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4)

망루 위에서

by 이샤라

오르드는 눈앞의 필멸자에게서 희망의 가능성을 본 동시에, 그의 어깨에 짊어진 가혹한 운명의 무게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더는 우리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다.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졌으니 말이지. 이제부터 나와 철기장 들은 관문을 재건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트마에서 각인을 되찾아 와야 한다."


"제가 그를 돕겠습니다."


조용히 나선 이는 아마룬이었다. 그러나 오르드는 곧바로 손을 들며 부정의 제스처를 보였다.


"안된다. 파괴된 관문을 엘나 없이 재건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장 이곳에 있는 거인들만으로도 일손은 모자랄 지경이야."


오르드는 원탁에 있는 모든 이들을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이 회합은 여기까지다. 용광로로 돌아가서 각자 맡은 자리를 정비한 뒤 관문을 재건할 작업을 준비해라. 내일부터 바로 시작될 것이다."


무거운 바위처럼 앉아 있던 거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소리 없는 걸음에서는 등불의 빛이 남긴 여운의 무게가 조용히 묻어 나왔다. 그리고, 오르드는 마지막으로 아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일 아트마로 떠나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도시에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라."


그 짧은 말은 명령이라기보다 조용한 배려에 가까웠다. 아로스는 오르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몸을 돌려 등불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아로스도 회합장을 벗어나려는 순간, 멀찍이 자리했던 노아가 조용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급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건넬 이야기가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귀공, 정말 오랜만입니다."


노아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묻어난 정제된 인사에 아로스는 말없이 그 시선을 마주 보기만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노아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회합장은 마음 편히 이야기 나눌 장소가 아니에요. 잠시 저를 따라와 주실 수 있나요?"


아로스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는 그를 인적이 드문 탑의 작은 망루로 이끌었다. 오래된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선 둘은 말없이 탁 트인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그니카의 불빛이 안개처럼 깔린 황혼 속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어엿한 사제가 되셨군요.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제법 잘 어울립니다."


"그... 그런가요?"


노아는 부끄러움과 당황이 섞인 미소와 함께 말투가 풀어지면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다시금 아로스를 향해 정면으로 마주한 그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자리가... 생각보다 무거워요. 수천 명의 시선과 기대를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때가 많았죠. 하지만... 문득 형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조차 더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고 있을 두 분을 떠올렸어요. 그래서, 저 또한 이 정도에 무너지지 않겠노라 마음을 다잡게 되었죠."


노아의 고백을 조용히 들은 아로스는 말없이 시선을 남서쪽으로 돌렸다. 창은의 강이 있을 리마 산맥 저 너머에는 여전히 시즈의 기척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 눈빛에 스친 슬픔과 근심을 읽은 노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회합장에 들어오셨을 때부터 묻고 싶었어요. 무녀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아로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은 없었고, 그 침묵이 더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노아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제발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요? 무녀님께—"


"...공허의 신도들에게 사로잡히셨습니다."


순간, 노아의 손끝이 떨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에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시야가 잠시 멀어졌다. 심장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아로스의 표정이 너무 낯설고 무거웠기에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위로하고자 다가가려 했음에도 아로스는 손을 들어 그 움직임을 조용히 막았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아로스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내면 어디선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제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아직은 완전히 지배당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그 감정이 때때로 저를 휩쓸어 버립니다. 저도 모르게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


노아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아로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등을 돌려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등 뒤로 들려오는 한숨은 길고 깊었고,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안타까움, 무력감,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어진 인연에 대한 먹먹한 책임감.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로스는 노아의 기척이 망루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형체 없는 죄책감은 여전히 바위처럼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감정은 마치 자신의 몸 안 어딘가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로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만이 머무는 이 작은 탑에서, 그는 아주 오랜만에 긴 고뇌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망루의 그림자는 더 이상 길게 드리워지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은 멀어졌고, 찬 기 어린 밤바람이 석벽을 타고 내려와 어깨를 적셨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도 마음은 자꾸만 회합장의 기억으로 되돌아갔다. 감정이 극에 달해 오고 갔던 고성들, 앞으로 있을 여정의 무게. 가라앉지 못한 그 모든 파편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순간 더더욱 선명히 떠오른 사람.


시즈. 그녀는 칼날보다 날카로운 말들이 엉키는 자리에서도, 마치 감정을 끌어당기듯이 잠깐의 숨결 하나만으로 균형을 되돌려놓곤 했다. 그러나 지금 시즈는 곁에 없다. 그것은 가슴을 조여 와 고통이 되었고, 그 고통으로 인해 차라리 잠에 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식의 흐름을 잠시라도 놓아버릴 수 있다면 흐트러진 감정의 조각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염없이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머리 위로는 어스름한 새벽빛이 조금씩 걸쳐지고 있었다. 새벽바람이 옷깃을 스치자 벨트에 묶어둔 찢어진 옷자락이 덩달아 바람에 흔들렸다. 옷자락에서는 아직도 시즈의 체온처럼 남은 감각이 희미하게 머물렀다.


그때,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다가왔다.


"어딜 갔나 했더니, 이곳에 있었군."


망루 위로 올라온 것은 아마룬이었다. 온몸에 묻은 숯검댕이와 검게 그을린 작업복은 밤새도록 대장간에 머물렀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노아도 참, 여기로 갈거라 미리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는 곳을 뒤지느라 시간낭비 했구만. 얼른 내려오지 그래.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말이야."


"어딜 말입니까?"


