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령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을 살폈다. 상처와 먼지로 얼룩진 너머에는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배어 나왔다. 청회색 머리칼은 땀과 먼지로 엉켜 있었지만 은은히 빛을 띠었으며,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 안에는 단단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복장은 먼 길을 걸어온 듯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졌으나 품위가 느껴지는 그 모습에 기사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 저토록 무너지지 않은 눈빛을 마주한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혹시... 무녀님이십니까?"
순간, 여인의 몸이 굳었다. 조금 전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에 불안한 기색이 어렴풋이 서렸다. 자신을 향하던 더러운 손길과 비열한 웃음소리, 음흉한 욕망이 서린 눈빛들. 얼마 전까지 마주한 위선과 배신, 행방불명된 무녀들에 관한 불길한 소문들까지.
하지만 눈앞의 기사와 병사들을 보며 안도의 숨을 들이쉬었다. 갑옷에 새겨진 카노라스의 첨탑 문양과 추적자들의 은신처에까지 들어와 자신을 구해낸 용기, 마지막으로 그들의 진지한 눈빛에서 불순한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아닙니다. 제 이름은 시즈. 견습 무녀입니다. 마지막 시험을 위해 고행의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무녀님이라면... 서쪽의 아우로라에서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기사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서쪽 대륙의 히드니스 산맥 깊은 곳, 창은의 강 상류에 자리한 아우로라 신전. 그곳은 고룡 아텐시아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을 용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무녀들의 성지였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서쪽 대륙과의 왕래는 15년 전부터 완전히 끊기지 않았습니까? 거대한 절벽과 휘몰아치는 기류 때문에 그 누구도 건너올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기사의 물음은 당연했다. 서쪽은 갈 수 없는 땅이 된 지 오래였다. 그 불가능한 경계를 넘어왔다는 여인의 말에 기사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고 시즈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우로라에 계신 지고의 존재께서 이곳 안식 교회에 언령이 내려왔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끊어진 절벽 사이에 마법의 길을 이어주신 덕분에 그 언령을 확인하러 이 먼 길을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시즈는 간절한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혹시... 교회로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사는 멍하니 시즈를 바라보았다. 15년 만에 열린 길, 아우로라의 무녀, 그리고 안식 교회에 내려온 언령. 절박하게 그 언령의 뜻을 읽어줄 이를 찾고 있던 와중에 신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방식으로 무녀가 나타났다라. 이것을 과연 단순한 우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기묘한 전율을 느낀 기사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희도 그 언령을 읽어줄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교회로 모시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병사들이 즉시 경계 태세를 갖췄다. 마치 추적자들의 재습격을 경계하듯이 주위를 빠르게 훑으며 시즈를 감싸듯 배치되었다.
시즈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한 겹의 벽이 세워진 듯한 감각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단호했고, 그 단호함은 오랜 혼란 속에서 드물게 마주친 '질서'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어디지.'
깊은 숲 속, 기사는 조용한 강가에 홀로 서 있었다. 그를 둘러싼 풍경은 말 그대로 숨죽인 어둠이었다. 나무들은 검은 장막처럼 하늘을 가렸다. 빛도, 생명도, 바람조차 닿지 않는 기괴한 침묵의 숲. 공기에는 무겁고 서늘한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사이로는 강물이 아주 천천히, 묵직한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마치 끝없는 시간처럼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고, 기사는 본능적으로 강줄기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갑옷이 내는 쇳소리만이 적막 속에서 메아리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의 흐름마저 희미해져 갈 때 즈음, 기사는 강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은 절벽이었다. 물줄기는 폭포가 되어 아래로 쏟아져 내렸고, 아래로 보이는 것은 오직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으니... 마치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죽은 것인가.'
기사는 눈앞의 광경과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며 자신이 죽음을 맞이했음을 직감했다. 이곳이 사선(死線)의 기슭, 삶과 죽음이 맞닿는 곳이라는 사실을.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자 흩날리는 물방울과 깊은 어둠 사이로 무언가 그를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강에 몸을 맡기면... 진정으로 사후세계로 가게 되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되뇌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끝낸 기사는 마치 마지막으로 남은 의무를 다하는 기분으로, 강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작스러운 음성이 기사의 머릿속을 울렸다. 목소리는 단순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 전체를 뒤덮었다.
