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과 심연
그 순간, 칼이 완전히 뽑혀 나왔다. 은빛 검신이 폐허의 불빛을 받으며 살벌하게 반짝였다.
"더는 다가오지 마라."
아로스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목소리엔 숨겨진 감정도, 설득도 없었다. 오직 베어버리겠다는 위협만이 가득한 있는 가운데, 자리로 돌아온 라그나르가 그를 제지하듯 나섰다.
"진정하십시오! 사제는 제가 들여보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 우리를 해할 생각이었다면 계곡 아래에서 진작 그리 했겠지요.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우린 지금 이곳에 없었을 겁니다."
라그나르는 데미안과 아로스 사이에 몸을 살짝 들이밀며 아로스의 검끝을 낮추려 했지만, 아로스의 칼날은 여전히 데미안을 향해 있었다.
그때, 가늘게 떨리는 숨결과 함께 시즈의 미약한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요."
세 사람 모두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기운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즈는 조금 전의 약속으로 마음을 다잡은 듯 눈동자가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능의 순환 또한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가면의 문양이 은은한 맥박처럼 잔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저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예요."
아로스는 시선을 잠시 내렸다가 조용히 시즈를 바라보았다. 놀람보다는 의외라는 감정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 안에 스쳤다.
"사제님."
시즈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노아에 대해 묻고 싶은 건가요?"
잠깐동안 정적이 흘렀다. 짧은 질문에 데미안의 몸 주변에서 미묘한 기류가 일렁였다. 가면 너머로는 아무 표정도 읽히지 않았지만 주위를 감싸는 열기의 결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칼을 든 아로스의 손 또한 여전히 힘은 들어가 있을지 언정, 데미안의 반응 뒤로는 바로 휘두를 기세가 아닌 한 발 멈추어 지켜보려는 태도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 틈을 타듯, 데미안은 시즈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그날, 당신이 말했던 이름.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시즈는 힘겹게 눈을 들었다. 호흡은 여전히 고르지 않았지만 말은 또렷했다.
"노아는... 저희들의 동료였어요. 엘라리모스의 마을에서부터 시스테나 전선까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시즈는 데미안의 가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그니카에 있을 거예요. 강대한 거인 전사와 함께 그곳으로 떠났어요."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겁니까."
데미안의 물음에는 기대도, 부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아버린 사람처럼 보였지만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는 살아 있어요. 그리고... 당신을 찾고 있어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공간에 오래도록 남았다. 단지 한마디였을 뿐임에도 데미안의 무언가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미동 없이 서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오래된 문이 안쪽에서 느리게 열리는 것처럼 내면 어딘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피비린내도, 썩은 냄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피멍 든 고동처럼 묵직하고, 끈적한 무게로 허공을 눌러왔다. 먼지 위로 조용히 깔리는 안개의 발소리와 살갗을 스치는 듯한 살의에 라그나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로스가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하늘의 틈, 폐허 너머의 잿빛 하늘에 떠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저 괴물은......!"
그리즈마. 뱀과 갑각류가 뒤엉킨 듯한 이질적인 외형. 악몽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울루니아는 부유한 채 천천히 강하하며, 산산이 부서진 폐허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라그나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날의 기억이 일순간에 덮쳐왔다. 타리안 성채 앞 전투 속 나스툴룬들의 피비린내, 일순간에 날아와 바르그의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울루니아. 그날 분명, 라그나르는 놈의 팔을 썰어냈다. 뼈까지 내려치는 감각이 아직까지도 손에 남아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바르그가 목덜미를 물어뜯어내는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턱을 시작으로, 가슴 아래를 타서 꼬리 끝까지 새까만 피를 폭포처럼 쏟으면서 달아났던 추잡한 그 뒷모습을 보고 분명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였다. 그건 확신이었다.
그런데 놈은 살아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더욱 거대해진 모습으로, 더더욱 흉측한 형태로. 그날의 상처를 안고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왔다.
