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8)

무너지는 전선

by 이샤라

시스테나 전선은 이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끝없이 몰려오는 파도의 악마들과 사투를 벌이는 전장은 검과 불꽃, 그리고 처절한 비명으로 뒤덮여 있었다. 부패의 독기가 공기 중에 퍼져 나가며 숨조차 쉬기 어려웠지만 다이크의 목소리는 전장의 혼란을 뚫고 단단히 울려 퍼졌다.


"버텨라! 절대 전선을 넘어가게 두어선 안된다!"


그 순간, 땅이 울렸다.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대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이질적인 떨림. 처음엔 파도의 악마들과의 격전으로 토산이 무너진 것이라 여겼으나 곧 그것이 아님을 모두가 깨달았다.


무덤이 있던 방향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부패한 살덩이들이 대지를 짓눌렀고, 그 위로 수많은 팔이 엉겨 붙은 채 울퉁불퉁한 실루엣이 솟아올랐다. 충격적인 광경에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멈췄다.


"......저게... 저게 대체 뭐야?"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괴물의 전신이 드러났다. 수많은 팔이 달린 창백하게 뒤틀린 신체에서 고름과 증기가 분출되었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면이 패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이크는 5년 전에 납치당한 무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무덤 내부의 제단과 바깥의 묘비는 어떤 일이 있어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보다 강한 이능을 지닌 존재가 오지 않는 이상 안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주의해 주셔야 합니다.


그녀의 경고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다이크는 깨달았다. 파도의 악마들을 막기 위해 병력을 전선에 집중시키는 동안 무덤 주변의 경계는 허술해졌다. 그 혼란의 틈을 탄 누군가가 보초들을 제거하고 봉인을 풀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보다 명령이 필요했다. 다이크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바로잡은 뒤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전선의 병사들은 현재 위치를 고수하고, 후방의 지원 병력들은 대열을 갖춰 재정비하라! 창기병들은 괴물의 전방에 진형을 펼쳐 대치하라!"


다이크의 외침이 혼돈을 뚫고 명확히 전장을 관통했고, 병사들은 그 명령을 받들며 곧바로 움직였다. 그의 외침이 곳곳에서 이어졌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 위로 각오가 서렸다. 긴 랜스를 손에 쥔 창기병들은 방패를 앞세워 일렬로 진형을 정비했다.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들엔 두려움이 서려 있었지만 누구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병사들 앞에 펼쳐진 대방패는 마치 거대한 강철의 벽처럼 일제히 맞붙어 있었다.


괴물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면은 계속해서 울렸고, 공기는 부패한 증기로 물들어갔다. 창기병들의 발은 단 한 걸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괴물은 단순히 몸집만 거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병사들이 형성한 창기병 대열을 무시하듯 시선을 틀더니, 느닷없이 방향을 바꾸어 전열 뒤편의 투석기를 향해 육중한 팔을 휘둘렀다.


"아니, 뒤쪽으로!?"


"투석기 쪽으로 간다—!"


방패를 든 병사들의 외침이 쏟아졌지만 이미 늦었다. 강철과 목재로 단단히 구성된 투석기는 괴물의 일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부서진 잔해와 불붙은 탄환이 공중으로 튕겨나가며 주변 병사들을 덮쳤다.


"으아아아아악! 피해! 피해——!"


뒤이어, 괴물은 불타는 바위와 부러진 기둥을 집어 들고 병사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바위는 작은 언덕처럼 보였고, 그것이 부딪힐 때마다 대열은 요동쳤다. 충격으로 땅이 꺼지고 전열이 흔들리면서 기둥에 정통으로 맞은 병사들은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몸은 땅에 박히며 갑옷이 갈기갈기 찢겼고, 방패는 산산조각이 났다.


돌무더기가 전열을 가로지르자 피와 쇳조각이 뒤엉킨 참극 속에서 병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날아오는 바위에 피하지 못한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으스러졌다. 잔해 속에서 불길이 일어났고, 화염은 갑옷을 녹이며 살을 태웠다. 비명과 연기, 혼란이 뒤섞인 전장은 파멸의 광장이었다.


