오늘 다시 온대요?”
“밤.”
“그럼 그때…”
민수는 머리를 저었다. “여기 말고.”
그는 원고 묶음을 한 번 더 훑고 사본 두 벌을 만들었다. 하나는 봉투에 넣어 인쇄소 바닥칸에 숨기고, 하나는 코트 안쪽 포켓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남은 한 벌은 바인더에 꽂아 두었다. 잃고, 빼앗기고, 도망치고—이 모든 경우의 수를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문득 벽이 작게 울렸다. 벽 뒤, 골목.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인지, 발자국 소리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인쇄소 문턱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민수는 동철을 보며 눈짓했다. 동철이 조용히 문빗장을 한 번 더 내렸다.
아침이 늦게 밝았다.
정연은 공장 안으로 들어서며 차가운 형광등 불빛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손등의 작은 상처들이 어제보다 더 짙어 보였다. 오늘 작업표에는 ‘납품 마감(긴급)’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장은 종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제 일은 없던 일이다. 알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순이는 괜찮다. 다친 건 다친 거고, 일은 일이다.”
정연은 재단칼을 들었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 칼날이 천 위에서 낮은 소리를 냈다. 옆에서 순덕이 그녀의 손놀림을 따라 보다가, 바늘을 끼운 재봉틀을 천천히 돌렸다. 어제와 똑같은 동작, 어제와 다르게 체온이 달랐다. 공장의 공기는 묵직한 무게를 더했다.
“언니.”
“응.”
“어제, 다리에서 했던 말… 사람 먼저라는 말. 사장님도 알아들었을까요?”
정연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럼 계속 말해야겠다.”
정연은 칼을 내려놓고 잠깐 순덕을 보았다. “계속 말하면, 누군가는 듣지.”
점심시간 직전, 공장 문이 쾅하고 열렸다.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하나는 공장장과 안면이 있는 듯 말없이 인사를 하고 사무실 쪽으로 들어갔다. 다른 하나는 작업장을 한 바퀴 천천히 훑었다. 눈길이 사람의 얼굴보다 작업대, 게시판, 출입문 자물쇠에 오래 머물렀다. 정연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칼끝은 조금 느려졌다.
사내들이 나가자 공장 안에 조용한 웅성거림이 퍼졌다. 누군가가 “노무사?” 하고 속삭였고,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다” 했다. 정연은 창가로 가서 먼지 묻은 유리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바깥 골목에 검은 코트가 비처럼 흘렀다.
해가 기울 때까지 민수는 인쇄소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원고는 세 번째 교정을 마쳤고, 각 문단의 첫 문장은 더 짧아졌다. 그는 일부러 그렇게 썼다. 눈에 밟히는 문장, 쉽게 복사되는 문장. 빨리 읽히고, 오래 남는 문장.
오늘 오전 10시,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여공 한 명이 쓰러졌다.
공장장은 납품 마감을 이유로 기계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휴게시간은 종이 위에만 존재했다.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의 시간이 돌아가고 있다.
문장 사이에 공장의 소음이 들리는 듯했다. 민수는 펜을 놓고 눈을 감았다. 오래전 신문사 편집국의 냄새가 잠깐 스쳤다. 커피, 담배, 인화지, 서류철. 그는 어쩌다 그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아니면 그 모든 냄새가 자신에게서도 지워질까.
“형, 이거 보고 가요.”
동철이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사회면 하단에 작은 기사—‘불온 전단 유포 엄단 방침.’ 검은 활자와 함께 명확한 문장. ‘익명 유포자를 색출, 처벌.’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익명이 아니게 하면 되지.”
“네?”
“기록에는 이름이 필요해. 사라지지 않도록.”
“형 이름 말고요.”
“당연하지.”
그가 코트를 걸치자 동철이 물었다. “어디로?”
“습기가 덜한 데.”
“바깥은 다 습해요.”
민수가 웃었다. “그래서 밤엔 다리 밑이 환해.”
저녁, 청계천 다리 아래.
빛이 물결에 부서졌다. 가로등 불빛이 강 위로 길게 미끄러져, 바닥의 돌과 시멘트 틈에서 반짝거렸다. 다리 기둥엔 오래된 벽보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앙상한 손톱으로 긁어내듯, 새로 붙은 종이 위로 또 다른 종이가 덧입혀진 흔적. 가까운 노점에서 삶은 달걀 냄새와 라면 수프 냄새가 섞여 불어왔다.
정연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코트를 여며 쥐고, 다리 기둥 뒤쪽에 서 있었다. 민수가 다가오자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그의 손에 시선을 떨궜다.
“원고.”
민수가 짧게 말했다. 봉투를 꺼내 건네려다, 잠시 멈추었다.
“여기 말고, 조금 더 어두운 데로.”
둘은 기둥 그림자 속으로 이동했다.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정연의 손목뼈가 얇게 드러나 있었다. 민수는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은 사본 하나를 먼저 건넸다.
“이건 네가 보관해. 누군가는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해.”
