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노아가 당황과 격앙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남쪽은... 남쪽은 진짜로 끝장나는 거잖아요!"
아로스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억지로 버티려 한다면 전멸합니다. 지금 남은 병력과 자원으로 저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한 것보다 더 나은 마땅한 대안이 있습니까?"
"그럼 여기서 싸우다 죽은 병사들은요? 전선을 지키려고 목숨 걸었던 사람들은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등을 돌리면... 저분들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야 다시 싸울 수 있고, 끝까지 저항할 수 있습니다. 감정으로 움직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로스의 말은 비정하지만 틀리지 않았다. 그 말이 전선의 실상을 정곡처럼 찔렀기에 노아는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했다. 무너지는 방어선과 쓰러져가는 병사들,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현실. 참혹함으로 가득한 눈앞은 어지러웠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차오르는 무력감이 점점 커져갔다.
"서둘러 결정해야 합니다. 방어선 앞에 지른 불길이 교회를 오래 지켜주진 못합니다."
그 순간, 불길 너머에서 들려온 한 줄기 포효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지축을 울리는 저음과 함께, 피와 연기로 가득한 방어선에 마침내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거대한 불꽃의 장막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치며, 눈앞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교회를 향해 전진했다. 발밑의 대지가 무너지는 듯 흔들릴 때마다 병사들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온다! 다시 또 몰려온다!"
"불! 불을 더 질러! 막아야 해—!!"
"안 돼, 안 돼! 이건 막을 수 없어! 도망쳐!"
괴물의 발밑에 몰려든 파도의 악마들은 그림자에 삼켜지듯 사방으로 퍼졌다. 놈들은 시커먼 독기를 뿜어내며 미친 듯이 돌진했고, 몇몇은 방패를 뚫고 병사의 갑주 틈을 물어뜯었다.
"으아아아아악!! 내, 내 팔! 팔이!!"
"뒤로! 대열을 정비—커헉!"
"제발, 제발 도와줘! 살려줘! 제발——!!"
전열은 그야말로 무너지는 성벽 그 자체였다. 괴물이 한 번 팔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병사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내던져졌고, 그 틈을 타 파도의 악마들이 부상자에게 달려들었다. 쓰러진 병사들은 그대로 물어뜯겼고, 놈들에게 물린 병사들의 몸은 끔찍하게 비틀리며 인간의 형체를 벗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병사들이 눈동자가 뒤집힌 짐승처럼 아군을 향해 날뛰자 전열은 다시 한번 붕괴의 조짐을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죽습니다!"
시즈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녀는 이능을 펼쳐 병사들을 보호하려 애썼지만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의 물결은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로스는 곧장 시즈와 노아를 뒤로 밀어내며 단호히 외쳤다.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십시오! 이건 무녀님께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 됩니다! 귀공께서 혼자서 감당하실 수 없습니다!"
그때였다.
대지를 가르며 내리찍는 듯한 기세로, 괴물의 팔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거대하게 일그러진 곤봉 같은 팔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안 돼!"
시즈가 절박하게 외치며 손을 들어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광휘는 단 한순간에 깨져버렸고, 터지는 빛 속에서 시즈는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로스가 곧장 방패를 들어 올렸으나 홀로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곤봉 같은 팔이 내려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터어어어엉—————
일촉즉발의 순간, 하늘을 가르듯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괴물의 안면에 정통으로 꽂힌 불덩이는 폭발하듯 터졌고,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가 그 머리를 감싸면서 괴물은 고통스러운 괴성을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시선이 불이 날아온 방향을 향하자, 저 멀리 불길 너머로 거대한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노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녹슬고 거대한 갑옷, 도끼와 쇠사슬을 든 채 달려오는 거인 전사. 갑옷은 흠집과 녹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투구 속의 녹안은 타오르는 쌍성처럼 빛나고 있었다.
