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에서도 솔직한 이야기를 써내리긴 했으나 좀 더 정리된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회고 글 쓴다.
24살 지금까지 그려본 인생 그래프는 아래와 같다.
조용한 것이 습관이 되어 편안했다가 첫 대외활동에서 깨지고, 점점 익숙해져 나아졌다가 진로를 찾아가고 있다.
자아를 찾게 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난 말이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입을 닫고 생활했다. 초등학생 때는 묵언수행을 하기로 결심했던 때다. 당시 좁은 마음에 동네 친구한테 삐졌던 것에 기인했다. 나는 의사표현을 말대신 몸짓으로 했고, 국어 수업시간에 내가 호명되어 지문을 읽는 상황에서는 반 애들이 내 목소리를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중학생 때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내가 학교에서 하는 말은 ‘네’, ‘응’,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밖에 없었다. 반 애들과의 인사에서는 ‘안녕’이란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아 낮은 손인사로 대체하기 일쑤였다. 언제는 생일 축하를 받았으나 고맙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아, 축하해준 애들이 오늘이 내 생일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도 전보다는 낫지만 나는 여전히 조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다른 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먼저 말을 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친해지려는 노력조차 안 했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조차 못했다. 내가 말을 안 했기 때문에 내게 먼저 다가와준 이들과의 관계 또한 더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사람과의 관계가 모두 끊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진 연은 나와 가족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지난 날의 행실을 깨닫고 후회를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와준 고마운 학우들에게 무안함을 안겨준 것에 미안했다.
코로나가 풀린 대학생 2학년 때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해서 말을 걸어 봤다. 그 이후로 대외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조금은 익숙해졌고 지금도 적응해가고 있다.
아래는 대학생 1학년 때 새벽에 썼던 글이다. 구성은 가볍지만 내용은 여전하다.
방과후에 집에 와서는 숙제를 하고 썬더일레븐과 명탐정 코난을 봤다. 썬더일레븐은 축구 팀의 성장 이야기인데 정말 재밌게 봤다. 슛 필살기 중 하나인 이터널 블리자드는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명탐정 코난을 볼 때면 괜히 무서워서 아무도 없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봤다.
토요일에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게임을 너무 하고 싶었던 나머지 새벽 4-5시에 저절로 잠이 깼다. 그러고는 물도 안 마시고 작은방으로 가서 자고있는 아빠한테 은연중에 허락맡고 컴퓨터를 켰었다. 아빠는 내가 새벽부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쥐소리인 줄 알았다고 했다. 지금은 게임보다 잠이 더 중요하지만 이때는 게임할 수 있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밖에 없었기에 더욱이 게임에 미쳤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등학생 3학년 수능본 날 이후로 컴퓨터 게임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때나 하고싶은 때 다 하기에 게임을 거의 안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토요일 밥먹는 시간 빼고 하루에 16시간 했었는데 말이다.
토요일 낮에는 엄마 따라 성당을 갔다. 유치원이 성당유치원이어서 엉겁결에 세례명도 받았지만 사실 종교를 믿진 않았다. 새벽부터 게임하느라 피곤했는지 성당 가서는 기도하다가 항상 잤었다.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안 자려고 노력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미사 중간에 떡 먹는 시간이 있는데 속으로 제발 그 시간이 되기를 빌었다. 왜냐면 그때 유일하게 한 자리에서 벗어나 걸어다닐 수 있는데 걸어다니면 잠이 깨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잠들어서 항상 깨어나보면 누가 날 깨우고 있었고 미사는 끝난 뒤였다. 안 자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미사가 끝나면 성당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는데 맨날 자다가 밥만 먹고 가는 게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었다.
게임하며 욕을 배웠는데 초등학생 3학년 때 담임선생님한테 호되게 혼난 이후로 입에서 욕 나오는 일은 없어졌다. 학교에선 조용한데 집에서 욕한다고 엄마가 얘기해준 걸 듣고 담임선생님이 크게 노하셨다.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살면서 본 인간의 모습 중 가장 분노한 것을 봤어서 기억에 남는다. 반 얘들 모두 보는 앞에서 울면서 혼나서 나도 좀 악몽이었다.
게임은 크아와 에버플래닛을 주로 했었다. 네이버 블로그는 애버플래닛을 하면서 시작했었다. 게임하며 스크린샷 찍어둔 거에다 내용을 더해 포스팅을 작성하는 식이었다. 당시 셧다운제 때문에 오전 6시까지 게임 접속을 못했기에 새벽에 기다리며 포스팅을 작성했었다. 이러다 보니 에버플래닛 커뮤니티에서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적도 있었다.
