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아로스는 할 말을 잃었다. 시즈의 눈빛 속에서, 이것이 단순히 공포 때문이 아닌 그녀 스스로 내린 깊은 절망과 체념의 결정임을 깨달았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결심을 되돌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로스는 고통스럽게 직감했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신이 품었던 차가운 배려가 결국 그녀를 지키지 못하고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은 것만 같았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밀어냈는데, 결국 그녀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부서져 버렸다.
"...정말... 이 길 밖에 없는 겁니까?"
그 힘겨운 물음에 시즈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려는 듯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것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던 그녀의 눈빛은 '이것이 당신과 나를 위한 최선'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로스는 더 이상 시즈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의지를 꺾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결국 그는 타오르는 이그니카와 그녀 사이에서 시선을 떨궜다.
"...알겠습니다."
낮은 목소리에는 억눌린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부디... 무사하시길."
그 말을 끝으로, 아로스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검을 고쳐 쥔 채 불타는 이그니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어쩌면 지금 느껴지는 이 고통스러운 상실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몰랐다.
시즈는 멀어져 가는 아로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어느 때보다 무겁고 고독해 보였다. 그가 한 걸음씩 멀어질 때마다 시즈의 심장도 한 조각씩 뜯겨나가는 듯했다. 찢겨진 망토 자락을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렸고, 되살아난 과거의 온기와 현재의 시린 고통이 뒤섞여 내면을 갈가리 찢어놓는 듯했다. 차라리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검게 타버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듯, 비는 순식간에 장대비로 변했다. 아로스의 모습이 빗줄기와 자욱한 연기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애써 감정을 억눌렀던 가면이 벗겨지며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무너져 내리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죽여 울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눈물과 뒤섞였다. 빗물은 그녀의 찢긴 옷자락과 상처 입은 피부를 사정없이 때렸지만 시즈는 이 빗줄기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그 역겨운 흔적들을, 씻어낼 수 없는 비참한 기억들을 전부 쓸어내 가주길 바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밤하늘로부터 날카로운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을 뒤덮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나타난 존재는 생명의 숲에서 만났던 거대한 독수리, 알리베라였다. 알리베라가 발치에 조용히 내려앉아 거대한 몸을 낮추자, 시즈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슬픔을 위로하듯, 칠흑 같은 눈동자가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알리베라의 등에 천천히 올라탄 시즈는 그의 몸에서 기묘하고도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생명의 숲에서 느꼈던 정화의 힘. 희미했지만, 그것은 잠깐이나마 상처로 얼룩진 시즈의 몸과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빗발이 그녀의 눈물을 씻어내듯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이제 그녀가 돌아갈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거대한 날개가 밤의 장막과 눅눅한 빗줄기를 가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알리베라는 지체 없이 구름 너머, 아우로라가 있는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세차게 쏟아지던 비는 어느덧 발밑의 구름 아래로 가라앉았고, 시즈의 눈앞에는 차갑고 고요한 밤의 바다가 펼쳐졌다. 검푸른 하늘 위에는 날카롭게 잘려 나간 듯한 반달이 홀로 떠 있었다. 시즈는 그 이지러진 달의 형상을 멍하니 응시했다. 가득 차오르지 못한 채 절반만 남은 저 빛이, 마치 아로스를 떼어내고 누더기처럼 남겨진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알리베라의 등 위에서 몸을 웅크린 그녀는 아로스의 온기가 남은 망토 자락으로 얼굴을 깊숙이 감쌌다. 비구름을 통과하며 듬뿍 스며든 빗물은 오히려 그의 향기를 더욱 짙게 불러일으켰다. 그 온기와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은 더욱 선명한 낙인이 되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제 그녀의 주변에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구름 위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과 알리베라의 날갯짓에 따른 미세한 기류의 흔들림만이, 시즈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밤을 가르는 비행은 길고도 짧았다. 안개를 걷어내듯 주변의 공기가 맑아지면서 마침내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스트라 가도와 창은의 강이 서서히 나타나는 동시에,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는 서쪽의 거대한 히드니스 산맥의 심장부, 아우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리베라는 속도를 늦추며 신전 입구 앞 광장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시즈는 비틀거리며 알리베라의 등에서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땅에 발을 디뎠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장엄한 신전이 밤하늘 아래 고요하게 서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멀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지만, 언젠가 이곳에 자랑스럽게 돌아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엘나를 되찾는 사명을 완수한 무녀로서, 혹은... 그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하지만 돌아온 것은 너덜너덜해진 몸과 산산조각 난 영혼뿐이었다. 정결을 잃고, 지고신의 권능마저 잃어버린 몸으로 감히 신성한 신전의 문턱을 넘을 자격이 있을까. 순백의 대리석 바닥에 자신의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는 것조차 신성모독처럼 느껴졌고, 깊은 자괴감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그때였다.
"......자매님?"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광장의 정적을 갈랐다. 신전 입구 계단 위, 율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홀로 새벽 기도를 위해 나온 것인지 얇은 숄만을 걸치고 있었다. 멀리서 광장에 내려앉는 거대한 날갯짓 소리와 미지의 날짐승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엉망이 된 몰골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시즈의 모습이었다.
