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6)

다가오는 검은 물결

by 이샤라

그러나 오늘 밤, 이 땅은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지휘하는 것은 사도 카브르였다. 크라인의 임무는 명확했다. 카브르가 봉인을 해제하는 동안 구덩이를 점거하고 외부의 접근을 막는 것. 실패할 경우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크라인은 조금 전 교대한 병사 하나를 조심스럽게 주시했다. 병사는 익숙한 듯 투구를 벗은 뒤 비석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피하려 귀를 눌러 막고 있었다. 그 무방비한 뒷모습은 어둠 속에서 너무도 선명했고, 크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병사의 목과 가슴을 꿰뚫었다. 결국 병사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주변에서는 다른 추적자들도 각기 흩어진 위치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전에 합의된 신호는 없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병영 주변을 탐색해 나가는 흐름이 감지되었다.


잠시 후, 구덩이 너머로 검은 안개처럼 스며든 기운이 흩날리더니 남색 후드를 뒤집어쓴 카브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그 형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이형이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조차 땅에 닿는 소리가 없었고, 시야에 들어온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크라인은 본능적으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카브르는 말없이 품에서 검은 단검 하나를 꺼냈다. 칼날 끝에선 검은 액체가 끓듯이 부글거리며 꿈틀거렸으며, 마치 칼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묘비가 검게 변하는 순간... 이 단검으로 중심을 찔러라."


카브르는 손에 쥔 단검을 크라인에게 건넨 뒤 지하로 이어지는 석문을 밀어낸 뒤 무덤의 내부로 들어섰다. 다섯 해 동안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지하는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와 쌓인 먼지로 가득했다. 그는 침묵 속에서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불규칙한 석계는 무덤 속 기운의 영향 때문인지 바스러질 듯했고, 그 끝에는 희미한 푸른빛이 남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너머엔 아무런 장식도, 구조도 없는 매끈한 석벽이 서 있었다. 그 어색한 빈칸을 응시하던 카브르는 품속에서 뿌연 그림자처럼 보이는 검은 액체가 담겨 있는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마개를 열자, 그 액체는 곧장 자력에 끌린 철가루처럼 제단 뒤 벽으로 튀어 오르더니 꿈틀거리며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질퍽한 액체는 벽 위를 기어 다니며 정교한 무늬를 새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차 하나의 형상으로 응집되면서 벽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여갔다.


카브르는 제단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손끝이 닿자 제단에서 희미하게 남아있던 푸른빛이 튕기듯 흔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인간의 혀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낮고 이질적인 언어였다. 무덤 내부에 울려 퍼진 주문은 단어도, 뜻도 없는 소리였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공간의 온도는 급격히 낮아졌고 벽은 점점 어둠에 물들어갔다.


제단의 불빛은 서서히 꺼져가자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워졌다. 이질적인 기운이 바닥 틈을 타고 퍼져나가는 순간 카브르는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무언가가 '응답했다'는 확신을 가진 자의 기묘한 확신이었다.


무덤 외부에서는 크라인과 몇몇 추적자들이 단검을 손에 쥔 채 무덤 입구의 비석을 주시하고 있었다. 손바닥은 진작에 식은땀으로 젖었고, 등에선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임무가 단순한 교란이나 전초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밤, 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선 전체를 바꿔놓는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파문이 될 것임을.


노아는 긴장된 얼굴로 대장간으로 향했다. 손끝에는 어릴 적 형이 준 거인 전사의 목각 인형이 꼭 쥐어져 있었고, 품 속에는 환시의 등불이 담겨 있었다. 이 등불을 얻기까지 벌어졌던 실랑이가 문득 떠오르자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나왔다.



"정말 이걸 들고 가면 그를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아로스는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봐야죠.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평생 저렇게 살아갈 거예요. 누구도 다시는 그를 끌어낼 수 없을지도 몰라요."


