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답과 해답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연과학은 정답을 찾는다. 중력가속도는 9.8m/s²이고,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하지만 사회과학은 다르다.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영원한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른 해답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내로남불"을 윤리적 이중잣대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이건 인간 본성의 문제다. '나'는 구체적인 개인이고 '남'은 추상적인 집단이다. 서로 다른 층위에 같은 윤리를 적용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정치학이 말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나 경제학이 말하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 역시 본질은 투쟁과 타협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에는 완전한 해법이 없다. 스웨덴 한림원 내부에서 노벨경제학상 폐지론이 나온 이유도 여기 있다. 경제학이 "근본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자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사회과학은 묘하게 과학 흉내를 낸다. 정치학은 여론조사 통계에 매달리고, 경제학은 복잡한 수식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 모델이, 모든 게 실시간으로 연결된 지금 세상에서 얼마나 유효할까?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들이 자신을 경세가(經世家)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법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과학기술 분야를 내려다본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 반도체 정책을 만들고, 방송/통신을 규제한다. 조선시대 사농공상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풍경이다.
역사를 보면 시대를 바꾼 리더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나폴레옹은 포병 장교 출신으로 대포에 증기기관을 접목하고 탄약 표준화를 이끌었다. 미국 100달러 지폐의 주인공 벤저민 프랭클린은 번개가 전기라는 걸 증명한 과학자였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하임 바이즈만은 아세톤 제조법을 개발한 화학자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장의 원리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현상을 봤고, 이론이 아니라 실험을 했다. 그래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과학이 강한 이유는 의심하기 때문이다. 칼 포퍼는 어떤 가설이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반증 가능해야 한다고 했다. 즉, 과학은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한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오류를 수정하며 앞으로 나간다.
권위에 기댄 리더십은 정반대다.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실패를 덮으려 하며, 비판을 억누른다. 과학적 태도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반증주의는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와 닮아 있다. 권력의 퇴행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백신이다.
물론 기술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했지만, 결국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건 인간이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고,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술을 이해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어떤 가치를 담고 어떤 위험을 내포하는지 알아야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모르면서 규제하고, 이해 없이 정책을 만드는 건 무책임하다.
디지털 시대는 모든 게 연결되고 끊임없이 변한다. 거대 담론만으로는 부족하다. 데이터를 읽고, 현상을 직시하며, 실시간으로 조정해야 한다. 사회과학이 등속운동을 하는 동안 자연과학은 가속운동을 해왔다. 이제 둘은 만나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외치면서 리더십은 조선시대 성리학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법전 속 권위가 아니라 실험실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 현장의 데이터를 존중하며 끊임없이 검증하고 수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제 낡은 옷을 벗어야 한다. 문(文)을 숭상하고 기술을 천시하는 관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법학과 경제학이 세상을 통괄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식인들은 학문 간 벽을 허물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과학은 차갑지만, 그 합리성은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실질적인 해법을 찾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화려한 말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실증의 힘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학을 아는 리더십이다.
(참고로 이 글을 쓴 사람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