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닿지 않는 밑바닥
거인들이 일어났다. 아니, 검은 액체에 잠식된 육체가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부러진 인형처럼 삐걱이며 휘청이는 몸짓은 부자연스럽고 기괴했다. 마치 끊어진 실에 매달린 거대한 꼭두각시처럼, 육중한 사지가 뒤틀리듯 휘둘렸다.
"시체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시즈의 외침과 동시에 가장 가까운 거인이 거대한 팔을 들어 땅을 내리쳤다. 어마어마한 완력으로 인해 주변이 흔들렸고, 지면이 박살 나면서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이어 거인이 도끼를 들어 세 사람을 향해 휘두르자, 아로스는 재빨리 검을 들어 쇄도하는 거인의 도끼를 검을 세워 받아냈다.
"......!"
한순간, 온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칼로 도끼를 빗겨냈을 뿐인데도 마치 팔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것처럼 감각이 마비되었다. 충격이 뼛속까지 울려 퍼졌고, 검을 쥔 손은 속절없이 떨렸다.
'단순히 막는 것조차 이 정도라니......!'
거인이 다시 한번 도끼를 들어 아로스를 내리치려는 순간, 시즈가 벼락을 내리꽂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시즈는 옆에서 빠르게 돌진해 오는 또 다른 거인의 그림자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집채만 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시즈를 향해 덮쳐 들었다. 도망칠 틈도, 피할 새도 없었다.
'아뿔싸......!'
찰나의 순간, 라그나르가 몸을 던졌다. 그는 시즈를 부둥켜안은 채 바깥으로 굴러 가까스로 간신히 거인의 돌진 경로에서 벗어났다.
쿠당탕———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거인은 그대로 아로스에게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육중한 몸들이 서로 뒤엉키며 균형을 잃더니, 두 거인은 그대로 절벽 가장자리로 쓸려가며 처박혔다. 그러나 남은 거인 하나가 망치를 집어 든 채 지진을 일으키듯이 세 사람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엔 물러설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거인이 망치를 내려치려는 순간, 라그나르가 앞을 가로막고 양손으로 망치를 받아냈다. 압도적인 힘 아래로 쏟아지는 충격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크윽...!"
라그나르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듯 버텼다. 그러나 너무나 무거웠다. 아니, 무겁다는 말조차 이 순간에는 사치에 불과했다. 거인의 무게가 그대로 실린 망치는 라그나르가 가진 모든 힘을 짓누르듯 내려왔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고, 온몸이 끊어질 듯한 압력이 밀어닥쳤다. 거인이 더욱 강하게 힘을 주자 라그나르의 발이 땅을 갈며 점점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라그나르 경!"
"피하셔야 합니다"
순간, 거인이 무식한 힘으로 다시 한번 밀어붙이자 라그나르의 버티던 힘이 한순간에 풀렸고, 그와 동시에 균형을 잃은 거인이 거칠게 앞으로 쏠렸다.
세 사람은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거인과 함께 무저갱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무저갱의 어둠 속으로 삼켜지는 바로 그때, 환시의 등불이 아로스의 품속에서 폭발하듯 빛을 뿜어냈다.
어둠 속에서 가늘게 떨리는 분홍빛 촛불이 벽면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촛불 아래에서, 샤비트가 홀로 자리 한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능한 사도들.