현실 친구는 없었지만 게임 친구가 있었다. 게임에서는 언니 나이로 속이고 캐릭터가 남자라서 성별도 남자라고 소개했다. 나이와 성별을 속인 게 떳떳하지 않았기에 흑역사라고 생각해서 블로그를 한 번 초기화했었다. 게임할 때의 추억이 날라간 게 후회되는 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래는 게임을 추억하며 그렸던 그림이다. 지금은 서비스종료 됐다.
공부는 평균 이상은 했었다. 중고등학생 때 반에서 3등 안에 들었고 고등학생 3학년 때는 전교 7등이었다. 딱히 꿈도 없고 공부에 욕심도 없었어서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학원에서 주어진 숙제만 열심히 해오는 식이었다. 학교에선 쉬는시간이면 학원 숙제하거나 책을 읽었고 점심시간이면 도서관 가서 추리소설과 만화책을 봤었다. 숙제하거나 책 읽는 걸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그냥 심심해서 할 일을 찾다보니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그거였다.
장래희망을 적으라 할 때는 좋은 영향을 주고 멋있어보이는 걸 적었다. 그게 소방관, 작곡가, 마술사였다. 각각 유치원, 초등학생, 중학생 때의 장래희망이었다. 노력을 하긴 했었던 것 같다. 등하교 때 멜로디랑 가사를 생각하면서 발걸음으로 리듬 타며 걸어다녔고 중학생 때는 학원에서 받은 문화상품권으로 카드 덱 사서 유튜브 보며 손기술 연습했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자 대학을 고민해야 했다. 고등학생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한테 대학을 왜 가야 하냐고 물었다. 대학에 안 가도 배우고 싶은 건 독학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고 설득당해서 대학에 지원했었다. 학과는 통계학과, 수의학과, 컴퓨터공학과를 생각했었다. 통계학과는 빅데이터가 강조되는 시기였어서 혹했고 수의학과는 집에 고양이가 있었기에 혹했고 컴퓨터공학과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기에 혹했다. 당시 성적에 안 되는 건 내려놓고 적성을 생각하다 보니 컴퓨터공학과로 정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으며 그럴 때 보람을 느꼈다. 초등학생 때는 체육시간 이후 목이 마른데 물컵이 없어서 물을 마시지 못하고 가는 아이들을 보고, 다 쓴 물컵 여러 개를 씻어와서 살균기에 넣어놓곤 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직업의 공통점은 창작자이자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직업이었다. 나는 창작자가 되고 싶었다. 창작자는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좋은 영향을 주는 것에 열려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기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으며 이러한 게임을 가능하게 한 컴퓨터 자체에 호감이 컸다. 그렇게 컴퓨터를 하는 게 좋다는 이유만으로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코딩을 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코딩이 너무나도 적성에 맞다는 것을 느꼈다. 코딩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IT가 발전한 세상에서 개발자는 만들고자 하는 것을 중간 인력을 거칠 필요 없이 직접 바로 개발하여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장점에 기인하여 컴퓨터공학과를 진학한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개발자를 꿈꾸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만드는 데 있어서 소프트웨어의 힘은 강력하다 생각했다. 기존에 오프라인에서 제공했던 것을 넘어, 소프트웨어를 통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만들고 제공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과정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창작의 과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창작자로서의 개발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내가 개발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1)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내가 직접 바로 만들어서 제공할 수 있고, 2) 그 과정에서 더 큰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릴 수 있고, 3) 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창작자로서 내가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기본기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개발 분야와 AI를 막론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시간을 투자한다면 기본기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뉴스레터(progress club)와 PO 책(프로덕트 오너)을 접하게 되었고 변하지 않을 기본기란 '올바른 의사결정'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세운 1번 원칙은 고유성이다. 대체불가한 나다운 일을 하는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결정하는 일은 내 삶의 주체로서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도 내 삶의 PO로서 기회를 발견하고 우선순위를 세우고 결정하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 나은 것을 선보이려면 단순히 결정을 내리는 것만으로 공장은 돌아가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는 일 이외에도 만들고 파는 일을 해야 했다. 이때 오너는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기꺼이 메이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나는 의사결정자로서의 개발자를 택했다. 개발은 보조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메이커로서 나 없이도 돌아가는 공장을 세우기 위해 배워서 남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프론트엔드 개발에 적성과 흥미가 있는 지금 상황에서, 프론트엔드 개발자를 진로로 하는 동시에 배워서 남줌으로써 나 없이도 프론트엔드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꿈꾼다. 따라서 내가 당장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은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배워서 남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최근엔 스터디한 것을 정리해서 공유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좋은 영향을 주면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런치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