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화염을 피하기 위해 울루니아들은 공중에서 어지럽게 날뛰었지만 그중 몇몇은 끝내 피하지 못하며 불꽃에 맞아 추락했다. 라그나르는 바닥에서 불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구르는 놈들을 향해 곧장 달려들어 칼끝으로 목덜미를 꿰뚫었고, 아로스는 지상으로 떨어진 놈들과 치열한 공격을 주고받으며 잿빛 그림자 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시즈는 멀리서 아로스에게 달려드는 울루니아를 향해 뇌격을 떨어뜨렸고, 그 틈에 아로스는 벼락을 맞고 몸이 굳어버린 괴물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 사이에도 데미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공중에서 돌진해 오는 울루니아 하나가 옆으로 빠르게 접근하자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허리춤의 유리병을 꺼내 그대로 던졌다. 유리병이 울루니아의 몸통에 박히면서 불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몸을 뒤틀며 비명과 함께 타오르는 형체를 향해 아로스가 날렵하게 돌진하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자 불타오르던 울루니아는 검격을 맞고 그대로 머리가 세로로 갈라졌다. 공중을 장악했던 그리즈마조차도 불꽃에 밀려 하강을 반복했다. 거대한 몸을 던져 창 같은 발톱을 데미안에게 내리꽂으려 했으나 데미안이 지팡이를 틀어 염도를 펼쳐내면서 붉은 칼날이 허공을 갈랐고, 그 일격에 그리즈마의 발톱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불을 다루는 놈부터 죽여라!!!"
그리즈마의 외침에 반응하듯, 흩어져 있던 수많은 울루니아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데미안에게로 향하자 마치 어둠이 하나의 강줄기가 된 것처럼 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데미안은 허리춤에 남은 유리병들을 전부 꺼내 하늘을 향해 흩뿌렸다. 허공으로 떠오른 십수 개의 유리병을 향해 염도가 휘둘리자 공중에서 유리병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퍼버버벙————
폭탄처럼 터지는 불꽃의 폭발음과 함께 날아오던 울루니아들이 충격에 휩쓸리며 허공을 뒹굴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날개가 찢기고 몸이 불타오르며 비명이 연달아 이어졌다. 폭발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즈마는 마지막 순간에 날개를 앞으로 겹쳐 몸을 감쌌지만 폭발의 중심에 지나치게 가까웠던지라 좌측 날개와 외피 일부가 일그러진 채로 추락했다.
데미안은 땅바닥에서 나뒹구는 울루니아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 그의 오른손에서는 검붉은 불꽃이 아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홍빛 불꽃이 타올랐다. 손끝에서 피어난 불꽃은 더 이상 사제의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판 그 자체였다. 데미안이 허공에서 손바닥을 내리치자, 응축된 불꽃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방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울루니아들의 발밑에서 거대한 불기둥들이 솟구쳐 올랐다. 불기둥은 사방을 뒤흔들며 울루니아들이 있었던 자리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불꽃은 자신이 감싸고 있던 존재들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그 장면은 마치 대지가 화답하는 파문처럼 깊게 번져 나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데미안에게 향했다. 라그나르는 입가가 굳었고, 아로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잃었다. 시즈는 자신을 압도했던 그의 힘을 떠올리며 뼛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불기둥의 잔재가 사라지면서 공기의 색이 바뀌었다. 공포와 열기, 그리고 데미안이라는 존재 자체가 전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즈마의 거대한 동공이 흔들렸다.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잊고 있던 공포라는 감정이 또다시 온몸을 침투했다. 본능이 경고를 울렸고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도저히 범주를 가늠할 수 없는 눈앞의 불은 과거 이그니카를 침공했을 때 마주했던 그 어떤 불의 사제와도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데미안이 쏟아내는 불꽃은 하나의 흐름이 아닌 의지를 쏟아내는 파괴 그 자체였다.
