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내는 일기

그 누구의 인정도 필요없는, 나의 만족을 위한 01.

by 해석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일기를 작성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연필을 붙잡고 손으로 써 내려갔던 일기는 어떠한 돌파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아, 정말 창피하지만, 사람에겐 ‘귀찮음’이란 본성이 있지 않은가. 그럴 때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날의 하루를 정리하곤 했다.


솔직히 나만의 해우소가 일기라는 것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히 있다. 어려운 상황을 강한 심지로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춰질까봐서다. 그럼에도 결국 언젠간 일기 안에 박제된 생각을 정리해서 세상에 펼쳐보겠단 뜻이 있는 이상, ‘일기를 쓴 적 있다.’라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은 말로는 상념, 나쁜 말로는 헛소리. 문법도 틀리고, 무슨 말을 쓰다가 갑자기 다른 말로 넘어가는 그것. 사실 무엇이라도 손으로 써보겠다고 결의한 것은 나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어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새해가 밝아오던 즈음 우연히 일정 기록장이 내 손에 쥐어진 적이 있었다.


어떤 아무개로부터 그냥 날마다 무어라도 쓰게 되면 무조건 좋을 것이란 말과 함께 받게 됐는데, ‘이걸 내가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앞장들엔 달력과 작은 빈칸들이 있었고, 뒷장으로 넘어가니 매일 단위로 문구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줄들이 존재했다. 실제로 유성 연필을 들이밀기 시작한 첫날, 마음은 벅찼지만 뭘 써야 할지 모르겠기에 달력란에다가 앞으로 한 두 달간 있을 큼지막한 일정들을 적어보았다. 내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할 일이 없던 사람인지 뼈 깊게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내 줄이 가득한 장표로 넘어갔다. 마땅히 할 말은 없고, 첫 장을 펼친 행위 자체를 기념할 만 하니 일정 기록장을 받들어서 영광이란 소감을 남겼다.


두 번째 날, 세 번째 날도 여전히 일기 쓰는 것이 낯설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억지로 쥐어 짜내서 쓰는 밀린 일기 느낌으로 흔적을 남겼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30대를 앞둔 사람이 이렇게 유치할 수가 있나 싶었다. 최대한 좋게 생각한다면? 아직 순수한 감성을 지니고 있단 정신 승리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숨긴 글을 날마다 적으려고 하니 막막해졌다. 이 시절 개인적으로 꽤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에 세상이 어떻다는 둥, 사람은 어쨌다는 둥 별놈의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 스쳤는데, 아무도 안 볼 이 종잇장에 내 민낯을 모두 보여야 꾸준히 써 내려갈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어떤 것이든 생각이 나면 적는 습관을 만들었다. 일기라는 물레방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을 부어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생각들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나를 보았을 때 드는 느낌,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세상의 법칙들이 형성된 이유 돌아보기, 모순된 선택을 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기 등. 대중교통을 타는 와중, 일터에서 물건을 나르는 와중, 술 한잔 걸치던 와중. 아무 종이에 쓸 수 있으면 쓰고, 휴대 전화에 남길 수 있으면 써서 최종적으로 일기에 옮겨 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손으로 쓰는 일기와 휴대 전화, 가상 세계 기록장에 산발적으로 쌓여 있는 이야기와 생각이 1천 개가 넘었다. 물론 반복적인 생각과 전혀 써먹을 수 없는 문자들을 보기 좋게 정리한다면 실제로 세상에 공개할 수 있는 생각은 몇 점 안 될 것이다.


최근 일기와 글에서 나 자신이 너무 멀어진 것 같아 흩어진 1천 개를 다시 펼쳐 읽어 보았다. 참 사회와 교류가 적은 상태로 모든 걸 불안해하는 사람에서 점차 종이, 연필과 멀어지고, 냉소 가득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게 보여서 신기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깨달은 건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은 지금에 와서 재현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건 그 시간에 살았던 나밖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 이 순간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알아 버린 이상, 이런 말 저런 말이 버무려진 글이라도 퍼부을 매개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먼 미래에 오늘날을 다시 돌아보며 감상에 젖거나, 새로운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다시 읽어볼 수 있는 일기장을 오래간만에 구매했다.


지금보다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 어떠한 정제 없이 마구 써 내려가려고 한다. 준비는 완료됐다. 곧 나의 물레방아가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그 어느 곳에도, 누구에게도 안 내는 일기란 물레방아 말이다. 언제는 1급수, 또 다른 날은 5급수 폐수를 들이붓겠지. 어떤 물을 붓더라도 물레는 끊임없이 돌아가서 곡식을 부드럽게 잘 펴주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글을 작성해도 일기는 끊임없이 채워져서 내 생각을 아름답게 잘 펴주는 데 공헌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안 내는 일기. 정확하게는 못 내는 일기겠지만, 어디에도 내지 않을 일기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어디에도 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