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11)

희생

by 이샤라
제목 없음-2.jpg 심연에 잠식된 아로스


음험한 존재가 속삭인 심연의 힘이 아로스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위치한 가슴 중앙에서부터 검은 핏줄이 살아있는 것 마냥 피부를 뚫고 솟아나듯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세상이 잿빛으로 변했다. 모든 색과 소리가 의미를 잃고, 오직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주스러운 존재만이 칠흑빛 불꽃으로 불타올랐다. 거대한 턱이 그의 머리를 으스러뜨리기 위해 덮쳐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였다. 그의 손이 닫히는 턱의 안쪽을 아무렇지 않게 붙잡더니 수백 겹의 이빨과 단단한 턱뼈가 손아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끔찍한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울루니아는 당혹감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아로스는 붙잡은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하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가볍게 들어 올려 반대편 암벽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콰아아아앙————


광산 전체가 울릴 듯한 충격과 함께 거대한 몸뚱이가 암벽에 처박혔다. 방금 전까지 아로스를 유린하던 압도적인 포식자는 이제 무력하게 벽에 처박힌 채 경련할 뿐이었다. 아로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온몸에서는 검은 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고, 텅 빈 눈동자는 오직 눈앞의 사냥감을 향한 본능으로 이글거렸다.


벽에 처박혔던 울루니아는 몸을 일으키며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몸짓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격렬한 살의를 담고 있었다.


"키이이이이——아아아아아아아아———!!"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날것의 비명과 함께 놈은 아로스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하지만 그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놈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존재의 본질을 깨달았다. 아로스의 온몸을 휘감은 검은 증기는 단순한 힘의 폭주가 아니었다.


맹렬했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주춤했다. 분노는 이해할 수 없는 경악으로, 맹목적인 살의는 원인 모를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눈앞의 필멸자는 분명 하찮았으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제 본능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된,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상위 포식자의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흉포한 돌진은 망설임으로 변했다.


아로스는 그 찰나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울루니아가 다시 기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아로스의 그림자가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끔찍하게 벌어진 아가리를 한 손으로 틀어쥔 채 그대로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수차례 내리꽂았다.


단단한 돌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박살 나는 충격에 놈의 몸이 움찔하며 경직되었다. 아로스는 놈의 몸 위로 올라탄 뒤 으스러진 턱을 강제로 벌려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을 목구멍 가장 깊숙한 곳까지 쑤셔 넣었다. 손끝으로 몸의 모든 신경과 연결된 듯 역겹게 꿈틀거리는 거대한 힘줄 뭉치가 잡히자, 아로스는 그것을 무자비하게 잡아 뜯었다.


뿌드드드득————


"까아아아아아아아아———!!"


마지막 비명과 함께 끔찍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아로스의 손에 뽑혀 나온 새까만 힘줄 뭉치에서는 검은 액체와 장기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몸의 중심을 잃은 거대한 육신은 바람 빠진 가죽 부대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져 내렸고, 그 자리에는 검은 피웅덩이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끔찍한 잔해만이 남았다.


텅 빈 눈동자는 곧바로 다음 사냥감을 찾아 어둠 속을 훑었다. 그 시선 끝에, 바닥에 퍼져나갔던 불길한 기운이 한 곳으로 모여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처참히 무너진 잔해를 향한 두 번째 울루니아의 분노가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귀를 찢는 비명은 없었으나 주변의 모든 것을 갈아버릴 듯한 침식의 오라가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뿜어져 나오며 아로스를 향해 쇄도했다. 소리와 빛, 공기마저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침묵의 파도가 그를 덮쳤다.


하지만 아로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을 감싼 검은 증기가 두 번째 울루니아의 기운과 부딪히자, 오히려 침식의 오라가 불나방처럼 타들어 가며 밀려났다. 당혹감이 채 번지기도 전에 아로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이미 울루니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아로스는 무감정한 움직임으로 놈의 몸을 붙잡아 저항할 틈도 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쏟아부었다. 몇 번의 타격 만에 울루니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아로스는 숨통을 끊기 위한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검을 집어 들었다. 손이 들어 올려지는 그 찰나, 어둠 속에서 날아든 칼등이 그의 손목을 정확히 후려쳤다.


