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잊고 있던 버킷리스트를 꺼내다.

by 호렌지

’영,프,독,이. 영,프,독,이...‘


고2 때 내 선택과목은 윤리와 세계사였다. 세계사를 배우고 싶었다기 보다는 경제 과목을 죽어도 선택하기 싫어서 택한 차악이었달까. 그리고 1년 내내 나를 아주 고생시켰다. 보통 시험 기간에 국,영,수를 가장 먼저 시작하고, 사탐-예체능 순으로 우선순위에 따라 공부기간을 정하는데 유일하게 국영수와 함께 껴있을 만큼 세계사는 나한테 버거운 과목이었다.


영,프,독,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뭘 외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나라들이었고, 어쩌다가 한 나라가 빠지면 더 괴로웠다. 이번엔 누가 빠진거야? 또 새로 외워야 하니까.


하지만 또 다른 재미도 있었다. 세상이 정말 넓다는 것. 유럽은 언제나 세계 문명에서 너무나 큰 축이었다는 것. 그래서 꽃 피운 문명의 산물을 꼭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는 것. 뭐 이런 것들을 느끼는 재미?



”서른 전에는 혼자 유럽여행 해야지.“


열여덟의 나이에 막연한 꿈을 꿨고, 그 꿈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20대 중반이 되어서도 사실 조금도 구체화되지 않았다. ’서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그 막연함은 내가 그 시기를 계속해서 미루는 데에 일조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2025년, 스물아홉 2월이었다. 정말 그 ’서른 전‘의 마지막 기회였다. 더는 미룰 여유가 없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겁이 났다. 막상 혼자 머나먼 유럽에 가려고 하니 두려웠다. 동북아, 동남아, 북미, 오세아니아 나름 여러 대륙을 잘도 다녀왔는데, 23살엔 호기롭게 혼자 자리잡고 나름 외화벌이도 하고 왔는데 어째서 여섯살이나 더 먹고는 지금와서 겁이 나는 걸까. 나이 먹음을 실감함과 동시에, ’겁이 나니까‘ 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열살이고, 열다섯살이고 더 먹으면 더 간이 작아져 영영 혼자 떠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만한 겁이 날 때 가야겠다고.



2월 9일. 적합한 날짜를 잡고 일단 비행기 표부터 끊었다. 인-아웃 국가에 따라 비행기티켓 값이 꽤 차이가 났다. 예를 들어, 런던 인이나 로마 아웃은 다른 국가를 통하는 것보다 1.5배 가량 비쌌다. 적당한 가격이면서 내가 가고 싶은 나라를 추려서 인, 아웃 나라를 먼저 픽스했다.


약 반 년간 중간 중간 잊을만 하면 또 다른 나라를 찾았고, 가볼만한 명소를 추렸고, 계획을 수정했다. 언제 한번은 날짜 계산을 잘못해 유럽내 이동 비행기표를 취소했다가 다음날 표로 다시 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날은 기대됐고, 어느날은 두려웠다. 도대체가 무엇이 무서운지 알 수가 없어 스스로 어이가 없기도 했고. 그냥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안전지대를 벗어날 때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 그래서 그냥 그 마음도 어쩌겠어- 받아들이며 다가오는 날을 조금씩 자세히 스케치해나갔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사실 좀 더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서른 전‘으로 정한 이유가 있었다. 20대에 세계사 공부를 조금 더 깊이 한 후, 오로지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그 문명에 대해 이해하고 문화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고 싶었다. 나름의 신성한 준비랄까.


그리고 역시나, 정신없이 살아온 20대에 ’언젠가(=정확히 언제일지 모를)‘ 갈 유럽여행에 대비한 세계사 공부는 결국 행해지지 않았다. 아쉽게도. 하지만, '좀 덜 이해하면 어때- 분명 다른 남는 게 있을 거야-' 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가려고 한다.


11년 전 막연한 꿈을 잊지 않고 품어온 낭만으로도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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