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7)

풀려난 봉인

by 이샤라

"파도의 악마들이 몰려옵니다!"


망루 위에서 북쪽을 지켜보던 감시병의 외침이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지자, 병사들이 일제히 전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지평선 위로 검보랏빛 파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니, 파도가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괴물들의 군집이었다. 수만의 파도의 악마들이 하나의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마치 땅이 들썩이는 착시처럼 지평선을 뒤틀고 있었다.


대지가 떨렸다. 무수한 발걸음이 대지를 두드리며 공기를 흔들고, 병사들의 손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움켜쥐었다. 어깨가 굳고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두려움은 숨결처럼 방어선을 뒤덮었다.


다이크는 전선 위의 방어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병사들의 얼굴엔 떨림이 어렸다. 투구 속에서 흘러내리는 땀, 입술을 깨물고 부정하려 애쓰는 눈빛. 그러나 다이크는 고개를 높이 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 지평선 너머의 물결을 보아라! 저것들은 그동안 봐왔던 파도가 아니다.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몰려오는 끝없는 증오와 절망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카노라스가 무너지면서 터전도, 가족도, 신앙도 무너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에 꿋꿋이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병사들의 눈이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린 두려움 속에서도 이 자리를 지켜왔다. 썩어가는 대지 위에서, 끝없는 어둠 앞에서, 한 번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는 두려워할 것이다. 제군들의 눈에서 나와 같은 두려움을 보았다. 하지만 기억하라, 두려움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간,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이크는 검을 뽑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싸우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이 방어선은 남쪽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우리는 이 관문을 지켜내야 한다! 놈들에게 이곳이 마지막이라고 알려주자! 오늘, 이곳으로 오는 모든 놈들을 저세상으로 되돌려 보낼 것이다!"


그 외침이 하늘을 찢자,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검과 창이 번쩍이며 하늘을 가르었고,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의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즈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겁게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다이크의 연설은 단순한 격려를 넘어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겠다는 결의였다. 그 결의가 말이 아닌 목소리로, 숨결로 전해져 왔다.


"다이크 님의 말이 맞습니다.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에요."


"어차피 이곳에서 놈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여정 또한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 다이크의 뒤를 따랐다. 전선은 이미 괴물들로 들끓고 있었다. 검보랏빛 점액을 흘리며 대지를 물들인 파도의 악마들은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던 다이크는 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커다란 운명을 짊어진 분들께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하루빨리 다른 언령의 실마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셨어야 했는데... 사태를 이 지경이 되기 전에 헤아리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그의 말에 시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에게 사과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싸우지 않고 떠난다면, 저희 여정도 의미를 잃게 될 거예요.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 함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군요. 그렇다면, 무녀님 노아와 함께 후방에서 병사들을 지원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이크의 시선이 아로스에게 향했다.


"환시를 품은 이여."


"말씀하십시오."


“저와 함께 최전선에 나서주시겠습니까?”


다이크는 그 질문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의 인물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다."


그 담담하고도 머뭇거림 없는 대답에, 다이크는 잠시 동안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벨트 옆에 걸린 검을 꺼내 건넸다. 검날은 길었지만 단순하고 소박했으며, 특별한 점은 찾기 어려웠다.


"이 검을 쓰십시오."


아로스는 검을 받아 들고, 천천히 그 표면을 살폈다.


"이 검은...?"


