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10)

따뜻한 온기

by 이샤라

짧은 한숨을 내쉰 시즈는 갈색으로 감춰두었던 자신의 푸른 눈동자를 드러냈다. 이능을 풀자 본래의 청아한 푸른빛이 등불 아래에서 조용히 빛났다.


"세간의 소문과 최근 겪은 일들 때문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들어왔습니다만, 이렇게 바로 알아보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희도 마을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니 말이죠."


"그런데... 제가 이능으로 눈속임을 사용한 것을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시즈의 조심스럽게 물음에 안톤은 담담하게 답했다.


"긴 시간을 전선에서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어깨너머로 배우게 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느낌일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어긋나는 기색이 느껴지면 대체로 뭔가 숨겨져 있더군요."


그 말에 시즈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위장이 그리 허술하지 않았음을 알기에, 그것을 꿰뚫어 본 안톤의 직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노아가 조심스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처음보다 눈빛이 또렷해져 있던 그의 시선이 시즈에게 머물렀다.


"...무녀님, 혹시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조심스러웠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안톤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노아."


목소리에는 다그침보다 우려가 더 짙게 담겨 있었다. 노아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듯 입을 다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시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네요."


노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어떤 실망도, 원망도 없었지만 뭔가를 확인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안톤의 뒤로 물러섰다. 안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드는 사이, 뒤편에서 주민 한 명이 다가왔다.


"의원님, 곧 날이 저물겠습니다. 저녁 준비를 시작할까요?"


"오, 시간이 벌써 그리 되었나. 여기 손님들 몫도 부탁드리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헌이 주민을 따라가며 덧붙였다.


"흠흠, 그러시구려. 그럼, 궁금하신 이야기는 저녁을 들면서 나누시겠습니까?"



해가 저물고, 부엌에서는 부드러운 칼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은은한 음식 냄새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하자 시즈는 조용히 소매를 걷어붙이며 주민의 옆에 다가섰다.


"제가 무엇을 도우면 될까요?"


주민은 순간 놀란 듯 시즈를 바라보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아휴, 무녀님. 괜찮아요. 손님이신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시즈는 고개를 저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행길에서 이런 따뜻한 식사는 오랜만입니다. 이 정도는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 말에 헌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손님으로서 편하게 기다리고 계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맛있게 준비한 뒤에 가져다 드릴 테니 기대하고 계세요."


헌이 감자를 손에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할 무렵, 아로스는 한쪽 벽에 기대어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박한 저녁 준비, 옅게 퍼지는 음식 냄새, 분주하지만 평화로운 손길들.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온기일지도.


안톤은 이처럼 평화로운 순간이 어색한 듯한 아로스의 표정을 힐끔 살피더니 잔잔히 웃었다.


"이곳 마을은 작은 텃밭과 뒷산 덕분에 굶주릴 걱정은 없습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남쪽은 가끔 작은 사치도 누릴 수 있지요. 오늘 저녁은 꽤나 괜찮을 겁니다."


저녁 준비가 끝나자, 낡았지만 깨끗한 나무 탁자 위로 음식이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다. 갓 구운 빵은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으며, 따끈한 감자와 향신료를 곁들인 스튜가 김을 피우며 옆에 놓였다. 스튜에서는 잘 익은 채소의 단맛과 허브 향이 가볍게 피어올랐고, 짙은 갈색으로 잘 구워진 고기 조각들은 작은 접시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기름 향이 퍼지자 오랜 허기를 자극하는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와......"


시즈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식탁을 바라보았다. 추격과 경계로 점철된 길 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아로스는 그런 시즈를 곁눈질하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고, 안톤 또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단출한 식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시니 기분이 좋군요. 마을 구석에서 기른 채소와 뒷산에서 잡은 작은 짐승들로 만든 거라 특별한 건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에게는 충분히 호화롭습니다. 오늘 이 식사를 잊지 못할 것 같군요."


아로스는 여전히 입이 벌어진 채 식탁을 쳐다보는 시즈를 보며 말했다.


안톤의 간단한 식사 전 인사를 끝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시즈는 오랜만에 마주한 따뜻한 식사를 조심스레, 천천히 음미했다. 감자는 부드럽게 익어 있었고, 스튜는 고소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고기도 잘 익어 촉촉하고 담백했으며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맛있다'는 감정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시즈와 아로스는 따뜻한 등불 아래에서 안톤과 마주 앉았다. 벽난로에서 은은한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운 고요를 깨고 있었다. 안톤은 손으로 빈 잔을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늙은이에게 듣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스테나 교회 쪽에서 언령이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내용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시즈의 물음에, 안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의 주름을 깊게 접었다.


"언령이라... 방금 말씀대로, 그곳 교회에는 언령이 내려왔었지요. 문제는, 그곳의 무녀님이 5년 전 교회가 습격당한 동시에 자취를 감추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도 그 언령을 읽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시즈는 짧게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고, 안톤은 찰나의 순간에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시스테나 교회의 무녀님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헌 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시즈는 고개를 들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실은... 저도 남쪽으로 향하는 순례 도중 몇몇 마을과 안식 교회 인근에서 추적자들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안톤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무녀님을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그림자에 숨어 움직이던 자들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이건 단순한 종교적 갈등이나 지역의 불안 같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안톤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건네는 순간, 방문 바깥의 긴 복도를 조용히 걷는 발소리가 있었다. 누군가 숨을 죽인 채 벽을 따라 천천히 다가왔다.


