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의무
화덕의 열기와는 다른 싸늘한 거인의 모습에, 노아는 마치 바위벽 앞에 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 타이밍을 노렸지만 거대한 위압감이 때문인지 벙어리가 된 듯 목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지?"
거인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노아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불길이 사람의 형상을 한 듯, 아마룬은 화덕의 열기 너머에서 노아를 꿰뚫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공기조차 그의 숨 막히는 기세 앞에서는 도리어 온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긴장이 온몸을 맴돌았고, 이마에는 맺힌 식은땀이 한 줄기씩 흘러내렸다. 하지만 노아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더는 물어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혹시... 카노라스의 전사이셨나요?"
아마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눈가에 스친 것은 당황과 분노,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이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거대한 가슴께가 천천히 부풀었다가 꺼지는 것이 노아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카노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노아가 처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아마룬을 찾은 인물은 시스테나 전선의 지휘관 다이크였다. 다이크는 그와 오랜 세월 알고 지낸 기사였으며, 아마룬이 수년간 대장간 안에 틀어박혀 망치질만 하며 지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아마룬이 오랜 침묵을 깨고 갑자기 밖으로 나온 것을 알고는 망설임 끝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교회에 도착한 이방인들 중 한 명은... 최근 들려오는 소문의 인물일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 말은 아마룬의 마음 깊숙한 상처를 찔렀다.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설명조차 불가능한 공포. 그는 다이크의 청을 단칼에 끊은 뒤 격분 속에서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며 쫓아냈다. 그런데 이제는 새파란 인간 의사가 아까부터 졸졸 따라다니면서 카노라스의 전사였냐고 묻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그의 분을 자극하는 일이 또 있을까.
"내 앞에서 그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마라!"
호령처럼 퍼지는 목소리는 화염 속에서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또 한 번 그딴 말을 했다가는, 진짜로 밟아버릴 테다!"
거인의 손이 노아의 가슴팍을 툭 밀었다. 단순히 '툭' 민 것만으로도 노아의 몸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딱밤이라도 맞았다가는 진짜로 죽겠는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음에도 노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인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왜 그토록 분노로 무장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아무리 차갑게 내쳐도 그 안에 눌린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마룬은 여전히 노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날이 서 있었지만, 어딘가에는 흔들리는 기색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 노아는 '다음에는 꼭 다시 물어보리라' 결심하면서 조용히 등을 돌려 대장간 외곽을 떠났다.
그 무렵, 시즈와 아로스는 시스테나 교회 본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교회 본당의 머릿돌을 찾은 시즈는 그곳에 새겨진 또 다른 언령을 읊기 시작했다.
"죽음의 물결 앞에서 버티는 영혼들이여.
언젠가, 사선의 장막에서 돌아온 이가 그대들 사이를 스쳐가리라.
지친 육신을 내려놓는 자는 어둠으로 돌아갈 것이나,
잃어버린 의지를 모아 다시 일어서는 자는 그의 사명이 딛고 설 초석이 될지니."
시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령의 문구가 난해했는지 그녀의 눈썹이 점점 찌푸러졌다.
"...'죽음의 물결 앞에서 버티는 영혼'들이라면, 지금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을 말하는 걸까요?"
"더 크게 보자면... 대륙 전역에서 버티고 있는 생존자들 모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는 모든 이들을 말이죠."
아로스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언령의 문장이 내포한 선택의 무게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을 남겼다. 그때, 석조 바닥 위로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타났다.
닳디 닳은 은색의 갑주 곳곳에 패인 상처 자국은 그동안 보았던 다른 병사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첨탑 문양 위에 박힌 청록빛 보석은 유달리 눈에 띄었고, 단번에 그가 높은 서열의 기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무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다이크는 잠시 아로스에게 짧은 시선을 주며 덧붙였다.
"환시를 품은 이도 말이죠."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즈가 예를 다하자, 다이크 또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두 분과 나눌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막사로 함께 이동하시죠."
세 사람은 짧은 인사를 마친 후 조용히 본당을 나섰다.
전선 한가운데 자리한 지휘막은 겉에서 보기에도 낡고 초라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금이 간 벽, 들쭉날쭉한 가구, 무겁게 내려앉은 먼지는 사령관의 거처라기에는 믿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시즈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전선의 대장이 머물기에는... 많이 허름해 보이네요."
시즈가 말에 다이크는 투구를 벗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얼굴은 깊게 파인 흉터와 화상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고, 오래된 피로가 눈가에 그늘처럼 드리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동자만은 꺼지지 않은 불빛을 머금고 있었다.
"온 세상이 죽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 또한 다르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보다 나은 삶을 누리겠다는 건 그 자체가 사치입니다."
담담한 목소리 너머에는 자신을 태워 지켜온 신념이 배어 있었다. 시즈는 다이크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피부를 뒤덮은 흉터와 화상 자국은 단순한 상처가 아닌 자신의 몸을 내던져 무언가를 지켜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제야 시즈는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이크는 자신의 안위 따윈 개의치 않는 지휘관이었다.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은 단지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전선의 중심에서 병사들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버텨온 산 증거였다. 아로스 역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다이크의 헌신에 대한 깊은 존경이 담겨 있었다.
"조금 전 언령의 구절 중, 사선에서 돌아온 이가 지나가는 길이 그의 사명을 위한 초석이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언령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지난밤을 기점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희망의 전조라 믿고 있습니다."
"그걸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믿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시즈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을 만난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의 확신 어린 태도는 어딘가 낯설고도 조심스러웠다.
"여러분도 보셨겠지요. 대장간에 있는 거인 철기장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마룬. 과거, 그는 카노라스의 정예 전사였습니다."