절망은 빠르게 번져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무기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고, 방패를 붙잡은 손은 떨렸으며, 일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절망의 틈 속에서 파도의 악마들이 비집고 파고들며 전열을 뚫자 마침내 시스테나 전선 곳곳에서 구멍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구역이 무너지자 연쇄적으로 다른 지점도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병사들은 광기와 폭력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다이크는 검을 높이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가 먼저 돌격하자 몇몇 병사들이 뒤를 따랐지만, 괴물은 그들을 조롱하듯 굽어보더니 거대한 팔을 힘껏 휘둘렀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갑옷이 부서지고 살점은 부패한 점액에 닿아 형체를 잃은 채 무너져 내렸지만 다이크는 굴하지 않으며 외쳤다.


"이쪽은 내가 맡는다! 다른 방향을 방어하라!"


그 순간, 괴물의 거대한 손이 다이크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이크는 전신의 힘을 끌어모아 방패를 세웠지만 그 일격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훌쩍 넘었다. 방패는 산산조각 났고, 다이크는 그 충격에 휘말려 토산 아래로 내던져졌다. 그의 몸은 파도의 악마들 사이로 사라졌고, 피와 연기가 자욱한 전장 속에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지휘관을 잃은 전선은 급속히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의 시선이 흔들렸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파도의 악마들이 마지막 균형마저 무너뜨렸다. 아로스와 시즈는 끝까지 전열을 지키려 했지만 검보랏빛 물결처럼 밀려오는 파도의 악마들 앞에 그들도 점차 밀려났다.


"귀공!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교회로 피해야 합니다!"


시즈는 외침과 함께 손을 뻗어 이능을 펼쳤다. 그녀는 쓰러진 병사들을 지키려 애썼지만 파도의 악마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비틀거리며 도망치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부패에 삼켜지며 그 자리에서 끔찍한 형상으로 변해가자, 참상을 지켜보던 시즈는 입을 틀어막고 망연자실했다.


"안돼...!"


절규와 함께 무릎이 무너졌다. 시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파도의 악마들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로스가 불붙은 통나무를 집어던지며 놈들을 불태웠다. 그는 망설임 없이 시즈를 안아 든 채 혼돈의 전장 속에서 퇴로를 뚫었다.


"전선은 이미 무너졌고, 교회도 곧 위험에 휩싸일 겁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아로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절박함이 묻어 나왔다. 뒤로는 자욱한 불길과 울부짖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몰려왔다.


전장이 무너지는 광경을 멀찍이 지켜보던 노아의 손이 떨렸다. 공포와 무력감이 몸을 옥죄었지만 그보다 앞선 감정이 뇌리를 붙들었다. 이 상황을 바꿀 힘이 필요하다는 절박함,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절실함. 머릿속을 스친 이름은 단 하나였다.


아마룬.


태고의 거인의 후손이자 카노라스의 전사, 그리고 지금은 대장간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존재. 그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전선을 벗어난 노아는 숨이 끊어질 듯 달렸다. 하늘 위로 퍼지는 검은 연기, 그 아래로는 대장간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피부를 할퀴듯 스쳐갔다. 심장은 두려움과 결심 사이를 오가며 쿵쾅거렸고, 대장간이 가까워질수록 망치질 소리가 더 크게 울려왔다. 마치 전장 밖에서도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는 듯 거칠고 강렬한 쇳소리가 공기까지 뒤흔들었다.


맹렬한 열기가 가까워지면서 노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손에 쥔 목각 인형을 다시 한번 쳐다본 뒤 대장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마룬!"


열기 속으로 메아리가 퍼졌다. 그러나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닌 천천히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깨 위에 망치를 걸친 아마룬이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노아를 향해 돌아섰다.


"...또 네놈인가."


아마룬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피로, 그리고 꺼지지 않은 두려움이 얽혀 있었다. 노아는 참을 수 없었다. 전설로 여겨졌던 전사가, 모든 것을 구할 힘을 가진 거인이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치려는 겁쟁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전선은 무너졌고,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다이크... 다이크 님도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이대로라면 모든 것이 끝장날 거예요!"