율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석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시즈에게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모습이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가면이 사라진 왼쪽 눈은 빛을 잃었고, 젖어있는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그 위태로운 형체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숨결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안도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안도감도 잠시, 눈앞에 선 시즈의 처참한 모습이 다시금 심장을 에는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대체 어떤 가혹한 일들을 겪었기에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시즈...! 아아... 시즈!"
율리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계단을 달려 내려와 시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그 따스함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시즈의 마지막 방어벽마저 무너뜨렸다. 아로스 앞에서 흘렸던 소리 없는 눈물과는 달랐다. 어머니와도 같은 율리아의 품 안에서, 시즈는 마침내 참았던 모든 울음을 터뜨렸다.
"흐으윽... 율리아 님... 저... 저는......!"
돌아온 기억, 잃어버린 정결, 부서져 버린 미래, 그리고... 떠나보낸 그에 대한 미련까지. 모든 슬픔과 절망이 뒤섞여 어린아이처럼 서러운 통곡이 되어 터져 나왔다. 율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함께 눈물 흘릴 뿐이었다. 그녀의 눈물이 시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적셨고, 두 여인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 하나로 겹쳐지며 흔들렸다.
알리베라는 문득 고개를 들어 신전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용히 날개를 펼쳐 밤하늘 속으로 다시 날아올랐다. 거대한 독수리의 모습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서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영혼의 서글픈 울음소리뿐이었다.
카타디오의 회담장은 무거운 침묵과 공포로 가라앉아 있었다. 희미한 인광 불빛 아래, 한때 각자의 세력을 과시하던 고위 사도들은 이제 허리를 굽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포식자 앞에 선 먹잇감처럼,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두려움으로 어깨를 가늘게 떨 뿐이었다. 공기 중에는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짓눌린 영혼들이 내지르는 비명 없는 공포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비참한 몰골로 회담장 중앙에 쓰러져 있는 나우레스에게 향했다. 코와 귀, 그리고 혀가 잘려나간 나우레스는 비디아의 그림자에 속박된 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비디아는 가면 너머의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나우레스는 혀가 잘려 의미 없는 소리만 뱉어냈다.
"우... 에흐윽......"
"말 하나 똑바로 못하시는 겁니까."
비디아가 손짓하자, 그림자 한 줄기가 나우레스의 귓구멍을 거칠게 쑤시며 스며들었다.
"끄르악——! 끄... 끄에에엑—!"
혀가 잘려 똑바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나우레스의 목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광경에 사도들은 더욱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위축되었다.
비디아는 비명을 음악처럼 감상하듯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조곤조곤, 그러나 얼음장 같은 분노를 담아 입을 열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우리의 '소중한 제물'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불필요하게 손대지 말라, 반항이 거세면 기절만 시키라... 그리 주의를 주었거늘......"
비디아는 천천히 사도들을 둘러보았다. 낮지만 회담장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에 실린 분노는 노골적이었다.
"돌아와서 마주한 감옥은 피와 오물, 그리고... 역겨운 욕정의 흔적들로 가득했습니다. '정결'해야 할 그릇을 감히 저급한 욕망으로 더럽히다니, 이 무능함은 대체......"
잠시 말을 멈춘 비디아는 샤비트가 자리했을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쓸모 있던 인재는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샤비트는 아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젊고, 유능했으며... 무엇보다 저와 뜻이 통했지요. 유망한 젊은 인재는 죽었고, 제물을 더럽힌 것만으로도 모자라 제가 맡긴 가장 단순한 주시조차 실패했으니... 당신들은 더 이상 제 계획에 필요치 않습니다."
비디아가 다시 사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회담장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내렸다.
"아... 안 돼... 주교님! 자비를......!"
"끄아아아아아악———!"
"살려주십시오! 다시 한번 기회를— 아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절박한 비명과 무언가 찢어지고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주 잠시, 나우레스를 고문하던 그림자가 벽면을 가득 그림자가 벽면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입이 모든 것을 삼키는 듯한 실루엣을 그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멎어 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내 모든 소리가 멎으면서 불빛이 하나둘 다시 켜졌다. 회담장 안에는 비디아 외에 서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탁자 위 나우레스의 시신마저 재가 되듯 사라져 핏자국만 흥건했다. 비디아는 아무렇지 않게 소매의 먼지를 털어내듯 손짓 한 번을 하고는 회담장을 나섰다. 그는 회담장 밖으로 나와 도시 한쪽의 거대한 요람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텅 비어버린 거대한 구덩이. '그것'은 이미 이그니카를 향해 출발했을 터였다.
비디아는 품속에서 검은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실로 유감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제물이 사라졌지만, 언제나 차선책은 마련해 두는 법. 복수심으로 가득 찬 고룡이 이그니카를 무너뜨리기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그래, 통제할 수 없는 순수한 분노... 오히려 그것이 더 쓸모 있을지도.
"'완벽한 그릇'은 놓쳤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지요."
가면 너머의 시선이 아우로라가 있는 서쪽 방향으로 향했다.
"패룡의 분노가 생각보다 쓸모 있길 바랄 뿐입니다. 이그니카를 무너뜨릴 그 원한이... 아우로라에까지 닿을 수만 있다면......"
부서진 심장의 노래 2부가 완결되었습니다.
약간의 정리와 더불어 4월에 3부로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