시즈와 아로스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고, 조금 전 광장에서 마주쳤던 거인의 형상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불꽃처럼 강렬했던 밝은 녹안,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체구와 거대한 망치. 다이크는 경외감이 섞인 듯이 말을 이어갔다.
"아마룬은 단순한 전사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1인 군단, 아니, 그 이상보다 훨씬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아로스는 다이크의 눈빛에서 과장이 아님을 느꼈다. 그 말 하나하나에는 실제로 함께 싸워봤던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랬던 아마룬이... 카노라스가 파도의 악마들에게 무너진 날, 전장을 벗어나 도망쳐버렸습니다."
다이크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엔 억누른 분노와 실망이 섞여 있었다.
"제가 아는 거인 전사들은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해도 결코 등을 보이지 않죠. 그들을 꺾을 수 있는 존재라면... 신과 용 이외에는 없을 겁니다."
말을 마친 다이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가에는 오랜 전우를 떠올리는 피로감과 아련한 애정,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좌절이 뒤엉켜 있었다.
"그 뒤로 아마룬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다시 발견된 건 4년 전쯤이었을 텐데... 지금의 전선 북쪽에서 폐인이 된 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근처에 접근하는 이가 있으면 미친 듯이 날뛰어서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지만 며칠 동안 끈질기게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전선에 합류했죠. 그럼에도 파도의 악마들만 보면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스스로 대장간에 틀어박혔고,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아로스는 처음 마주했던 아마룬을 떠올렸다. 단단한 외형과는 다르게 이면에는 불안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강대한 거인조차도 큰 트라우마를 갖게 된 사건이 있을 터였다.
"그런 아마룬이... 어젯밤 갑자기 대장간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별안간 병사들에게 무언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말했다더군요.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두 분을 보고 직감했습니다. 지금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도착했다는 것을 말이죠."
시즈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거인께서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어 보이던데요. 저희에게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하며 매몰차게 돌아섰습니다."
다이크는 시즈의 실망을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은 아닐 겁니다. 분명 카노라스가 무너진 날... 그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와 마주한 것이 분명합니다. 파도의 악마들은 아마룬 같은 거인들에게는 위협조차 안 됩니다. 그런데도 도망쳤다는 것은..."
다이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날 아마룬이 본 것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을 겁니다. 신에 필적할 정도로 강대하고 위험하면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였겠지요."
시즈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설득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막사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노아가 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모습을 드러냈고, 몰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 민망했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다시 한번 가서 이야기해 볼게요."
"오, 노아로구나. 새벽에는 정신을 못 차리더니만, 지금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군."
다이크는 짧게 웃으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다이크 님은 여전하시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나야 뭐, 늘 전선이 일상이니 똑같지. 그건 그렇고, 안톤 님은 무사히 마을로 돌아가셨나?"
"네. 환자분들과 함께 무사히 마을에 돌아가셨죠. 지금은 마을에서 평소처럼 잘 지내고 계실 거예요."
"그분은 정말 올곧은 분이야. 30년 전 처음 뵌 이래로 변함이 없으시니 말이지. 헌데, 어쩌다 저분들과 같이 움직이게 된 거지? 다른 의사들과 따로 움직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지금 당장은 길게 설명드릴 순 없지만... 스승님께서는 제가 이분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조금 전에 말하는 보니 대장간을 다녀온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나?"
노아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다이크는 경고를 하듯 입을 열었다.
"똑같은 말을 하러 두 번 가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 지금의 아마룬은 그 옛날의 호쾌한 거인이 아니야."
그 말에 문득, 노아는 안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상처를 입은 사람을 두고 외면한 적 없었던 스승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그래도 해봐야죠. 저는 의사니까요. 몸만 고치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마음도 치료해야죠. 스승님이 계셨더라면 분명히 저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다이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없이 노아를 지켜보았지만, 그의 말에서 단순한 고집이 아닌 누군가를 향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한때 전선에서 화약이나 터뜨려 먹던 꼬맹이가 이제는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다이크의 마음속에 조용한 감회를 일으켰다.
"그럼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지. 아마룬은 쉽게 설득될 상대가 아니야. 거인의 고집은 신들도 꺾기 쉽지 않아."
말은 걱정스럽게 했지만 다이크의 시선에는 노아의 결의를 받아들인 기색이 어렴풋이 번지고 있었다. 노아는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막사를 나서다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아로스에게 되돌아와 입을 열었다.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전선과 죽음의 평원이 맞닿은 지대. 음습한 어귀에 자리한 깊은 구덩이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기피 장소였다.
그곳에 도착한 크라인은 방책 근처의 그림자 속에 몸을 낮췄다. 등 뒤로는 푸른 문양이 새겨진 채로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이 어렴풋이 서 있었고, 그 주변은 이미 어둠에 섞여 들기 시작한 다른 추적자들의 기척이 퍼져 있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계획된 움직임이었다. 말없이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각자 위치를 잡으며 경계선을 눌러 조이고 있었다.
오늘 이곳은 단순한 감시가 아닌 하나의 작전 무대가 될 터였다. 떨리는 손으로 방책을 짚던 크라인은 몇 년 전, 전선의 한 토산이 무너졌을 때 이 구덩이에 수많은 병사와 파도의 악마들이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당시의 목격자들은 그것을 '끈끈이에 갇힌 파리떼'에 비유했고,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한 채 이 일대는 그대로 봉쇄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흐느낌 탓에 이곳은 저주받은 땅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 원령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시스테나의 무녀가 안식을 기원하며 비석을 세운 것이라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