“전부… 다 쓰셨어요?”
“다 못 썼지. 살아 있는 건 다 못 써.”
정연은 봉투를 받아 코트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 순간, 다리 위를 지나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차창 뒤로, 누군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아니,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우연이기를. 다리 위 바람이 한 번 크게 지나갔다.
“외신 쪽에 넘깁니다.”
“어떻게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은 종이보다 오래 남아.”
정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가 하죠.”
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공장에 있어. 당신이 거기 있는 게 기록이야.”
말끝이 떨어질 때 다리 밑 통로 쪽에서 낮고 일정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구둣발이 물기 어린 콘크리트를 밟는 소리, 조심스러운 호흡, 끊어지지 않는 리듬. 민수는 정연의 팔을 살짝 잡아 기둥 뒤로 더 깊이 물러났다. 발자국 소리는 기둥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른 방향으로 꺾였다. 어둠 속, 불빛 하나가 조심 깊게 꺼졌다.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움직임.
“오늘은 여기까지.”
민수가 먼저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내일,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정연은 작게 웃었다. “하늘은 늘 같은데요.”
“그게 좋아.”
그는 짧게 손을 흔들고 다리 밖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정연은 반대편 계단을 올라갔다. 서로 다른 방향, 같은 중심. 물소리가 둘 사이에 남았다.
그 시각, 도로 맞은편 차 안.
형사 한진은 라디오 볼륨을 낮추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42분. 차창에 맺힌 물방울 사이로 다리 밑 그림자 두 개가 번졌다. 누군가 봉투를 주고받는 듯한 실루엣. 그는 엔진을 끄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복대 속 수첩을 꺼내 펜으로 적었다.
다리 하부 통로, 교신 정황. 남 1, 여 1.
봉투 이동. 추적 필요.
— ‘민수’ 가능성 높음. 여: 공장 근로자?
그는 펜 끝을 잠깐 물었다.
접촉 즉시 제지?— 보류. 증거 미확보.
관찰 지속.
한진은 시동을 걸지 않았다. 대신 라디오를 아주 작게 올렸다. “오늘 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DJ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다리 그림자를 다시 훑었다. 직감이 말해주었다. 지금 건드리면 부서진다. 부서지면 사라진다. 사라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차문 두드리는 소리에 한진은 몸을 일으켰다. 후배 순경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경위님, 바로 들어가죠?”
“아니다.”
“근거 충분한데요. 유포 정황 확인.”
“정황은 정황일 뿐이야. 오늘은—흔적만.”
“흔적이 쌓이면 증거가 됩니다.”
한진이 순경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어떤 흔적은, 증거가 되기 전에 진실이 되기도 한다.”
순경은 말을 잃었다. 한진은 수첩을 닫고 창문을 조금 내렸다. 바깥공기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잉크, 물, 가로등. 감시의 온도가 잠시 내려갔다.
이튿날, 인쇄소 출근길.
민수는 골목 어귀의 전봇대 아래에서 신문을 사는 척하며 주위를 훑었다. 구둣발 소리, 담배 냄새, 오래된 코트 깃.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은 눈. 감시라는 것은 늘 시간을 먹고 자란다. 그는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느린 사람은 덜 의심스럽다. 느린 문장은 더 오래 산다.
인쇄소 문을 열자, 바닥에 담뱃재 한 줄이 얇게 뉘어 있었다. 어젯밤 없던 흔적. 누군가 문틈으로 떨어뜨리고 간 것일까, 아니면 바람이 밀어 넣은 것일까. 민수는 재를 쓸어 모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왔었군.”
그는 원고 사본 위치를 확인했다. 바닥칸 봉투—그대로. 코트 안쪽 포켓—비어 있다. 가슴이 덜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웃음 같은 한숨이 나왔다. 다리에서 건넸지. 사람과 종이 사이에서 기억은 종종 의도적으로 사라진다.
작업대 위에 새 원고지를 펴고, 그는 마지막 문단을 썼다.
이 글은 누가 썼는가.
이름이 없다면, 오래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신 남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빈칸을 남겼다.
작성자: □□□.
빈칸은 컸다. 빈칸은 책임이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 칸에 자기 이름을 쓸 것이다. 혹은, 아무도 쓰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기록은 움직인다.
문이 두 번 노크됐다. 규칙적인 간격. 민수는 문 앞에서 웃었다. “너냐.”
문이 열리고 동철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예요. 바깥에, 그 코트 또 있어요.”
“알아.”
“어떡하죠?”
“어제처럼.”
“어제처럼 이 뭔데요.”
“살아.”
민수는 활자틀을 들어 인쇄기에 끼웠다. 철판이 물렸고, 기계가 낮은 숨을 뱉었다. 잉크가 롤러 위로 번져가며 글자를 적셨다. 첫 장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들어 올려 형광등 아래로 비추었다. 글자는 젖어 있었지만 또렷했다. 종이를 좌우로 흔들며 잉크를 말렸다. 그 짧은 시간, 기계는 노래를 불렀다. 먼지의 노래. 지워지기 위한 글자의 노래. 그는 그 소리를 사랑했다.