그들은 입으로는 형제니 동료니 떠들어대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를 끝없이 물어뜯는 자들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일부는 짐짓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감을 유지했다. 샤비트는 그 위선적인 태도가 더욱 역겨웠다. 사도란 능력으로 증명하는 존재다. 유능한 자만이 위에 설 수 있고, 무능한 자는 도태될 뿐. 그렇다고 힘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은 본질적으로 주교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들이지만 그중 일부는 예전처럼 헌신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충분한 권력을 쥐었고, 주교를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새롭게 형성된 기득권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일부 사도들이 겉으로는 충성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각자의 셈법을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샤비트는 애저녁부터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무시하고 견제하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그들의 목덜미를 찢어버릴 기회를 찾아야 했고, 이번 움브라 신전의 서고 침입 사건은 그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신전 서고에서 사라진 것은 없었지만, 침입자는 특정한 책들을 뒤진 흔적을 남겼다. 카노라스, 그리고 카타디오와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샤비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서고에 침입해 놓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 '도둑질'이 목적이 아니라 정보가 목적이었음을 방증했다. 침입자가 찾고자 했던 것은 책 속에 숨겨진 어떤 단서였고, 그것은 카노라스와 카타디오와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침입자는 누구인가? 단순한 지식 추구자가 아니다. 이 방대한 자료 속에서 특정한 주제만을 찾아냈다면, 이미 목적을 가진 자일 가능성이 크다. 샤비트는 침입자가 오래전 잊힌 것, 혹은 의도적으로 은폐된 지식을 찾으려는 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렇다면 그 자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샤비트는 서고 사건을 사도 회합에서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고, 이번 사건마저 해결하여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자신의 직속 추적자와 감시자들을 동원한 샤비트는 움브라 신전과 그림자의 도시 카타디오, 그 밖의 지하도시로 이어지는 모든 경로를 감시하도록 명령했다. 도둑이 빠져나갔다면 반드시 흔적을 남겼을 것이고, 그의 발걸음은 어디론가 향했을 터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추적자들은 수색 능력만큼은 뛰어난 자들이었다. 설령 도둑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을지 언정, 이렇게까지 완전히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단순한 도망이 아닐지도 몰랐다.
고민 끝에, 샤비트는 도둑이 지상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카노라스를 포기하지 못한 자들이 남아 있는 곳, 오리엔 요새가 떠올랐다. 그곳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그저 황폐한 폐허에 불과하다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았을 터였지만 무너진 요새는 여전히 신들의 성물의 힘을 빌어 버티고 있었다.
샤비트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그곳을 그렸다. 망루 위에는 여러 대의 쇠뇌가 걸려 있었으며, 방벽 뒤로는 투석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번 조준당하면 피하기 어려운, 파괴력과 살상력을 가진 중장거리 무기였다. 또한 성문은 없었음에도 무너진 성벽 아래의 오르막이 하나의 방벽이 되어 침입자를 걸러냈다. 진입로는 좁은 계단과 부서진 벽뿐이었고, 그 어느 쪽도 쉬운 길이 아니었다.
추적자들 만으로는 요새를 뚫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데 능숙하지만, 본격적인 전투병으로서는 보잘것없었다. 근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다고 한들, 투석기의 사정권을 뚫더라도 무너진 돌 더미 위로 발을 디디는 순간 망루에서 쇠뇌가 날아와 사지를 꿰뚫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무너뜨릴 자들은 더 빠르고, 더 날렵해야 한다.
그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샤비트는 조용히 웃었다.
사냥꾼들이 있지 않은가.
둥글게 휜 허리, 길게 늘어진 팔다리, 작지만 가벼운 몸놀림. 오직 사냥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 다른 사도들은 그들이 너무도 야만적이라며 멸시하고 멀리했으나 샤비트는 사냥꾼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시스테나 전선에서의 추적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상대가 예측 수준 이상으로 강했을 뿐,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빠르고 날렵하다. 무너진 성벽을 발판 삼아 어렵지 않게 타고 오를 것이고, 길을 가리지 않고 질주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냥꾼들은 단순한 전사들이 아니다. 전장을 흐트러뜨리는 존재들이며, 사냥감이 도망칠 여지를 없애는 본능을 타고난 자들.
샤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불길한 공기가 가득한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이 눈앞에 펼쳐졌다. 습하고 어두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자, 고약한 짐승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혼종 사육장.
쇠창살 안쪽에서 뒤틀린 형체들이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근육이 과하게 발달한 짐승 같은 생물들이 낮은 신음을 내며 사슬을 당겼고, 핏발이 선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사육장 너머로 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냥꾼 대장을 마주하자, 검붉은 가죽 두건 너머로 길게 찢어진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마주하면서 샤비트는 망토 자락을 정리하며 허리춤에 손을 뻗어 조용히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제된 검은 액체가 '한 방울' 담긴 병.