아로스는 시즈를 보호하려는 듯 자신의 몸으로 가리면서 검을 빼 들었고, 라그나르는 울부짖는 늑대처럼 낮게 숨을 내쉬었다. 시즈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직은 버거웠기에 왼쪽의 푸른 눈동자만이 그리즈마를 향해 흔들렸다.
허공에 떠 있던 그리즈마가 날개를 뒤집으며 자세를 틀었다. 거대한 쇠뇌가 날아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은 날개가 접히면서 지상을 향해 급강하했다. 그리고, 바람이 갈라지는 동시에 무너진 요새 위로 짙은 압력이 내리 꽂혔다.
"엎드려——!!"
아로스의 외침과 동시에, 그리즈마의 날개가 폐허를 베어냈다. 거대한 낫처럼 휘둘린 그 절륜한 위력에 요새의 벽이 두 동강 나 버렸다. 잘려나간 폐허의 잔해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먼지가 공중으로 치솟으면서 돌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아로스는 온몸으로 시즈를 감싸며 폐허의 잔재를 대신 들이받았고, 라그나르는 완전히 피하지 못했는지 어깨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리즈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날개를 펼쳐 일순간 회전하듯, 궤적을 바꾸며 라그나르를 향해 또다시 날아들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꽃이 허공을 가로막았다. 데미안 손끝에서 피어난 불꽃은 곧장 광선처럼 그어지면서 그리즈마와 라그나르 사이를 베어냈다. 난데없는 공격에 그리즈마는 방향을 틀었다. 불꽃의 궤적이 그의 눈앞을 가로지르며 소멸했고, 본능은 그 열기를 경계하듯 날개를 펼쳐 다시금 허공을 차지했다.
"...지금 뭘 하는 겐가."
라그나르가 데미안을 향해 물었다. 비록 거칠었지만, 목소리엔 놀라움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리즈마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밑에서 붉은 불씨가 터져 나오면서 무너진 바닥 위로 열기가 번져나갔다.
"왜 끼어드는 거지?"
아로스의 목소리가 요새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는 시즈를 보호하듯 품에 안은 채 무너진 잔해를 털어내고 있었다.
"저 괴물은 우리를 찾아 이곳에 온 거다. 네가 굳이 싸움에 끼어들 이유는—"
"있습니다."
데미안이 조용히 말했다. 짧고, 가볍고,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말 뒤로는 어떤 설명도 덧붙여지지 않았다. 그의 발아래와 등 뒤로 흐르는 불꽃이 모든 말을 대변하고 있었다. 시즈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열기로 인해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타오르는 불꽃을 따라 천천히 전진하는 사제의 등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다시 한번 어두운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리즈마는 데미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맹수처럼 입을 벌리며 짧은 포효를 내지르자 그 몸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허공을 뒤덮은 그리즈마의 몸에서 고름처럼 들러붙는 독기가 마치 뱀이 굽이치듯 데미안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맹독마저도 지상에 닿지 못했다. 데미안이 손끝을 들어 올리는 순간 발밑에서부터 불꽃이 솟구쳐 올랐고, 타오른 불은 살아있는 장막처럼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막으며 맹렬하게 달려들던 독기를 흔적도 없이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었다. 타는 소리조차 없었다. 한순간 밝게 발화하는 폭발이 있었을 뿐, 붉은 벽처럼 펼쳐진 불꽃은 그리즈마의 공격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공중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본 그리즈마의 거대한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기류를 타며 고도를 높이더니, 이내 불쾌하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리엘의 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리즈마는 마르프록스 산맥을 비우기 이전, 베리엘과 함께하는 불꽃의 사제들 중에 저런 놈이 있었는지를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본 적 없는 놈이었다. 더군다나 불꽃의 힘 또한 그동안 봐왔던 사제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몰랐지만, 감히 자신의 독기를 태워 없앤 것도 모자라 주제도 모르고 앞을 가로막는 꼴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같이 찢기기 싫으면 꺼져라!"