"...거인이 인내심을 놓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아로스의 말끝에는 작지 않은 우려가 실려 있었지만, 결국 등불을 건넸다. 노아는 그 무게를 손에 받아 들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대장간으로 가까이 다가설수록 열기는 뺨을 스치고 목줄기를 덥혔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사이로 무겁고도 단조로운 망치질 소리가 울렸다. 굴뚝 너머로 새어 나오는 금속의 향과 불꽃의 숨결이 뒤섞인 공기는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사방을 요동치게 했다.


노아가 발을 멈춘 곳은 대장간의 입구였다. 안쪽에서는 아마룬이 여전히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금속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깨 위로는 잿빛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화염에 물든 윤곽은 붉게 일렁이며 더욱 거대해 보였다. 마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태초의 장인처럼 거인의 몸은 시간과 쇠의 기억을 두드리고 있었다.


"...또 왔군."


대장간 안을 가득 채우는 그 울림이 입구까지 퍼져왔다. 거대한 몸집과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 입구 밖으로 드러나자 노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지만, 그는 떨리는 숨을 뱉으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또 찾아와서 좀...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오면 네놈을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아마룬은 망치를 휘둘러 눈앞에 놓인 모루를 내리쳤다. 충격과 함께 불꽃이 튀면서 공기엔 섬뜩한 긴장감이 번졌다. 노아는 거인의 분노가 커지는 것을 느꼈지만 굴하지 않고 목각인형을 꺼내면서 한걸음 더 다가섰다.


"이건... 저희 형이 어릴 적 제게 준 겁니다. 카노라스가 파도의 악마들에게 무너졌던 날에요. 그날, 형은 이 인형을 건네며 말했어요. 거인을 본받으라고. 당신 같은 이들은 두려움을 모른다고. 어떤 적이 와도 싸우는 자들이라고요."


"...그만두지 않을 테냐?"


아마룬은 노아를 향해 몸을 돌려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입을 닫지 않으면, 지금 당장 네놈의 사지를 이 자리에서 찢어버릴 수도 있다."


"이제는 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당신은 도망친 게 아니라 살아남은 거예요. 그런데 그걸, 마치 끝인 것 마냥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래도—"


"그만———!"


거인의 거대한 외침이 대장간을 울리자, 노아는 귀를 틀어막고 간신히 그 진동을 버텼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아마룬이 망치를 내동댕이치자 대장간 바닥이 파이며 폭발처럼 불꽃이 튀었다. 뒤이어, 불빛 사이로 거인의 몸이 돌진하면서 커다랗고 거친 손이 노아를 붙잡았다.


몸이 공중으로 들리면서 사지를 짓눌리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고, 숨이 끊길 것 같은 순간 아마룬의 분노가 쏟아졌다.


"네놈이 뭘 안다고 그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거냐! 그 참상 속에서 싸웠던 내가, 동료들이 죽어가던 것을 지켜봐야 했던 내가! 정녕 두려움을 몰랐을 거라 생각한 거냐?"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여기 숨어 있는 것이... 이 땅을 지켜야 할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손아귀에 눌린 채 겨우 토해낸 말이었다. 그 순간, 노아의 품 속에서 환시의 등불이 미끄러져 나왔다. 은은한 빛이 시야에 스며들면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아마룬은 노아를 대장간 입구 바깥으로 내던져버렸다. 바닥을 구르며 내동댕이쳐진 노아는 숨을 고르려 애썼다.


"...두 번 다시 이곳에 나타나지 마라."


등을 돌린 그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거칠지 않았다.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대신 깊은 허무가 어렴풋이 감돌았다. 노아는 온몸을 쥐어짜인 통증을 억누르며 간신히 땅을 짚고 일어섰다.


막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전 대장간을 돌아보자 아마룬이 녹슨 갑옷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손이 갑옷 쪽으로 향했지만, 그는 끝내 손을 거두고 외면해 버렸다.


막사로 돌아온 노아의 모습에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온통 피멍으로 가득했고, 휘청이며 돌아오는 모습에 놀란 시즈는 황급히 그를 향해 달려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거인께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입니까?"