대지의 힘이 깃든 발걸음이여
무(無)로 돌아가는 강 저편에 닿은 그대에게 운명의 실이 엉키듯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장막 너머로 돌아가, 오래전 신들의 잘못으로 빚어진 진실을 꿰뚫어 보라.
그리고 이 땅의 어머니의 심장을 찾아, 그 숨결이 이어지는 곳으로 나아가라.
의식 속의 음성이 끝나자 가슴속에서 무언가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기사가 깜짝 놀라 품을 열어 물건을 꺼내 들자 그것은 순식간에 밝은 빛으로 형상화되었다. 무엇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눈부신 광휘가 그의 몸을 감싸 안더니, 이내 사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소멸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한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강의 흐름 너머에 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기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식 교회에 도착한 시즈는 그 참담한 모습에 말을 잃었다.
교회는 엘나가 사라진 후 세계에 드리운 균열의 영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붕괴된 벽과 부서진 기둥, 그리고 천장이 무너져 외부와 내부의 경계마저 흐릿해진 본당은 더 이상 성스러움을 느낄 수 없는 폐허였다. 제단은 부서져 나뒹굴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조각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한때 신성한 빛으로 가득 찼을 공간에는 이제 싸늘한 바람만이 감돌았다. 본당 벽에 걸려있는 신의 형상을 띈 금빛 우상만이 희미하게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즈는 찢어진 외투를 벗고 교회에 남아 있던 낡은 어두운 사제복을 받아 입었다. 사제복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위해 준비된 옷처럼 몸에 딱 맞았고, 옷을 정돈한 시즈는 홀로 본당으로 향했다.
본당 내부 또한 부러진 기둥과 흩어진 돌무더기로 가득했다. 시즈는 부서진 제대 앞으로 다가가 잠시 무릎을 꿇고 묵상에 잠겼다. 죽은 듯이 고요한 본당 안에서 짧은 묵상을 마친 시즈는 오랜 기도를 되새기듯 반쯤 부서진 머릿돌에 새겨진 언령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즈를 구출했던 기사가 조심스레 본당으로 들어섰다.
"무녀님, 어떤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기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시즈는 머릿돌을 바라보며 천천히 언령을 읊었다.
"차갑게 식은 전사의 생명이 다시 타오르고,
침묵의 대지가 길을 속삭이면 헤매던 발걸음은 운명을 마주하리라.
부서진 어머니의 심장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게 되면,
사선에서 돌아온 이가 새로운 시대를 영접하리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기사는 언령의 문장을 되새기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차갑게 식은 전사의 생명', '사선에서 돌아온 이'.
언령은 명백히 죽은 자의 귀환을 말하고 있었다. 15년간 죽은 동료들을 묻어온 자신에게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이었건만... 신의 뜻이라는 것이 정녕 이토록 비틀린 희망을 말하는 것이었나.
"어머니의 심장이라면... 엘나를 뜻하는 것 같군요. 그리고 죽었던 전사가 되살아나 이 모든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이야기겠지요?"
"언령의 말대로라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사님, 혹시 침묵의 대지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처음 듣는군요. 침묵의 대지... 모든 것이 침묵하고 있는 대지......"
"짐작 가는 것이 있으신가요?"
"...죽음의 땅, 카노르 평원을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기사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감정이 억눌려 있는 듯 들렸다.
"무녀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여지껏 제가 봐온 안개의 땅의 모습은 끔찍했습니다. 땅은 오염됐고, 살아있는 생명들은 파도의 악마들에게 휩쓸려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 변해버린 모든 것들이 여전히 저희 모두를 위협하고 있죠."
기사의 말에 담긴 깊은 절망은 본당을 감싸는 공기만큼이나 무거웠고, 그는 탄식하며 말을 덧붙였다.