그것은 흔해 빠진 물건이 아니었다. 단순한 약도 아니었다. 병 하나에 담긴 것은 극한의 감각을 깨우는 자극이자, 심장을 두드려 충동을 일으키는 지독한 마약과도 같았다. 뚜껑의 마개를 따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병이 열리자마자 짙고 불길한 향이 천천히 퍼져나갔고, 동시에 우리 안이 요동쳤다. 쇠창살이 덜컹이며 짐승들이 몸을 튕겼고, 본능적으로 반응한 혼종들이 단숨에 사슬을 당겼다. 거친 발톱이 땅을 미친 듯이 긁는 동시에 사슬과 연결된 목덜미가 경련하듯이 떨렸다. 짙은 향이 퍼지는 방향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그들은 광기에 가까운 흥분을 내뿜었다. 단 한 방울의 향기만으로 숨소리는 점점 짙어졌고, 가둬둔 우리 안에서 광폭하게 몸을 부딪히자 그 난폭한 움직임으로 우리 전체가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샤비트는 눈앞의 사냥꾼 대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또한 짐승 중 하나였다.
사냥꾼 대장의 어깨가 움찔하며 콧김이 변했다. 깊고, 짙고, 탐욕스럽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붉게 충혈된 눈, 거친 숨결이 드러났다. 입 또한 천천히, 그러나 크게 벌어졌다. 마치, 갈망에 허덕이던 자가 잊고 있던 쾌락을 되찾은 듯한 미소와도 같았다.
그 눈빛에 담긴 굶주림을 확인한 샤비트는 짧게 웃으면서 조용히 옆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 쥐어진 것은 무거운 자루 하나였다. 수십 개의 병이 그 안에서 부딪히며, 낮게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샤비트는 자루를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놈들을 사냥해라."
차가운 공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숨을 쉬는 법도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공기가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빛.
한순간 터져 나온 눈부신 광휘. 그러나 그 뒤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의식이 끊긴 채로 얼마나 떨어졌을까. 끝없는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감각. 땅이 없는 공간, 위와 아래의 개념조차 사라진 곳. 몸이 가라앉는 것도, 떠오르는 것도 아닌 무한한 낙하.
그 안에서, 또 다른 빛을 보았다.
어둠을 뚫고, 깊숙한 심연 속에서 떠오른 한 줄기 빛. 그것은 희미하게 떨리는 듯하더니 서서히 둘로 나뉘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갑자기,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잡을 수도, 따라갈 수도 없었다. 빛은 저 멀리 세상의 어딘가로 날아가면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하나의 빛.
그것은 여전히 함께였다. 아니, 함께하는 듯했지만 훨씬 더 빠르게 떨어졌다. 손을 뻗으려는 순간 빛은 저 아래 깊은 곳으로 가속했다. 너무 깊게, 너무 빠르게.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 몸이 흔들리는 감각이 들었다. 의식이 흐려지다가 다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끊어진 기억을 붙잡으려는 동시에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고, 무거운 머리를 감싸 쥐면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듬성듬성 삐져나온 털과 단단한 어깨의 감촉에, 아로스는 눈을 뜨면서 자신이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라그나르가 자신을 업고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대체......?"
"정황상... 심연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심연. 그 한마디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로스는 조용히 라그나르의 등에서 내려섰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짧게 사과를 건네자, 라그나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스는 라그나르가 건네주는 환시의 등불을 받아 들고 주변을 살폈다. 등불은 처음 무저갱에 떨어질 때처럼 폭발적인 빛을 발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앞을 밝히기에 충분한 은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등불의 주변으로 집중하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아니, 동굴과 닮은 공간.
이곳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거친 바닥이 아니었다. 발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기묘하게 푹신했다. 딱딱한 돌바닥이 아닌, 마치 거대한 이끼 위에 서 있는 듯한 감각. 축축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습한 이곳 주변을 뒤덮은 벽면은 거대한 유기물이 엉겨 붙은 듯이 형성되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어딘가에서 흐르는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고, 고인 웅덩이에 떨어질 때마다 그 소리가 적막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