카강———


예상치 못한 충격에 아로스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쥔 검을 놓치고 말았다. 방해꾼을 향해 짐승 같은 적의를 돌리는 순간 에드바르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려 했지만 에드바르는 그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 보 옆으로 비껴서며 피했다.


"멍청한 놈!"


에드바르의 거친 일갈과 함께 묵직한 주먹이 아로스의 안면을 강타했다. 연거푸 쏟아지는 무자비한 주먹질에 고정 장치가 비틀리던 투구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초점을 잃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아로스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신 차려라! 지금 휘두르는 힘이 정녕 네 것인 줄 아느냐!?"


에드바르는 윽박지르며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러 아로스의 고개를 꺾어놓았고, 그 반동을 이용해 아로스의 가슴, 검은 핏줄이 시작된 바로 그 중심부를 향해 손바닥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크... 아아아아악......!"


아로스는 신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몸 안에서 두 개의 힘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격렬한 파동에 온몸이 발작하듯 경련했다. 에드바르는 쓰러진 아로스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고 그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똑똑히 봐라! 그 힘의 끝에 있는 게 무엇인지 보고 싶나? 바로 나다! 이 끔찍한 모습이 바로 네놈이 맞이할 미래란 말이다!"


에드바르는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절규하며 자신의 망가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흉악한 힘으로 정말 그 여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 믿나? 괴물이 되어버린 네가 그녀 앞에 서겠다고? 너는 구원이 아니라 그녀가 평생을 고통받을 악몽 그 자체가 될 뿐이다!"


깨져버린 과거의 거울을 마주한 듯했다. 절망의 끝에서 살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붙잡았던 기이한 힘은 구원이 아니라 저주였다.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과 손등에 새겨진 낙인을 통해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 힘의 대가는 구원이 아닌, 소중한 이들마저 파멸로 이끄는 비참한 말로라는 것을.


에드바르가 아로스를 흔들며 소리치는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스산한 기운이 덮쳐왔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울루니아가 두 사람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에드바르는 망설임 없이 아로스를 밀쳐내고 몸을 돌려, 홀로 그 공격을 막아섰다.


그 사이, 아로스의 의식은 깊은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그곳은 끝없는 어둠의 바다였다. 사지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여 심해를 향해 가라앉고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차가운 목소리가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보아라. 이것이 힘이다. 저항하지 마라.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 위에 군림하라......!」


아로스는 발버둥 쳤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에드바르의 외침이, 시즈의 이름이 의식의 표면을 두드렸다. 괴물이 되어서 그녀의 앞에 설 셈이냐는 말 한마디가 가라앉던 그의 영혼에 채찍질을 가했다. 아로스는 필사적으로 어둠에 저항하며, 자신을 옭아맨 쇠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편, 홀로 울루니아와 맞서고 있던 에드바르는 놈을 아로스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의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격 속에서 단 한순간을 미처 피하지 못한 에드바르는 그대로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울루니아는 여전히 내면의 어둠과 싸우고 있는 아로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에 에드바르는 망설임 없이 부서진 몸을 둘 사이에 몸을 던졌다. 놈의 상체에서 수십 개의 뼈 창살이 가시처럼 돋아나더니 에드바르의 상반신 전체를 단번에 꿰뚫었다.


"커... 헉......!"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에드바르의 몸은 마치 가시나무에 걸린 누더기처럼 허공에 들렸다. 바로 그 광경이 아로스의 의식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정신이 돌아온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수십 개의 뼈 꼬챙이에 꿰뚫린 채 피를 토하는 에드바르의 모습이었다.


"......!"