"엘나가 사라진 뒤, 제 고향 카노라스는 멸망했습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죠. 신들은 침묵했고, 고향을 잃은 동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젠 시스테나 전선을 지키는 동료들을 제외하면... 남은 사람들은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습니다."
기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허탈하게 웃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저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모두 사실이었다. 엘나의 행방불명 이후, 신들의 도시라 불리었던 카노라스는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황금의 땅이라 불리던 카노르 평원은 부패로 인해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다.
시즈는 조용히 눈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의 갑옷은 세월의 흔적과 상처로 가득했다. 패인 흠집, 금이 간 금속, 벗겨진 문양.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이 오래 버텨온 무장이었다. 녹슬고 찢긴 그 갑옷은 단지 무기를 막는 도구가 아닌 기사가 견뎌낸 시간과 포기하지 않았던 날들의 증표였다. 그것을 입은 채 버텨온 지난날들은 얼마나 치열하고 가혹했을까. 절망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칼을 놓지 않았을 테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사님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마르크입니다."
"그래요, 마르크. 당신의 슬픔을 저도 이해합니다. 저 또한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삶에 쫓긴 이들이 서로를 속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거래하는 모습을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믿고 있어요. 절망 속에서도,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도... 누군가는 칼을 내려놓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위해 버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오늘 당신과 병사분들이 보여준 모습처럼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고, 마르크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의 침묵은 짧고 조용한 동의처럼 느껴졌다. 시즈는 문득, 고룡 아텐시아의 말을 떠올렸다.
『...엘나가 사라진 뒤, 수많은 신들이 행방불명되었고 신계로 가는 길이 파괴되면서 우리들의 힘은 점점 쇠락해져 가면서 이 땅은 균열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세간에는 안개의 땅 곳곳에 언령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다. 내가 지금 말하는 이야기를 그대 또한 알고 있을 테지. 나의 눈과 귀가 이미 예전 같지 않아 지금 당장 충분히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머지않아 섭리를 거스른 존재가 나타날 것이다. 그 존재는 이 땅의 미래와 나조차 알 수 없는 과거의 진실을 찾아내어 바로잡을 것이다. 그 존재를 찾아야 한다. 그와 함께 세계 곳곳에 내려진 언령을 밝혀야 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 단서는 엘라리모스의 안식 교회에 있으니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대의 순례길에 이런 큰 짐을 지어 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구나. 창은의 강 남쪽 경계선까지의 여정만큼은 나의 권능으로 그대를 지키리라. 이후의 길은 오롯이 본인의 결단과 믿음에 달려 있다.』
"...지고의 존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섭리를 거스른 자가 세상에 나타나, 이 땅의 미래를 열고 잊혀진 과거의 진실을 밝혀 바로잡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시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릿돌에 새겨진 언령과 고룡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언령에 나오는 '사선에서 돌아온 이'가 바로 그 존재와 동일한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를 찾으려면 죽은 자가 묻힌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근처에 무덤이 있나요?"
"멀지 않은 곳에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셔야 합니다. 곧 짙은 안개가 몰려들 것입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안내를 부탁드릴게요."
시즈는 무덤으로 갈 준비를 하며 교회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희망의 불씨를 믿고 있었지만, 교회의 병사들에게는 현실의 잔혹함이 남긴 절망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기사는 어느 무덤 속에서 깨어났다. 싸늘한 공기 덕에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으나 강기슭에서 들었던 그 음성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대지의 힘이 깃든 발걸음이여.
무(無)로 돌아가는 강 저편에 닿은 그대에게 운명의 실이 엉키듯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장막 너머로 돌아가, 오래전 신들의 잘못으로 빚어진 진실을 꿰뚫어 보라.
그리고 이 땅의 어머니의 심장을 찾아, 그 숨결이 이어지는 곳으로 나아가라.
기사는 깨달았다. 분명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자신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이곳으로 이끌어 놓았다는 것을. 아직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는 품을 더듬어 빛에 감싸인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등불이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등불은 심지도 불꽃도 없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울림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등불은 마치 어떤 방향을 알려주는 듯 공명을 반복하며 은은한 빛을 깜빡였다. 기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있던 무덤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