땅이 울렸다. 그건 단순히 달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한 걸음마다 대지가 심장을 울리듯 진동했다. 아마룬은 달리는 도중 온몸에 불을 끼얹듯 휘발성 물질을 뿌리고, 갑옷 전체에 불을 붙였다. 불꽃은 삽시간에 타올랐고, 그는 마치 살아있는 불덩이처럼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아마룬보다 훨씬 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불길과 돌진의 충격에 안면이 박살 나면서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아마룬으로부터 옮겨 불은 불꽃이 전신을 불태우자 괴물은 뒤엉킨 비명과 함께 몸부림쳤다. 녹아내린 살점과 고름이 사방으로 튀면서 땅은 끈적한 액체로 더럽혀졌다.
"후퇴하십시오! 괴물은 거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전열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아로스가 외치자 병사들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대열을 유지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시선은 누구 하나 떼지 못했다. 눈앞에서 파괴적으로 괴물을 몰아치는 거인의 모습은 단순한 전사가 아닌 대지의 분노가 현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룬은 괴물이 불길에 휘청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도끼를 높이 들어 올리며 괴물의 몸통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쳤다. 도끼날은 괴물의 살점을 깊숙이 파고들며 거대한 상처를 남겼고, 괴물은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러 방어하려 했지만 팔들조차 하나씩 잘려나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곧이어 반대 손에 쥔 쇠사슬이 거칠게 휘둘러졌다. 사슬이 휘도는 궤적마다 공기가 찢어졌고, 수십 마리의 파도의 악마들이 그 일격에 휩쓸려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아마룬은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괴물과 악마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전장을 압도했다.
팔이 모두 잘려나간 괴물은 비틀거리며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거대한 몸이 움츠러들더니 갑자기 튀어 올랐고, 돌연 안면이 찢어졌다. 갈라진 틈새로 거대한 눈이 솟구쳤고, 그 눈동자 안쪽이 다시 갈라지며 입이 벌어졌다. 이빨과 살점이 얽힌 그 입 안에는, 또 하나의 눈이 뒤틀리며 응시하고 있었다.
그 형상은 아마룬의 머릿속에 깊이 박힌 공포의 잔상과 똑같았다. 과거 카노라스에서 마주했던 악몽. 지난 15년을 괴롭혔던 그날의 형상이 눈앞에 다시 펼쳐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괴물이야말로, 자신을 짓눌러 왔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실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는 포효하며 괴물의 입 안으로 두 팔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끈적하고 불길한 살덩이의 감촉과 자신을 무너뜨렸던 공포와의 정면 대면. 그러나 이번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죽어라아아——!!!”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전력을 다한 그의 팔이 괴물의 입을 양쪽으로 벌려 찢어버렸고, 괴물의 절규는 전장을 뒤흔드는 단말마로 바뀌었다. 몸이 반으로 찢겨 나간 괴물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땅 위로 붕괴했고, 끔찍한 악취를 남긴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아마룬은 도끼를 움켜쥔 채 다시 전장으로 몸을 던졌다. 주위엔 여전히 수많은 파도의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도끼는 불꽃처럼 휘둘러졌고, 쇠사슬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악마들을 무너뜨렸다. 전사의 움직임은 거칠었고,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다이크의 말대로였다.
아마룬은 단신으로 전장을 뒤흔드는 1인 군단과도 같은 전사였다. 파도의 악마들은 그의 앞에서 흠집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터져나갔다. 불길을 두른 거인 전사의 도끼와 사슬 앞에서 그들은 짐승도, 괴수도 아닌 허약한 연기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입니다! 부상병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십시오!"
아로스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부상자는 저쪽으로! 어서!"
"방패를 들어! 대열을 유지해!"
병사들은 서로에게 짧게 지시를 날리며 피투성이가 된 동료들을 부축해 교회 쪽으로 이끌었다. 부패에 물든 갑주, 피로 번진 얼굴들. 고통과 피로가 온몸을 덮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불이 살아나 있었다.
전방에서는 여전히 아마룬이 싸우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파도의 악마들이 에워쌌지만 단 하나도 그를 뚫지 못했다. 도끼를 휘두르며 길을 열었고, 쇠사슬을 몰아쳐 악마들을 쓸어냈다. 그의 모습은 살아 있는 성벽과 다름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치밀었다. 머릿속에서 거인을 바라보던 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전사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게 아니야.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싸우는 법을 배운 거야.'