"뭐긴 뭐겠어? 아트마로 가기 전에 들어야 할 설명이겠지. 나 원, 바쁜 와중에 전령 노릇까지 하게 만들다니. 이래서 누군가를 찾으러 다니는 일은 질색이야."


툴툴거리는 아마룬의 뒤를 따라 아로스는 조용히 망루를 내려왔다. 두 사람은 성벽을 가로질러 도시 서쪽의 거대한 성문 앞에 도착했다. 아마룬이 손짓에 대기하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치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순간, 성문은 묵직한 굉음을 토해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성문 밖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서는 오르드가 팔짱을 낀 채 분쟁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그니카와 아트마 사이에 펼쳐진 거대한 분쟁지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뻗어있는 전장은 다른 의미로 처참했다. 파도의 악마들과는 무관한, 오로지 안개의 땅의 종족들 간에 이뤄진 전쟁. 땅에는 거대한 바위가 떨어진 듯한 구덩이들이 흉측하게 뚫려 있었고, 그 안에는 시신과 불꽃의 잔해,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기스러운 병기들의 잔해로 가득 메꿔져 있었다. 병기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말이 끄는 수레와 같은 모양의 날카로운 전차, 바퀴가 달려 움직일 수 있는 이동장치 위에 구멍이 움푹 파인 기다란 원통을 얹은 기묘한 구조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거인의 형상을 닮은 강철로 만든 골렘이었다.


"저게 전부 대체 뭡니까?"


"이그니카에서 개발했던 전쟁병기들이다. 지금은 아트마에서도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지. 저 병기들은 전부 운철 각인을 이용해서 만든 것들이다. 하나같이 전부 파괴적인 무기들이라 그 위력은 신과 거인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어쩌면 용조차도 말이지."


아로스는 회합장에서 보았던 거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단단한 신체 위로 남아있던 균열 자국과 이질적인 상흔들. 그 흔적은, 눈앞의 전장에 흩어져 있는 전쟁병기들이 남긴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 맡길 임무는 그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각인을 되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


오르드는 먼 서쪽을 바라보았다.


"하카르... 불같은 성미를 가진 그 어리석은 친구는 한때 나와 모든 것을 함께했던 형제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이곳에서 벼락을 내리칠 때면, 놈은 언제나 서쪽에서 폭발음을 일으켜 답을 하곤 했지. 그것이 우리가 나누는 유일한 대화였다. '나 또한 건재하다'는 오만한 과시였지."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반년 전부터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회합 전에 이곳에 내리쳤던 벼락에도 서쪽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어. 하카르는 그런 놈이 아니다. 전쟁에 염증을 느끼거나 내부 반란 따위에 휘둘릴 위인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등지고 아트마를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침묵이... 나는 폭발음보다 더 두렵다."


그때, 성문으로부터 노아가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급했는지, 사제복조차 입지 않은 평소의 의사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을 본 오르드는 못마땅한 듯이 그를 질책했다.


"아직도 그 옷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사제로서의 기품을 유지하는 것은 시민들의 시선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그리 당부했거늘, 무슨 생각으로 그런 꼴로 나온 거지?"


"벌... 벌써 떠나셨을까 해서... 후아... 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랬습니다. 귀공, 이걸 받으세요."


정신없이 달려온 노아는 숨이 찼는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숨을 고르고 나서 안정을 되찾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하얀 천에 감싸인 무언가를 아로스에게 건넸다. 그것은 잘게 다져놓은 열매가 담긴 병이었다.


"물푸레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만든 연고예요. 불과 화약으로 인해 생긴 상처에 효과적이죠. 귀공께서는 워낙에 강인하시니 쓰실일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지난밤에 만들었어요."


"신전에도 안 가고 어디 갔나 했더니, 또 몰래 밖으로 나간 거였구만."


아마룬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드 또한 한소리 하려는 듯 보였지만 이유가 있었던 그의 행동을 듣고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잘 챙겨놔라. 저 앞은 매설된 폭약으로 가득하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아마룬의 짧은 경고 뒤로, 아로스는 말없이 병을 받아 들었다. 작은 병 속의 온기는 하루 내내 흔들렸던 감정의 파편을 조용히 정돈시켜 주는 듯했다.


"사제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의사의 모습이 가장 당신 답군요."


그 말에 노아는 살짝 당황했다. 이미 사제라는 자리에 올라 있었고, 바로 앞에 있는 오르드에게서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르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고, 아마룬 또한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노아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 말이 틀렸냐?'라는 표정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틈에, 오르드는 아로스를 향해 아까 끝내지 못했던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분쟁지역을 전부 건너가면 거대한 산맥이 보일 것이다. 산맥 아래를 자세히 찾아보면, 지하로 이어지는 틈이 있다. 그곳이 아트마 요새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리고 명심해라. 아트마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폐허가 된 요새가 아닌 거대한 무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운철 각인을 되찾아 와야 한다. 너의 손에 수많은 이들의 미래가 달려있다."


아로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그의 결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곧이어 언덕 아래, 폐허처럼 펼쳐진 분쟁지역으로 그의 그림자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아는 두 손을 모아 마음속으로 기도했고, 아마룬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내면 어딘가가 삐뚤어져 있긴 하지만, 전선에서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정말 괜찮을까요? 무녀님마저도 곁에 계시지 않은데......"


"그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좋아질 것도 없으니 그냥 믿어줘라. 그게 저 놈을 위한 길이야."


아마룬의 말에, 노아는 아로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르드는 아무 말 없이 먼 시선을 아트마를 향해 고정했다. 아침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짙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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