그리즈마가 경멸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자 데미안은 가면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에서 다시 한번 붉은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불꽃은 살아있는 짐승처럼 맹렬하게 흔들리며 주변의 부패한 공기를 밀어내고 발 앞의 대지를 정화하듯 소각했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리즈마는 한쪽 날개를 틀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시 하강 자세를 잡았다. 처음 보는 사제의 불꽃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열기가 그의 본능에 경계심을 주었지만 그것은 이내 흥미로운 사냥감을 만났을 때의 흥분으로 바뀌었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보군. 어디, 그럼 이것도 한번 피해봐라!"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는 그리즈마의 모습에도 데미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을 들어 올리며 손끝에 피어오르는 불꽃을 칼날처럼 뻗어 올렸다.
그리즈마의 육중한 몸이 지상을 향해 내리 꽂혔다. 검은 날개가 휘둘리면서 또다시 요새 일부를 통째로 베어냈고, 폭음과 함께 터져나간 돌 더미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날개에서 터져 나온 독기가 검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주변을 잠식했지만 그 마저도 붉은 불꽃 앞에서 힘없이 갈라졌다. 데미안의 발밑에서 퍼져나간 열기가 살아있는 장막처럼 부패한 공기를 다시 한번 태워냈고, 그리즈마의 날개에 무너져 내리던 거대한 성벽은 붉은 화염의 벽이 막아섰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충돌한 두 힘에 대지가 울렸다. 그리즈마가 날개를 펄럭이며 다시 공중으로 몸을 끌어올리자 데미안은 반보 물러서며 오른팔을 숙였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그 불꽃이 자신의 일부인 듯, 고통이 아닌 확신처럼 손끝에 맺혀 있었다.
그리즈마가 또 한 번 포효하자 허공이 찢겼다. 살점을 긁는 듯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더니 찢어진 하늘 틈 너머로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 울림에 응답하듯 하늘 저편에서 날개 달린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마치 오래된 부름에 이끌리듯,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떠올라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암흑 속을 유영하듯 날아오는 그것들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것은 축축하게 뒤엉킨 촉수를 달고 있었고, 어떤 것은 이빨이 가득 달린 주둥이를 제외하고는 매끄러운 살덩이뿐이었다. 비늘과 살점, 검은 골편과 점액으로 이뤄진 괴이한 형상들의 공통점은 오직 그리즈마의 것과 유사한 비늘과 가죽이 뒤섞인 듯한 비대한 날개뿐이었다.
수많은 울루니아들의 등장에 라그나르의 손이 저절로 지팡이의 검집으로 향했다.
"...이번 전투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로스 역시 눈빛을 날카롭게 벼리며 한 손으로 검을 굳게 쥐었다. 그는 품에 안긴 시즈를 보호하기 위해 신중하게 무게 중심을 낮추면서 언제든 공격을 받아넘길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
그의 품 안에서, 시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로스를 붙잡았다. 아로스에게만 의지하는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 그의 팔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뎠다.
"무녀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직 몸이……."
아로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걱정 어린 제지를 건네며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자, 시즈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어요."
시즈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들어 올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고, 손등 위로 번져나가는 마력의 윤곽은 이전보다 한층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그 순간, 데미안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붉은 불씨의 유리병 하나를 꺼내어 말없이 땅바닥에 내리쳤다. 유리병이 깨지면서 안에 담긴 불씨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허공을 물들였고, 그 사이에 지팡이를 쥐어 잡은 데미안이 반대쪽 손을 허공을 향해 치켜들었다.
손끝에서 피어난 불꽃은 시즈와 싸웠던 순간과는 달랐다. 사람만 한 검붉은 화염이 그의 손끝에 붙들려 있었다.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그 불길을 허공을 향해 던졌다.
퍼엉—————
날아오던 울루니아 하나가 불꽃에 정통으로 맞았다. 불길이 살점을 태우며 번져 나가자 놈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추락했다. 땅으로 떨어진 울루니아가 사지를 비틀며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데미안은 쳐다보지도 않고 연이어 불꽃을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