데미안은 오른손을 낮추었다. 불꽃은 여전히 손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그리즈마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끝을 따라 번져나가던 불꽃은 데미안이 손을 휘두르자 파열과 함께 다시금 그리즈마를 향해 퍼져나갔다. 그리즈마가 날개를 펼쳐 막아섰지만 불꽃은 그의 발톱을 녹여버리고 방어를 뚫어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그리즈마를 몰아치던 데미안은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응축된 진홍빛 불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아주 작은 형체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날아온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
데미안의 몸이 휘청이면서 손에서 타오르는 불꽃 또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것을 잡아 뽑아냈다. 가늘고 기다란 바늘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손끝으로 소름 끼치는 맥박이 울려 퍼지더니 불순하고 차가운 힘이 피부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데미안의 몸이 경련에 떨기 시작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감싸 쥔 채 괴성을 내질렀다.
"——크으아아아아아악!!"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이 전장과 요새 전체로 울려 퍼졌다. 타오르던 불꽃이 휘청이며 깜빡였고 장막처럼 번져 있던 열기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 틈 너머로, 무언가가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하늘을 가르듯 펼쳐진 거대한 검은 날개, 그리고 어둠을 휘감은 실루엣 너머로 드러난 매서운 부리의 형상.
베리엘. 그의 발걸음 하나가 폐허 위의 열기와 공포를 전부 압도했다. 세로로 찢어진 암녹빛 동공이 부서진 잿더미 위를 스치듯 훑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움켜쥔 채 괴성을 토해내고 있는 데미안의 손끝은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위력은 점점 시들어갔다.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그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경멸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그리즈마는 갑작스럽게 날개를 한껏 펼쳤다. 날갯짓으로 인해 부서진 잿더미가 흩날렸고, 곧이어 그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데미안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켜라. 그놈은 내 손으로 죽일 테다."
갈라진 목소리 안에 도사린 분노는 거칠고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베리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까마귀의 부리가 잿빛 연기 너머로 드러났다.
"너 따위가 끼어들만한 자리가 아니라서 곤란하겠는데."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네놈은 늘 상처 입은 것들만 골라서 물어뜯었지. 언제나 그랬어."
베리엘의 말에 그리즈마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자 앞에서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면서, 본인보다 약한 존재 앞에서만 이빨을 드러내는 네놈은... 그저 하찮은 겁쟁이일 뿐이지."
거대한 어깨에서 경련이 일었다. 베리엘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날아가 그대로 그리즈마의 비수를 꽂았다. 그 한 마디가 역린을 건드린 듯, 깊숙이 묻어둔 열등감을 찔렀다.
"...내 유흥을 방해한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군. 그 추잡한 날개로는 내 발끝에도 닿지 못하는 일족 따위가 말이지!"
그리즈마의 날개가 움찔거리며 몸을 앞으로 던지려는 찰나, 베리엘의 검은 날개가 폭발하듯 부풀었다. 물리적인 크기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포효 없는 위압을 뿜어내는 기운이 공간을 짓누르며 폐허의 열기를 차갑게 짓밟자, 그리즈마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치명적이었다. 그저 불의 심판으로 추락한 뒤 무언가 거대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조력자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눈앞의 익인을 통해 느껴진 기운은 그런 얄팍한 예상을 비웃고 있었다.
감히 마주 볼 수조차 없는 신의 형상을 지닌, 거구의 익인 등 뒤로 드리워진 아우라. 스스로를 강자라 여겼던 오만함이 그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한낱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암녹빛 안광이 다시 그리즈마를 향해 고정됐다.
"너 따위에게 휘둘릴 거라 생각한 거라면 아주 큰 오산이야."