노아였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대화를 일부러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 안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지는 동안 그는 끝내 그 자리에서 등을 떼지 못했다.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잠시 눈이 익숙해진 뒤, 아주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심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떠난다'는 말이 어쩌면 이 안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노아가 듣고 싶었던 건 대단한 비밀도, 전설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잠겨 있던 '동행'이라는 말, 그 한 마디였다.


한편, 경고를 건넨 뒤 생각에 잠겨 침묵하고 있던 안톤은 문득 시즈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기사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왠지 모르게 기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시즈는 잠시 머뭇거렸다. 막상 소개하려니 어쩐지 망설여졌다.


"이분의 이름은... 아로스입니다. 그리고... 환시를 품은 이기도 하죠."


그 말에 안톤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환시를... 품은 이라뇨?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즈는 스스로도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자각했다. 결국, 보여주는 편이 빠르다고 판단한 그녀는 아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공, 그 물건을 보여주세요."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서 환시의 등불을 꺼냈다. 등불은 작게 깜빡이더니 곧 희미한 빛을 머금으며 부드럽게 깨어났다. 빛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느리게 흔들리며 방 안을 한 차례 훑고는 아주 천천히 북쪽 어딘가를 향했다.


"이건......"


안톤이 숨을 삼키듯 중얼거렸다. 시선이 따라간 방향은 다름 아닌 시스테나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다시 아로스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분은... 도대체......?"


"죽음의 강기슭에서 돌아온 이입니다. 언령이 말한 전사라고도 불리죠."


시즈는 안식 교회의 언령을 읊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은 전사의 생명이 다시 타오르고,

침묵의 대지가 길을 속삭이면 헤매던 발걸음은 운명을 마주하리라.

부서진 어머니의 심장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게 되면,

사선에서 돌아온 이가 새로운 시대를 영접하리라."



언령의 구절이 시즈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방 안은 더욱 깊은 정적에 잠겼다. 등불의 빛만이 천천히 떨리며 그 의미를 되새기듯 벽에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안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등불과 기사를 번갈아 보았다. 이것은 희망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기만인가. 하지만 저 등불의 빛과 눈앞의 기사의 존재감은 외면하기엔 너무도 선명했다. 마치 잊고 있던 기도가 되살아난 듯한 착각 속에서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조심스레 감았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 방 안에서 울려 퍼진 언령은 단순한 예언의 조각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인물이 그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한 줄기 의심, 한 점 불안,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꿰뚫고 들어온 말할 수 없는 믿음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기사가 언령이 말하는 전사라면, 이 안개의 땅에도 작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던 안톤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날이 밝는 대로 시스테나 교회로 향할 계획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그렇군요......"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시즈가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혹시 안톤 님께서는 '생명의 숲'에 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파수꾼이 잠든 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생명의 거인이 잠든 곳에서는 어떤 병도 치유된다고 하지요.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입니다."


"헌 님이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분도 이곳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낸 것 같던데요."


"맞습니다. 그 친구가 아내를 위해 생명의 숲을 찾고 있다는 것은 마을사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안톤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본래 약초학에 대한 지식이 아주 깊습니다."


"약초학 지식이요?"


시즈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예. 처음 만났을 때, 제게 낯선 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잎 뒤가 희고 씁쓸한 향이 아주 짙은 풀이라는데, 고향에서는 웬만한 병은 그걸로 다스린다 했죠. 그런데 이 땅엔 어째서 보이지 않냐고 신기해하더군요. 평생을 약초를 다뤄온 저도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안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씁쓸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렇게 현실적인 치료법을 알던 친구가, 이제는 그 풀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득한 전설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니... 운명이란 참 얄궂지요."


시즈는 고개를 살짝 떨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안톤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저희도 처음엔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약도 써보고, 치료도 시도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전설에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은 저도 이해합니다. 사실 저 또한 그 전설에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낮에 보셨다시피, 이 마을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사로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요. 그래서 저도 가끔, 아주 가끔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뒷산을 오르곤 합니다. 물론, 매번 허탕을 치지만 말입니다."


"헌 님은 뒷산뿐만이 아니라 이 주변 일대를 거의 다 뒤져봤다 하시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내의 상태를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만큼 필사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안톤의 말에는 단순한 의사의 감정이 아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웃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시즈는 안톤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연스레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안톤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애석한 일이지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무녀님께서 너무 마음에 두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친구도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를 찾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그때, 문 밖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몇몇 주민들이 나타났다. 그중 한 노파가 시즈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주름진 얼굴 위에 번지는 미소에는 어딘지 모를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아이고 무녀님, 여기 계셨네요. 저희는 여명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내일 새벽 기도를 드리실 때 저희도 함께 해도 될지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물론이에요, 어르신. 부담 가지지 마세요. 내일 새벽, 시간에 맞춰 제가 머무는 여관으로 와주세요."


노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고, 다른 주민들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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