"아마룬이 만든 검입니다. 전선의 병사들이 모두 이 무기를 쓰고 있죠. 부패에 닿아도 썩지 않도록 만들어진 칼날이니, 놈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무기일 겁니다. 당신께도, 오늘 이 전투에서 필요한 무기라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이크는 말없이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은 숨을 내쉬며, 마치 스스로에게도 들려주듯 조용히 말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순 없겠지만... 가능한 많은 이들이 돌아가길."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다이크와 아로스는 주저 없이 전선의 최전방으로 향했고, 시즈와 노아는 후방에서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리에 자리 잡았다. 시즈가 두 손을 모아 이능을 집중하며 병사들을 위한 보호막을 준비하는 동안 노아는 쇠뇌와 투석기에 쓰일 무기들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팔과 어깨에 맺힌 피멍은 여전히 아팠지만 그의 눈빛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파도의 악마들이 전선에 닿기 직전, 다이크와 아로스는 최전방에 섰다. 그들 앞에 펼쳐진 괴물들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검보랏빛 덩어리들이 평원을 뒤덮었고, 그 진군에 맞춰 대지가 울렸다. 다이크는 검을 높이 들었다. 빛을 머금은 강철이 하늘을 가르자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기억하라! 이 싸움은 물러설 수 없는 전투다! 절망의 파도를 막고, 오늘을 승리로 남겨라!"


다이크의 목소리가 전선을 가르며 터지는 순간, 파도의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검보랏빛 점액이 허공을 가르며 튀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로스는 다이크와 함께 파도의 악마들과 맞섰다. 등불의 빛을 감싼 채 검을 들고 선 그는 토산을 기어오르던 괴물들을 한 줄기 바람처럼 베어 넘겼다. 검이 휘둘릴 때마다 괴물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고, 검보랏빛 육편이 흩날렸다. 그 맹렬한 기세는 병사들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는 떨림을 억눌렀고, 누군가는 외침과 함께 몸을 날렸다.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는 곧 처절함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괴물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그들의 점액은 땅을 물들이며 부패를 퍼뜨렸다. 첫 방어선이 점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점액에 닿은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전장의 구획마다 비명과 충돌음이 얽혀 퍼졌다. 피와 불, 그리고 죽음이 뒤섞인 전장 한가운데 아로스는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고, 시즈는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노아는 손끝에 불을 머금은 채 끊임없이 쇠뇌와 투석기를 위한 화염을 만들어냈다.


다이크는 점점 불어나는 괴물들의 물결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발리스타와 투석기를 준비해라! 저놈들을 이 땅에서 지워버려라!"

전장의 곳곳에 거대한 발리스타와 투석기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본래 이 병기들은 카노라스의 하늘을 가르던 틈새의 존재, '울루니아'들을 맞기 위해 제작된 공성병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을 가릴 여유도 없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파도의 악마들을 저지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병사들은 발리스타와 투석기에 불붙은 바위와 무기를 차례로 장전한 뒤 끊임없이 발사했다. 불길을 품은 탄환들은 하늘로 솟구쳤고, 몰려오는 괴물들 사이로 곤두박질치며 전진 속도를 억제하는 동시에 그들을 무자비하게 불태웠다. 이따금씩 시즈가 허공에 손을 그어 만들어낸 환영이 괴물들의 시선을 붙잡았고, 그들이 뭉친 지점마다 탄환이 명중했다.


충격과 함께 괴물들의 몸이 터져나갔고, 불길은 한순간에 그 잔재들을 집어삼켰다. 작렬하는 폭음과 타오르는 불꽃이 뒤섞인 전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서도 병사들의 눈빛은 오직 살아남기 위한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무덤 아래에서는 사도 카브르가 여전히 의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장과 벽을 뒤덮은 육질의 표면엔 검은 맥이 서려 있었고, 제단 아래로는 썩은 살점처럼 문드러진 지반이 들숨을 쉬듯 요동쳤다. 이곳의 봉인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5년 전, 샤비트에게 무릎 꿇었던 무녀의 힘은 아직까지 그 흔적을 품고 있었고, 봉인 자체도 그에 못지않은 저항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카브르는 단 한 번도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뱀의 혀처럼 길고 습하게 제단을 감돌았고, 입에서 나오는 주문은 공기마저 더럽히는 독처럼 천천히 파고들었다. 어느덧 제단 위의 힘은 서서히 흐려졌고, 제단 벽에 뿌려졌던 검은 액체는 벽면의 살결로 스며들듯 천천히 흡수되었다.