그리즈마의 눈동자가 또다시 흔들렸다. 발톱은 이미 땅을 파고들었지만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네놈은 상처 입은 사냥감만을 쫓는 패배자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분수를 알아가면 좋겠지만... 저능한 네놈이 그걸 깨달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
그 원색적인 비난에 그리즈마의 날개가 흔들렸다. 분노인지, 망설임인지 알 수 없는 떨림이 퍼졌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베리엘은 더 이상 그리즈마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라그나르를 비롯한 세 사람을 한 번씩 노려본 뒤, 발톱으로 데미안을 집어 들면서 날개를 커다랗게 퍼뜨렸다. 까마귀의 그림자가 데미안을 감쌌고, 곧이어 두 형체는 폐허 위를 박차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암녹빛 안광이 마지막으로 어둠 속을 스치듯 비추면서 검은 날개가 밤하늘을 찢듯 퍼지며 사라졌다. 남겨진 그리즈마는 부서진 틀 안에서 날개를 수그러뜨리지 못하는 새처럼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말을 잃은 괴물의 눈빛이 불탄 폐허 위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멀리서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세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전장을 압도하던 데미안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끌려가는 장면에 시즈와 아로스는 말을 잇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라그나르의 눈빛은 달랐다. 그 역시 그리즈마처럼, 베리엘의 등 뒤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온몸이 굳었다. 불의 심판으로 날개를 빼앗기고 추락한 죄인들의 후손이... 어찌하여 모르티아의 기운을 등에 업고 나타났는가. 뼛속 깊이 새겨진 공포가 다시 한번 그의 온몸을 잠식했다. 15년 전, 자신의 의지를 빼앗기고 주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게 만들었던 그 압도적인 위압감. 라그나르는 다시 한번 그 잔악한 악신과 마주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잔해 위로 무거운 떨림 소리가 들려왔다. 날개를 접지도 못한 채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던 그리즈마의 표정에는 분노와 치욕, 망설임과 혼란이 뒤엉켜 있었다. 분노로 빨갛게 충혈된 거대한 눈동자가 천천히 세 사람을 향해 돌아갔다. 그의 육중한 몸이 뒤틀리며 방향을 틀자, 기다란 꼬리에 부딪힌 폐허의 잔해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 모욕을 쏟아낸 놈은 사라지고, 이제 남아있는 것은 네놈들 뿐이로군."
낮은 목소리에는 쏟아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섞여 있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 순간—
우르릉———
허공 저편에서 하늘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 소리에 그리즈마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눈동자가 응시한 남쪽은 여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영역이었음에도 아주 희미하게, 검은 실선 같은 균열이 사라지는 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 그리즈마의 날개가 크게 퍼졌다. 바닥에 금이 가듯 거대한 충격이 일면서 상처투성이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움직임은 무겁지도, 급하지도 않았지만 이 자리에 더는 있기 불편하다는 듯 보였다.
그리즈마가 사라진 자리에는 불꽃이 지나간 잔해만이 남겨졌다. 갑작스러운 적막이 찾아왔다. 숨소리도, 발자국 소리도 없는 침묵이 지나치게 오래 이어지더니, 마치 그 침묵이 약속된 신호라도 되는 듯 사방에서 땅을 울리는 수많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의 결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도착한 것은 그림자였다. 검고 날렵한 실루엣들이 폐허의 가장자리를 감쌌다. 그림자의 무리가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갖추자 그 뒤로 더욱 무거운 기척이 이어졌다. 검은 아우라와 함께 샤비트가 이끄는 수많은 근위병들이 검은 물결처럼 자리를 메웠고, 그 뒤를 따르는 추적자들이 빈틈을 조용히 채워 넣었다.
폐허 위로 서서히 일어나는 그 기세의 중심 속에서 샤비트가 말없이 가로질러 나왔다. 흔들림 없는 걸음과 시선, 망토 자락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기운이 땅 위로 자욱하게 퍼져나가며 전장을 덮었다.
샤비트의 시선이 시즈를 향해 멈췄다. 눈빛엔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오래 걸린 작업이 드디어 손에 잡히게 되었을 뿐이었다.
"정말 징글징글하군."
샤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권태와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한 번 놓치고, 또 놓치고... 잡았다 싶으면 어디선가 벌레 같은 놈들이 꼬여서 판을 망치기 일쑤였지. 덕분에 계획은 번번이 틀어졌고, 속이 뒤집히는 걸 참느라 애를 좀 먹었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내 눈앞에 와 있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