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온정, 엇갈린 발길 (2)

신계를 향한 준비

by 이샤라

"이봐, 정신 차려라. 네놈 눈엔 지금 뭐가 보이나?"


여전히 말이 없는 아로스의 눈동자는 환영이라도 보는 듯 허공의 한 지점을 향해 날카롭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은 아마룬은 직접 아로스를 살피기 위해 다가갔다. 망가진 갑옷을 벗겨내고 상태를 확인하려는데 그의 왼손이 유독 굳게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피와 먼지로 뒤엉킨 손아귀 틈새로 너덜너덜해진 검은 천 조각 같은 것이 삐져나와 있었다. 아마도 전투 중 찢겨 나간 망토나 옷자락의 일부를 고통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켜쥔 듯했다.


"이건 뭐야? 손 좀 펴봐."


아마룬이 억지로 손을 펴보려 했지만 아로스는 마치 생명줄이라도 쥔 것처럼 뿌리치며 거칠게 저항했다. 멍한 눈동자 속에서도 그것만은 뺏기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집착이 서려 있는 그 모습에 아마룬은 혀를 차며 손을 거두었다.


"독한 놈. 그래, 알았다. 네 맘대로 해라."


바로 그때, 육중한 봉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노아와 아마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몸이 검댕과 먼지로 뒤덮인 오르드의 모습이었다. 그의 거대한 몸에서는 여전히 식지 않은 열기와 금속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그의 시선은 오직 아로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르드는 방 안의 침묵이나 아로스의 상태를 살피는 기색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운철 각인은 가져왔는가?"


여전히 반응이 없던 아로스를 대신하여 노아가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검은 정육면체를 꺼내 보였다. 오르드는 그것을 확인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비로소 아로스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텅 빈 눈동자와 멍한 표정, 그리고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불길한 검은 흔적까지. 처음 이그니카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기운의 정체가 눈앞에 있었다. 오르드는 그 흔적이 단순한 오염이 아닌 영혼에 새겨진 낙인임을 직감했다.


오르드는 잠시 침묵했다. 가면 아래에서 어떤 생각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아로스에게서 시선을 떼며 아마룬과 노아를 향했다.


"시간이 없다. 환시를 품은 이에게 깃든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것을 정화할 시간 따위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지. 저 다리가 신계에서 쏟아지는 열기를 언제까지고 버텨주지는 못한다."


노아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뭐라구요? 저 상태로 보냈다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저건 단순한 상흔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라고 모를 것 같으냐!"


오르드의 일갈에 봉쇄실 전체가 울렸다. 그의 결단은 비정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시간마저 촉박하지. 철기장들이 달려들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고 있음에도 다리는 불의 힘을 오래 견딜 수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단 말이다."


오르드는 다시 아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준비해라. 그대는 지금 당장이라도 신계로 향해야 한다."


비정한 신의 선언에 아마룬이 엎드리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단 하루! 제게 하루의 시간만 주십시오!"


단호한 거인의 태도에, 오르드의 시선이 바닥에 고개를 박고 있는 아마룬의 모습을 짧게 스치듯 지나갔다. 그의 가면 아래로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이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다. 하지만 그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마룬은 봉쇄실 바닥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갈가리 찢겨진 아로스의 갑옷 잔해 더미로 다가갔다. 엉망이 된 파편들 속에서 아마룬이 찾던 것은 시스테나 전선에서 자신이 직접 아로스에게 만들어주었던 왼쪽 어깨 갑주였다. 기적처럼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것은 두 사람의 짧지만 강렬했던 인연의 증표와도 같았다.


갑주를 챙긴 아마룬은 노아에게 아로스를 부탁한다는 짧은 눈짓만 남긴 채 봉쇄실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신들의 용광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용광로 내부는 창조의 숨결의 근원답게 숨 막히는 열기로 가득했다. 시뻘건 불길이 거대한 화로 속에서 포효하듯 타올랐고, 공기는 금속이 녹아 흐르는 뜨거운 숨결로 가득 차 있었다. 맹렬한 열기에도 아마룬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공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모루 앞에 섰다. 그는 먼저 가져온 미완성 상태의 갑옷을 용광로의 불길 속에 집어넣어 강철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시뻘겋게 달궜다.


이윽고 망치가 들리면서, 용광로 전체가 울릴 듯한 굉음이 규칙적인 리듬을 타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캉— 캉— 캉—


그것은 단순한 망치질이 아니었다. 거인의 혼이 담긴 망치질이자, 전우를 향한 간절한 염원이었다. 도시 남쪽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다리 건설이 세상을 향한 의지의 표명이라면, 지금 이곳의 망치 소리는 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필사적인 기도와 같았다. 쇠를 달구는 불꽃의 열기가 그의 온몸을 적셨고, 망치가 부딪힐 때마다 터져 나오는 불꽃은 그의 결연한 눈빛을 밝혔다.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그의 거친 숨결과 함께 모루 위의 강철 속으로 대지의 고동 같은 희미한 기운이 스며드는 듯했다. 밤새도록 쇠를 두드리고, 식히고, 다시 달구기를 멈추지 않았다.


땅거미가 저물 무렵, 마침내 갑옷이 완성되었다. 아마룬은 마지막으로 아로스의 왼쪽 어깨 갑주를 집어 들어 마지막 심장을 이식하듯 새로운 갑옷의 왼쪽 어깨 부분에 정성스럽게 결합시켰다. 두 전우의 인연이 하나의 갑옷 위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갑옷을 완성한 아마룬은 자신의 등 뒤에 매고 있던 거대한 전투 도끼를 집어 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던 분신과도 같은 무기였으나 그는 망설임 없이 도끼의 머리 부분을 용광로의 가장 뜨거운 불길 속에 찔러 넣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도끼날을 모루 위에 올려놓은 그는 다시 한번 망치를 들어 올렸다. 창조가 아닌 파괴를 위한 망치질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을 베고 나아갈 새로운 칼날일 터. 그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웅일 테니.