샤비트는 카브르와의 연결이 끊어진 순간, 전선을 집어삼키려 했던 괴물이 쓰러졌음을 직감했다. 심연의 피를 부여받은 존재가 쓰러질 리 없다는 확신은 산산이 조각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냉기 어린 분노였다.
"또 실패인가......"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스테나 전선, 그리고 그곳의 병사들. 이번 계획이 성공했다면, 남쪽 방어선은 무너지고 무녀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지난번 안식교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어그러졌다.
'이번에는 도대체 무엇이 나의 계획을 막은 것이지...?'
원인을 곱씹던 그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거인. 몇 년 전, 폐인이 된 상태로 시스테나 전선으로 들어간 거인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각성해 계획을 망쳤다는 가설만이 그럴듯하게 떠올랐다. 그 거인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짐덩이처럼 보였는데, 왜 이제 와서 전사의 본능이 깨어난 것인가? 샤비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두운 밤 속의 칼날처럼 번들거리는 시선이 오염된 공기를 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패에 잠식된 이 평원조차 그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유용한 장기판이었다. 평원을 서성이며 바들거리는 파도의 악마들. 계획은 어그러졌어도, 이놈들은 충분한 혼란을 남겼다. 실패라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나 더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주교의 은혜를 입은 육신조차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대지의 부패는 깊고도 무거웠다. 독기와 피비린내, 부패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지만 샤비트는 거부하지 않으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히려 받아들이면서, 어깨를 핀 채로 한 발씩 천천히 평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두 번의 패배는 샤비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주교의 뜻이 여전히 그에게 힘을 내리고 있는 한, 샤비트는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더 크고, 더 치명적인 방식으로.
지옥 같은 밤이 지나면서 시스테나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평화라 부르기엔 여전히 공기는 무거웠고, 죽음의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전선 앞에는 여전히 수천의 파도의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마룬이 만들어낸 거대한 불꽃 방책이 대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검붉은 불길이 타오르며 놈들을 저지했고, 파도의 악마들은 그 장벽에 가로막힌 채 타들어 가며 괴성을 질러댔다.
싸움의 대가는 처참했다. 시스테나 전선은 절반 이상 붕괴되었고, 2천여 명의 병사 중 살아남은 이들은 3백 명이 채 안 됐다. 전선에서 동료를 잃는 일은 낯설지 않았지만 방어선 바깥에서 쓰러진 자들은 대부분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부패에 잠식되거나 뒤틀린 괴물로 변해 동료들을 덮쳤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전우들이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주검으로, 혹은 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 광경은 병사들의 가슴에 깊은 절망을 새겼다.
병사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말을 잃은 이들은 산산조각 난 전장을 바라보거나, 허공을 응시했다. 불에 타 식어버린 전우의 시신을 껴안고 울부짖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고향을 잃고, 이제는 동료마저 잃어버렸다.
시즈와 노아, 그리고 남아 있는 병사들은 교회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부상자들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 중 온전히 정신과 육체를 유지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여기도 있어! 들것을 가져와! 빨리! 시간이 없어!"
"붕대가 바닥났습니다. 일손도 턱없이 부족해요!"
"이 사람 좀 잡아 주세요! 발작이... 발작이 너무 심해!"
살려낸 이는 고작 스무 명 남짓. 하지만 그들조차 대부분 깊은 상처를 입었고, 온전한 사지를 지닌 이는 손에 꼽혔다. 그 안에서 더 많은 병사들을 살릴 수 있으리란 희망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시즈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의무를 다하려 애썼지만 심장은 매 순간 무너지고 있었다. 눈앞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더는 이 참혹한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손끝에서 아직 살아 있는 체온이 느껴질 때마다 희망과 절망이 뒤엉켜 머릿속을 울렸지만 그들조차 마지막을 향해가는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한계가 너무나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시즈는 울음 섞인 숨을 꾹 참으며, 떨면서도 다시 환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