평소답지 않게 감정으로 상기된 시즈의 물음에, 노아는 고개를 숙인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서요. 설득은... 실패한 것 같아요. 정말 저를 죽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마지막에 뭔가... 마음이 약해졌는지 갑자기 저를 놔주고 쫓아내더라구요."


다이크가 노아의 상태를 훑어보며 물었다.


"온몸이 멍투성인데, 정말 괜찮은 건가?"


"이 정도는 괜찮아요. 겉보기에만 좀 심한 거지, 뼈는 안 부러졌으니까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본인이 괜찮다니 더는 묻지 않으마. 여하튼, 아마룬이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결국 오지 않겠다는 말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겠지."


그는 곧장 병사 하나를 부르며 말했다.


"지도를 가져오게."


잠시 후, 병사가 손때에 닳은 낡은 지도를 들고 돌아왔다. 지도의 표면엔 엘라리모스와 카노르 평원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다이크는 그것을 펼치고 남쪽을 손으로 짚었다.


"아마룬에게서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이곳 남부 지역 엘라리모스에는 더 이상 알려진 언령이 없습니다. 다른 언령을 찾으시려면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합니다."


다이크는 말을 이으며 지도의 서쪽과 북쪽 방향을 번갈아 가리켰다. 창은의 강, 그리고 불꽃의 고원이었다.


"서쪽 대륙은요?"


노아가 묻자, 시즈가 고개를 저으며 지도의 서쪽에 손가락을 그었다.


"서쪽 일대에는 언령이 내려온 흔적이 없습니다. 혹여나 제가 아우로라에서 여기까지 오는 중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고의 존재께서는 애초에 서쪽에 언령이 내려왔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북쪽으로 이동하셔야겠군요. 길은 험하겠지만, 이 일대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곳은... 타리안뿐입니다."


다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의 북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타리안이라는 이름의 요새가 선명히 표시되어 있었다.


"타리안은 전쟁의 여신의 결계로 보호받는 요새입니다. 주변은 폐허로 변했지만 일부 대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려면 그 결계를 통과하는 게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다이크는 지도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곳의 결계도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결계의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요새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죠. 시간을 지체할수록 상황은 악화될 겁니다."


"그럼 당장 출발해야겠네요."


"오늘 밤은 무리입니다. 시스테나 전선은 평원에서 올라오는 장기와 불길 때문에 금방 어두워지는 데다가 밤에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우리를 적대합니다. 날이 밝을 때 움직이셔야 조금이라도 안전합니다."


막사 안은 조용해졌다. 더는 할 말이 없는 듯이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그 침묵 속에서 다가올 여정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노아는 지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타리안의 결계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여유가 없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다이크의 말처럼, 오늘 밤은 움직이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그때였다.


—벌컥


막사의 문이 거칠게 열렸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들어선 병사가 긴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전선 쪽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됐습니다!"


막사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고, 다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전선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는 말이냐?"


"파도의 악마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지금껏 봐온 규모가 아닙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병사의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은 창백했다. 다이크의 눈빛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구체적인 수는? 어림잡아 얼마나 되나?"


"...수만입니다."


순간, 막사의 공기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다이크는 그대로 굳은 듯 서 있었다. 얼굴에 떠오른 건 경악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의 일시적인 공백, 진실을 부정하고 싶은 본능적인 정지였다.


"...수만?"


그 목소리는 마치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확인하려는 듯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병사 또한 자신이 본 것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상대해 온 규모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지평선이... 꿈틀거릴 정도입니다. 이번엔 정말 전선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다이크는 짧게 숨을 들이킨 뒤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의 머뭇거림도, 감정도 전부 벗겨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비하라. 전 병력, 전선으로 이동한다."


그는 진열장의 검을 꺼내 허리에 차며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이크를 따르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에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챙기며 신속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공포도, 용기도 아닌 생존 본능에 가까운 긴박감이 배어 있었다. 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의 행렬은 거대한 파도처럼 막사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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