정연은 낮 동안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끔 창밖을 보는 습관을 지웠다. 대신 손의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빨라진 손은 두려움을 숨기는 법이다. 사장은 오후에 외부 전화를 길게 했다. 수화기 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낮고 길었다. 사장은 “아, 예. 예.”만 반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의 눈은 잠깐 정연을 지나쳤다.
쉬는 시간, 순덕이 물었다. “언니, 어제… 갔죠?”
정연은 물을 마셨다. 컵 안의 물이 손끝의 떨림을 따라 잔잔히 출렁였다.
“응.”
“무서웠어요?”
“무서웠지.”
“그런데 왜…”
정연이 고개를 돌렸다. 순덕의 눈동자가 또렷했다.
“무서운 걸 안다고 멈추면, 그건 결국 무서움이 이기는 거잖아.”
순덕은 그 말을 조용히 삼켰다. 그녀의 목구멍이 작게 움직였다. 어른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진행된다. 다만 그 조용함의 안쪽은 늘 격렬하다.
오후 늦게, 공장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다른 얼굴이었다. 신사복 차림, 말수가 적고, 신발 앞코에 물기가 말라 흰 자국이 남아 있는 사람. 그는 작업장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고,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기계 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공기 자체가 누군가의 이름을 외우는 것처럼.
정연은 작업대를 정리하며 가방 속 봉투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얇은 종이의 감촉이 손바닥을 눌렀다. 살아 있는 감촉. 그녀는 봉투를 조금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오늘 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물소리. 그리고 다른 선택.
밤, 인쇄소.
민수는 봉투를 다시 하나 만들었다. 어제와 같은 내용, 어제와 다른 순서. 교차 검열을 염두에 둔 배열. 문장 중 몇 줄은 일부러 오탈자를 심었다. 고쳐 쓰는 자가 글을 끝까지 읽도록. 함정을 판다는 건 결국 독자를 믿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문간에 그림자가 걸렸다. 두들기는 소리 대신, 아주 잠깐의 정적. 민수는 문까지 세 걸음 남기고 멈췄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물었다.
“누구.”
“바람.”
그는 웃었다. 약속된 신호 따위는 없이, 밤마다 바람은 늘 같은 이름으로 왔다. 그는 문을 열었다. 형사도 아니고, 동철도 아니었다. 낯선 남자. 눈빛이 얕고, 미소가 빨랐다.
“전단, 찍어주시죠. 급합니다.”
민수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힐끗 봤다. 납품가 인하 반대, 임금 삭감 반대. 문장은 거칠었고, 구호는 단선적이었다.
“급하면 더 천천히 해야지.”
“돈은 충분히.”
“돈은 원고를 가볍게 만들어.”
남자의 미소가 조금 굳었다. “시간 없습니다.”
민수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래서요, 오늘은 아닙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의 그림자가 아주 짧게 끼어들었다가 사라졌다. 민수는 잠금쇠를 내리며 속으로 계산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시험하는가.
그는 봉투를 들고 불을 껐다. 한 줄의 빛이 바닥에 누웠다가 꺼졌다. 어둠이 인쇄소 전체를 덮었다. 문밖으로 나서며,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사람의 등을 기억하는 것은 늘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
다리 위, 가로등.
정연이 먼저 서 있었다. 바람이 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물소리가 어제보다 깊었다. 민수가 다가왔다. 서로의 얼굴을 잠깐 확인하는 일은 신뢰의 의식 같았다. 그는 봉투를 내밀지 않았다. 대신 얇은 노트를 꺼내 펼쳐 보였다.
“어떤 문장들은 너한테 먼저 읽혀야 해.”
정연은 한 줄, 한 줄 소리 내어 읽었다.
“휴게시간은 종이 위에만 존재했다.”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의 시간이 돌아가고 있다.”
읽는 동안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날들이 글자가 되어 돌아오는 순간의 진동이었다.
“좋아요.”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다른 길로 가.”
“내가—”
“아니.”
그는 다리 난간 너머 골목을 가리켰다. “사람이 와.”
정연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림자 하나가 어둠에서 분리되어 나타났다. 검은 코트, 일정한 걸음, 멈추지 않는 눈. 정연은 본능적으로 봉투를 코트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물소리가 커졌다. 혹은 심장 소리가 물소리를 덮었을지도.
“가.” 민수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각자.”
정연은 계단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빠른 발걸음은 눈에 띈다. 눈에 띄면 지워진다. 그녀는 계단 첫 단을 밟으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민수는 난간에 팔꿈치를 걸치고 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다 멈췄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일도 없이. 바람이 스쳐 가고, 가로등 불빛이 한 번 깜박였다. 둘 사이에 문장 하나가 지나갔다. 읽히지 않은 문장. 읽히지 않았으므로, 아직 지워지지 않은 문장.
그 밤, 지워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