쾅—— 콰직—


거대한 도끼날이 두 동강 나며 불꽃과 함께 파편을 쏟아냈다. 아마룬은 부서진 도끼날 중 더 크고 날카로운 부분을 집어 들어 다시 불길 속에서 벼리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 위로 망치가 내리쳐질 때마다 별빛처럼 눈부신 불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거인의 염원이 담긴 불꽃은 쇠의 마지막 숨구멍까지 파고들었다. 파괴의 상징이었던 도끼는 이제 어둠을 베고 나아갈 전우를 위한 검의 형태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용광로의 불길이 새벽빛을 삼킬 듯 타오르자, 마침내 마지막 담금질이 끝났다. 완성된 갑옷과 대검을 들고 봉쇄실로 돌아온 아마룬의 거대한 몸에서는 여전히 용광로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표정에는 밤샘 작업의 고단함과 함께 전우를 위한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입어라."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마룬은 묵묵히 갑옷과 검을 아로스 앞에 내려놓았다. 노아는 본능적으로 그 장비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갑옷에서는 단순히 잘 만들어진 강철의 느낌을 넘어서 대지의 숨결 같은 희미하고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로스는 여전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이내 그의 시선은 새로운 갑옷의 왼쪽 어깨에 결합된 익숙한 문양에 잠시 머무르는 듯했다.


노아는 말없이 아로스에게 다가가 밤새 완성된 새로운 갑옷을 입는 것을 조심스럽게 도왔다. 차가운 흉갑이 가슴을 덮으려던 찰나에 아로스의 미간이 아주 희미하게 찌푸려지면서 움켜쥔 주먹이 살짝 떨렸다. 그는 밤새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은 천 뭉치를 아주 잠깐 풀어헤치더니 천 안에 감싸여 있던 무언가를 새로 입혀지는 갑옷 안쪽 깊숙한 곳으로 아무도 모르게 밀어 넣었다. 그것은 심장과 가장 가까운 품 속에 조용히 숨어들었다. 그리고 남은 검은 천 조각은 거칠게 동여매어 허리춤에 단단히 묶었다.


마지막으로, 아마룬은 자신의 분신을 녹여 만든 대검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손잡이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자, 아로스는 손에 느껴지는 미세한 무게 중심과 균형만으로도 이 검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텅 비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면서 천천히 제련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검날을 향했다가 이내 말없이 아마룬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아마룬은 놀랐냐는 듯 입가에 피식하는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씁쓸하면서도, 무언가 통한 듯한 미소였다.


짧은 교감이 오가는 사이, 육중한 봉쇄실의 문이 열리면서 땀에 절은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섰다.


"오르드 님의 전갈입니다! 지금 즉시 그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전령의 외침이 봉쇄실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신의 마지막 통보였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 배웅을 위해, 세 사람은 비장한 침묵 속에서 함께 봉쇄실을 나섰다.


다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숨 막히는 열기가 폐부를 태울 듯이 덮쳐왔다. 하늘 위의 신계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불의 폭포가 눈앞의 다리를 끊임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무너진 도시의 잔해들을 억지로 쌓아 올린 다리는 그 파괴적인 열기를 이기지 못한 채 곳곳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바위의 갈라진 틈새로는 내부의 용암이 핏줄처럼 번뜩였다.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도 거인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함성이 파도처럼 울려 퍼졌다. 지나친 불길에 노출된 그들의 바위 같은 피부는 온통 숯검댕이로 뒤덮인 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두에는 온몸에 선명한 화상 자국이 가득한 오르드가 다리의 하중이 무너지지 않도록 신의 권능을 담아 쉴 새 없이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때, 아로스를 발견한 오르드가 망치질을 멈췄다. 그의 신호에 거인들도 일제히 물러섰다. 오르드가 짧게 손짓하자, 아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노아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다급히 따라붙으려 했지만 살을 태우는 열기에 가로막혀 더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아로스!"


노아의 절박한 외침에 아로스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스치는 듯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아주 찰나의 표정.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로스는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려 오르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아마룬은 그런 노아의 어깨를 말없이 붙잡았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오르드는 다리 앞에 도착한 아로스를 내려다보며 가면 아래로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하루 만에 빛나는 잿빛 갑옷과 대검으로 완벽하게 재무장한 모습에 그는 아마룬의 솜씨에 내심 감탄하며 나직이 말했다.


"이 열기 속에서도 버텨내는 것을 보니, 그 거인이 제 분신이라도 녹여 넣은 모양이군."


오르드는 아로스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 보며 물었다.


"준비는 되었나?"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리 가운데로 가서 서라."


아로스는 오르드의 말에 따라 다리 중앙으로 향했다. 발을 딛는 순간, 그는 바닥에 자신들을 내려다보던 신들의 가면 형상을 띈 거대한 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머리 위로는 구조물의 네 갈래 틈새로 노란 전격이 불꽃을 튀기며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오르드는 다리 입구에 놓인 거대한 모루 위로 운철 각인을 올려놓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거대한 망치를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쿠르릉—— 콰아아아아앙—————


하늘을 찢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벼락이 모루 위로 직격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모루가 바닥 아래로 쑥 꺼져 들어간 동시에, 벼락의 힘을 머금은 바위 타일들이 하전 되듯 황금빛 뇌격을 터뜨리며 다리 중앙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아로스가 서 있던 문양 위로 네 갈래의 전격이 폭발하듯 솟구치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빛기둥으로 합쳐져 하늘로 치솟으며 그의 형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빛이 사라진 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로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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