그 순간, 지상에 박혀 있던 묘비가 서서히 칠흑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표면은 얼음처럼 매끄러워졌고, 중심부엔 심장을 삼킨 것 같은 음영이 고였다.


크라인은 단검을 꺼냈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가 단검을 묘비의 중심에 꽂는 순간, 뭔가가 울렸다.


지면 전체가 뒤흔들렸고, 묘비는 거미줄처럼 균열을 일으켰다. 천장과 벽, 대지의 살점이 함께 떨리는 듯한 진동 속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비명이 무덤을 삼켰다.


"끼아아아아아악——아아——아아아아아——끄으으으으으아아아아——"


그것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수백의 원혼이 서로의 성대를 물어뜯듯 엉겨 붙어 고막을 찢는 듯한 울음으로 퍼져나갔다. 크라인은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눈과 귀, 감각 전체가 괴악한 울음에 침식되어 가는 순간, 그는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철책 뒤로 몸을 피했다. 주변에 있던 추적자들 몇몇도 비틀거렸다. 그중 하나는 토사물을 쏟으며 무릎을 꿇었고, 또 하나는 굳어버린 얼굴로 숨을 내뱉으며 무덤 너머를 주시하고 있었다.


비명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나 잦아든 자리를 채운 것은 더욱 불길한 기척이었다. 무너진 묘비 틈 아래에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미친 듯이 깔깔대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브르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후드에 가려져 있었지만 희미하게 드러난 입가엔 피처럼 붉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드디어... 열렸다...!"


그의 등 뒤에서 땅이 갈라졌고, 균열 속에서 살덩이 하나가 꿈틀거렸다. 눈도, 입도, 뼈도 불분명했지만 그것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크라인은 철책 너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에는 두려움과 혐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겹쳐 있었다.


형체를 갖추지 못한 채 기어 나온 괴물은 피부를 잃은 채 뒤엉킨 근육 덩어리의 시귀였다. 문드러진 얼굴 표면에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들이 뒤엉켜 있었고, 눈꺼풀도 없이 벌어진 눈, 찢어진 입, 멈춘 표정이 뒤섞여 육신을 덮고 있었으며 허리께에는 살점이 부패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안에서 쏟아진 고름 같은 끈적한 액체가 지면과 접촉한 곳마다 부패가 퍼져나갔다.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까만 장기와 함께 코를 찌르는 악취는 피할 새도 없이 퍼졌고, 숨조차 삼키기 힘들 정도였다. 살덩이와 살덩이가 얽힌 거대한 팔 네 개가 뻗어 있었고, 각 팔에는 수십 명의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박제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순간, 카브르가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불결한 언어로 주문을 읊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괴물의 발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괴물의 입이 벌어지면서 썩은 틈 사이로 돋아난 이빨이 드러났고, 카브르는 그대로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괴물의 등 뒤에서 촉수처럼 뻗어나간 살덩이 팔이 철책 너머를 주시하던 추적자 몇 명을 덮쳤다. 한 명은 허리가 두 동강 난 채 공중으로 들려 올라갔고, 또 다른 한 명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살려... 아악——!"


짧고 굵은 비명이 울려 퍼졌고, 피와 내장이 튀었다. 살점이 씹히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크라인은 공포를 못 이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 철책 뒤편으로 도망쳤다.


식사를 마친 괴물의 몸은 끔찍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리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팔은 비틀렸고, 머리라 불릴 만한 부위에서는 붉은 액체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끈적한 액체는 허공으로 흩날리는 동시에 철책과 대지를 더럽혔으며,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며 증기를 뿜어냈다.


괴물이 포효하자 땅은 또다시 울렸다. 그 소리는 허공을 갈라내듯 메아리쳤고, 전선을 향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전선의 병사들은 그저 눈앞의 적인 파도의 악마들과의 싸움에 몰두할 뿐, 머지않아 다가올 재앙의 그림자를 알지 못했다.



작가의 이전글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