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술

by E Hana

“엄마, 엄마는 싸움 잘해?”


아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뭐라고? 내가 사람들과 싸움을 잘했었나? 아들이 말하는 싸움은 ‘말’ 싸움이다. 엄마는 잔소리할 때 가끔 할 말을 잃게 하는 ‘비꼼씨’가 나오니까 아들이 보기에는 말을 ‘좀’ ‘잘’하는 것 같다고. 아들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내게 말 잘하는 비법을 알려달라니. ‘비꼼씨’의 탄생설화를 듣고 나니 이것은 칭찬인가 비난인가.


아들은 일단 화가 나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할 말을 잃는다고 했다. 친구가 한 말에 맞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뭐라 받아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본인은 평소 책도 많이 읽어서(본인 생각)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도 알고(지극히 자기중심적 생각) 머릿속에 든 것도 많아(부끄러움은 엄마 몫) 도덕적으로 충고해 줄 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재는 텅! 그래서 “어쩌라고~”만 반복 시전한다고 말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한 가지 말만 반복하는 모질이 앵무새 같다나 뭐라나. 참고로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나는 드디어 아들에게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는 날이 왔구나 생각하며 기사도를 가르치는 귀족이나 된 냥 목소리에 힘이 빡- 들어간다! 는 그냥 상상이고, 물리적이든 언어든 모든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극히 도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건 나도 알아.” 힘은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되며 약자에게 군림하는 게 아니라 악당에게서 약자를 보호하는 슈퍼파워가 되어야 한다며 히어로물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덧붙였다. 아들은 마치 혹 떼려다가 혹 붙인듯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현실성 떨어지는 답변이네.’


아들이 4살쯤이었을 거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하루 일과 중 기억나는 가장 큰 사건부터 아들은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어린이집 친구가 팔을 꽉! 깨물었는데, 그 이유가 친구가 가지런히 줄을 세워놨던 자동차 하나를 아들이 빼앗아서 친구가 몹시 화가 났고 자신의 팔을 앙- 물었다고 했다. 내일 어린이집에 가면 또 같이 놀 거라고 했다.


아들과 친구가 사과를 주고받았고, 어린이집 원장님의 걱정 어린 전화도 이미 받았기에 멍든 부위에 반창고 하나 붙여주고 이제 괜찮아질 거라며 토닥토닥 쓰담쓰담 안아 줄 때까지만 해도, 성장의 한 과정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잘잘못을 가리기에 4살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렸다. 아들도 예민한 기질의 아이라 일반적인 상황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때가 종종 있기에 나 또한 무결점에 자유롭지 않은 부모였다.


몇 편의 청소년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아이들은 자신이 상대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주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타인의 관점을 충분히 이해할 인지 능력이 미숙하고, 감정의 강도를 공감할 정서적 성숙도가 낮으며, 말과 행동의 결과를 사회적으로 학습할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규범이나 말의 영향력을 경험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


일은 언제나 예상치 않은 곳으로 흘러간다. 밤새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들의 친구 엄마가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고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일이었다. 평소 왕래가 있었고, 어린이집에서도 큰 문제없이 지내던 아이들이었기에 마음에 두지 않았다. 또 최근에 그녀가 둘째를 임신 중이어서, 아들의 친구가 동생이 생기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해진 부분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상처받으면서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배운다. 극복하는 과정을 믿음과 신뢰의 눈으로 바라봐 준다면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란다. 그런데 변수가 생겨 버렸다. 전화를 걸어온 그녀의 말투는 내 귀를 의심케 했다. 그녀는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말로 나를 묘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나 행동의 주체는 아들이었고 결과는 아들의 친구 행동이었다.


그러니 말인즉슨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는 말이다. 가해자의 폭력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논리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순간, 장난감을 빼앗은 잘못에 대한 처벌로 아들의 팔뚝에 새겨진 7개의 이빨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잘못된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그 책임은 폭력으로 집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지도 않았던 독한 말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뒤늦은 사과를 받았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에 대한 처벌은 합리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녀의 아들이 일주일 동안 어린이집 등원 금지라는 자발적 근신을 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억울하게 만들었을까?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2016년에 개봉한 독립영화이다. 내용을 소개하면, 주인공 선이는 4학년으로 학교에서 소외된 친구다. 여름방학을 앞둔 날, 새로 전학 온 지아와 친해지면서 처음으로 ‘진짜 친구’를 사귄 것 같아 설렌다. 두 아이는 금세 친해져 비밀을 나누며 즐거운 여름방학을 보내지만 개학 후에 교실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서열과 소문으로 두 아이의 관계는 흔들리게 된다. 이 영화는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관계의 권력’을 보여준다.


선이와 동생 윤재의 대화에서 이는 명확히 드러난다. 윤재가 친구 연우에게 맞고 오는 상황은, 학교에서 선이가 겪는 따돌림의 축소판이다. 선이는 학교에서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외면당하고, 윤재는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연우에게 맞는다. 두 남매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일을 겪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특정한 장소나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시 때렸어야지.”

“또?”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그럼 언제 놀아?”

“어?”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우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난 그냥 놀고 싶은데.”


나는 아들에게 ‘걔가 때리면 너도 때리라’고 가르쳐야 했을까? 아이들은 그냥 놀고 싶다. 정의란 잘못을 일으킨 상대에게 되갚는 것이 아니다. 윤재는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우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라는 질문에서 ‘놀이의 시간’과 ‘폭력의 시간’을 정확히 구분한다. 폭력은 놀이를 방해하고, 관계를 파괴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어른의 몫이다.


진실한 울림은 아주 쉽고 분명한 명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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