"...나는 이미 충분히 싸웠다."


아마룬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망치를 내려다보았다.


"그 끝에 남은 건, 죽음과 후회뿐이었다. 싸움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야."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밖에서는 지금도 수백 명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어요! 파도의 악마들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단 말이에요! 당신은... 당신은 이 전선의 마지막 방패가 될 수 있는 존재잖아요!"


"너는 내가 본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싸운 것을 겪어 본 적도 없지. 더 할 이야기도 없다. 네놈도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이로울 텐데."


"——어째서!!!"


노아는 아마룬의 말에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리듯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당신이 저들을 두고 도망칠 수 있어요? 카노라스가 멸망했을 때도, 당신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또 도망쳐서... 남아 있는 병사들까지 그냥 개죽음을 당하게 둘 거라구요!?"


아마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망치를 집어 들고 노아에게 성큼성큼 노아에게 다가와 바로 옆 바닥을 향해 망치를 내리꽂았다. 지면이 울릴 정도의 위력, 그리고 흩날리는 잿가루와 함께 거인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를 질책하는 것이냐? 네가 이 땅을 지키는 고통을 알기나 한단 말이냐!"


아마룬의 목소리는 벼랑 끝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날카로웠으나, 노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삼키며 눈앞의 거인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말하신다면, 지금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들보다 당신이 나은 점이 대체 뭔데요? 저들은 당신 없이도 저항하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어디에 있냐구요!!"


아마룬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노아의 말은 그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꿰뚫는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형이 준 인형을 더욱 세게 쥐면서, 마치 어릴 적 자신에게 외치듯 말을 이었다.


"저는 어릴 적, 카노라스를 거닐던 거인 전사들을 동경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두려움이란 걸 모르는 자들이라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니 제가 틀린 것 같아요. 물론, 여전히 당신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도 이렇게 숨어서 과거에만 매달리며 세상과 등을 지다니... 이게 정말 제가 믿었던 거인의 모습인가요?"


아마룬은 손을 떨면서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분노도, 슬픔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뼈아픈 회한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노아는 길게 숨을 내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뒤 등을 돌렸다.


"......정말로 실망했어요.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봐요."


노아가 대장간을 떠나자, 아마룬은 홀로 남아 잠시 굳은 듯 서 있었다. 눈은 노아가 사라진 문을 보며 멈춰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보다 더 먼 과거 속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문장이 망치처럼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아마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녹슨 갑옷을 바라보았다. 먼지에 뒤덮인 갑옷. 그 안에 남은 건 시간도, 전투도 아닌... 책임이었다. 그는 한 걸음 다가가 갑옷을 들었다. 거대한 손이 녹슨 금속을 따라 움직였다. 전장에서 생긴 균열들, 그리고 그날의 공포를 증명하는 깊은 상처들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 속에 남아 있는 건 두려움이 아닌 전사로서의 맹세였다.


식어 있던 생명의 심장이 다시 불을 품었다. 아마룬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타오르는 화염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던 도끼를 꺼냈다.


노아는 대장간을 나와 검붉은 하늘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가슴속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엉켜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더는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멀리 전선 쪽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불길이 그의 숨을 짓눌렀다. 전선 후방으로 돌아온 노아는 피와 먼지로 얼룩진 병사들 사이를 헤집으며 시즈와 아로스를 찾았다. 두 사람은 급하게 재정비된 병력과 함께 교회 부지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노아!"


시즈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피로가 짙게 드리운 얼굴에는 말 못 할 절망감이 어렸다.


"대장간에 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거인을 설득했나요?"


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결국 오지 않겠다는 건가요......"


시즈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흘렸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끝이에요. 저들을 막을 방법이 없어요......"


그때, 전선을 바라보던 아로스가 입을 열었다.


"더는 이곳에 남을 수 없습니다. 후방의 마을로 철수해서 새로운 방어선을 짜거나, 우회해서 언령을 찾는 여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뭐라구요? 전선을... 버린다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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