격노가 이성을 집어삼켰다. 아로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검을 집어 들며 짐승과 같은 포효와 함께 울루니아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에드바르를 내팽개치고 아로스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로스의 검은 칠성장어 같은 원형의 주둥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온 힘을 다해 검을 더 깊숙이, 더 안쪽으로 밀어 넣자 놈의 몸 안에서부터 무언가 으스러지고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부터 완전히 파괴된 그것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거대한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며 쓰러졌다.


아로스는 쓰러진 괴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급하게 에드바르에게 달려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에드바르를 자신의 무릎에 받쳐 안았다. 에드바르는 이미 죽기 직전이었고, 거친 숨만이 그의 가슴을 희미하게 들썩이게 할 뿐이었다.


"...헉... 허억...... 꼴... 사납군......."


에드바르는 피 섞인 숨을 내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아로스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나는... 결국... 사명도... 소중했던 것도...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이 망가진 세상은... 결국......"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입안에서 검붉은 피가 끓어오르듯 쏟아져 나왔다. 아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에드바르는 떨리는 손으로 아로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마라......."


최후에 가까워진 눈빛은 필사적이었다.


"...그것이... 너와...... 그녀... 모두를 위한 길......."


마지막 말을 끝으로, 에드바르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로스를 붙잡고 있던 눈빛은 빛을 잃고, 거친 숨소리마저 멎었다. 자신처럼 되지 말라던 그의 마지막 외침은 차가운 정적 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르프록스 산맥의 북쪽 끝자락, 깎아지른 절벽 위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는 불의 장벽이 세상을 가르는 붉은 상처처럼 여전히 불길하게 타올랐다. 베리엘은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뒤로는 스무 명 남짓의 불의 사제들이 미동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화약고처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때, 산 아래에서 힘겹고 부자연스러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을 참는 짧은 신음과 함께 억지로 날개를 붙인 익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일족의 원로인 하이넬이었다. 착지의 충격 때문인지 그의 날갯죽지에서는 검붉은 피가 살짝 배어 나오자, 베리엘은 그를 돌아보며 질책과 더불어 깊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리하게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몸을 아끼셔야지요."


"늙은이 몸 하나 부서지는 것이 뭐가 대수겠나. 염려 마시게."


하이넬은 짐짓 덤덤하게 답하며 베리엘의 곁에 섰다. 그는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불의 장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붉게 타오르는 그 빛이 오래 전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50년만인가. 정확히 이 자리였지. 비겁한 간계에 휘말려 저 아래로 떨어졌던 날 말일세. 죽어가던 나를 붙잡아준 어느 인간 의사의 손길이 아직도 엊그제 같구만. 그때 깨달았지. 피로 얼룩진 증오보다도... 생각지도 못한 것이 때로는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베리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바닷가에 날아온 거친 바람만이 두 사람 사이를 공허하게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수장... 이제 곧 모두가 이곳을 떠날 걸세. 지금이라도 함께 가면 안 되겠나? 복수는... 이제 그만두어도 되지 않겠나. 그 몸으로 떠나면 분명히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게야."


하이넬이 베리엘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의 장벽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닫힌 부리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씁쓸한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베리엘의 얼굴에는 본래의 책임감과 점점 이성을 집어삼켜가는 증오 사이의 마지막 고뇌가 스쳐 지나갔다.


"복수는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네. 나는... 일족 대대로 얽혀 내려온 증오가 자네를 집어삼킬까 두렵네. 부디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청이라 생각하고, 이제 그만 망령된 불길에서 발길을 돌려줄 수는 없겠나."


그러나 침묵은 그 어떤 대답보다 무거웠다. 원로의 손을 조용히 내려놓은 베리엘의 눈빛에는 더 이상 고뇌가 아닌,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파괴의 불꽃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베리엘은 아무 말 없이 불의 사제들을 향해 손짓했고, 그들은 묵묵히 주인의 뒤를 따랐다.


하이넬은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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