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
"라그나르 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장로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신과 함께하셨지. 불의 심판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을 여신께서 직접 구해주신 뒤로, 장로님은 그분의 가르침 아래 성장하셨다. 여신께서는 장로님에게 있어서 신앙 그 이상... 아니, 삶의 전부였을 거다."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로스는 문득 요새 너머 북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카야와 바르그가 영면에 들었던 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잃은 듯이 구슬프게 울부짖던 늙은 늑대인간의 눈빛과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했다. 삶의 전부를 잃은 자의 눈빛이 그토록 공허했던가.
"장로님이 연설을 끝내신 뒤 모든 사람들이 놀랐지. 홀로 떠나겠다고 선언하셨을 때 말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 없었다. 여신께서 대체 무엇을 보여주셨기에......"
말 끝을 맺지 못한 자이론의 눈빛은 복잡했다.
"우리가 함께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한사코 허락하지 않으신 걸 보면 위험천만한 일이 분명하다. 혹시, 너희는 뭔가 알고 있나?"
그의 질문은 예리했지만 날이 서 있진 않았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 실린 눈빛이 아로스에게 향했다.
"우리도 정확히 아는 것은 없다."
"그런가... 정말로 혼자 떠나실 생각이신가 보군. 다른 건 몰라도, 장로님께서 떠나시면... 다시는 뵙지 못할 것 같아. 묘하게 그런 예감이 들어."
자이론은 한숨처럼 말을 끝맺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목소리 끝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불안이 스며 있었다. 그건 단지 존경하는 누군가를 잃는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타리안 전체가 감당해야 할 상실의 무게를 예감한 자의 침묵이었다.
시즈는 조용히 자이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라그나르는 단순한 상관이 아니었다. 존경과 경외, 그리고 믿음의 중심이었으며, 그건 자이론뿐만이 아닌 모든 검은 늑대들도 같았다. 명령이 아닌 마음으로 따르는 지도자. 그 빈자리를 남은 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말이 길어졌군. 어쨌든, 이제 우리는 남쪽으로 향할 거다. 지금은 여신께서 남기신 결계 덕분에 이단자 놈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않지만 결계를 벗어나게 되면 언제든 대비해야겠지."
자이론의 눈빛은 이미 먼 남쪽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이 맞나요?"
시즈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쪽은 협곡과 산맥이 겹겹이 막아선 방향이었다.
"요새 뒤편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 하지만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한 커다란 땅굴이 있어. 그 길을 따라가면 알 수 없는 산으로 이어지더군. 숲이 너무 울창해서 주변을 제대로 살필 수조차 없었지만 말이지."
"그렇게 울창하다면... 부패가 닿지 않은 땅이란 뜻이겠네요."
"맞아. 숲이 있다는 건 그 일대가 부패로부터 살아남았다는 증거니까. 시스테나를 거쳐 가는 길은 위험해. 전사들이라면 몰라도 주민 수천 명을 이끌고 가기엔 무리야."
"그 땅굴은 누가 만든 거죠?"
"그런 우리도 모른다.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며 계속 지켜봤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를 마주친 적도, 흔적을 찾은 적도 없었지. 생명의 흔적도, 부패의 냄새도 없었고... 심지어 추적자 특유의 악취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두더지 같은 이단자들도 모르는 길이라면... 누군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서 숨겨둔 통로겠지."
자이론의 목소리 끝에는 명확히 감춰지지 않은 의구심과 경계가 배어 있었다. 그곳으로의 이동은 마지못한 선택이었고, 그 또한 전혀 탐탁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지독한 추적자들조차 모르는 길이라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겨둔 것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시즈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아무쪼록, 주민들을 무사히 이끌고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하시길 바랄게요."
"나는 주민들과 바로 이동하지 않아."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시즈가 반문하듯 되묻자, 자이론은 짧게 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렸다.
"장로님께서 명하셨다. 나와 몇몇 검은 늑대들이 너희 둘을 서쪽 대륙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라고 말이지. 이단자들이 꽤 오랫동안 너희 두 사람을 노려온 것 같더군."
예상치 못한 말에 시즈는 짧은 망설임을 보였다. 그 순간, 자이론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날카롭진 않았지만, 한층 진지한 기색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주민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시즈의 질문이 채 끝나기 전에, 요새의 성문 너머로 라그나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주민들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하지만 자이론을 포함한 소수의 정예만이 호위를 맡을 것이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주민들과 함께 이동하며 그들의 안전을 책임질 테니 말이지요."
요새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 라그나르는 두 사람을 마주하며 짧은 인사를 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또한 짙은 우려와 숙고의 그림자가 담겨 있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단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녀님께서도 이미 여정을 통해 겪으셨겠지만... 엘나가 사라진 뒤 수많은 무녀들이 실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녀들을 이용해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최소한 서쪽으로 향하시는 여정에서만큼은 굳이 두 분이 위험에 노출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그나르 경."
아로스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하자, 라그나르는 검은 늑대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놈들이 쓸모 있는 녀석들이길 바라야겠지요. 요새 후문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동하십시오. 서둘러 움직인다면 금방 서쪽 대륙에 도착할 겁니다."
"네...?"
시즈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북서쪽으로요? 경 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지금 서쪽 대륙으로 통하는 길은 전부 끊긴 지 오래입니다. 유일한 길은 오직 남쪽 대륙의 최서단에 봉인된 다리뿐인데... 심지어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한참을 돌아야 해요. 최소 두 달은 족히 걸릴 거예요."
시즈는 말끝을 맺으며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증표를 꺼내 들었다. 순례를 위해 아우로라를 떠나는 자신에게 아텐시아가 건네준, 다시 돌아올 때를 위한 증표. 그러나 이 긴 여정을 다시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막연한 피로감과 함께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때, 라그나르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린 그의 표정은, 마치 누군가가 오래 준비한 장난을 꺼낼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두 분이 타리안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시즈는 눈을 깜빡이며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라그나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람이 스치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었다.
"타리안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가끔 이상한 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결이 아주 미세하게 뒤틀릴 때가 있지요. 최근,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랬습니다.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설명하기 어려운 감촉이었죠."
그는 손끝을 한번 툭 튕기고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런 징조들은 보통 이유 없이 오는 법이 없지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누가 다녀간 것도 아닌데... 간혹 그런 날이 있지 않습니까. 그저 어떤 흐름이 도달했다는 느낌처럼, 아주 멀리서 말입니다."
시즈는 그 말의 의미를 전부 알 수는 없었다. 라그나르의 어조와 시선 끝에는 말하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이 조용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눈앞의 늑대 인간이 전부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아로스가 고개를 돌리며 속삭이듯 자이론에게 물었다.
"...라그나르 경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지?"
"나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가끔 저러시거든."
자이론은 어깨를 으쓱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라그나르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여전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직접 가보시면 압니다. 아주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의 말 끝은 무언가 단단히 숨겨진 듯이 여운처럼 맴돌았다. 라그나르의 확신과 웃음 너머에 깃든 감정은 단순한 유쾌함이 아닌 기다림과 예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틈을 타 아로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경께서는... 떠날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준비는 한참 전에 끝났지요. 저는 그저 마지막까지 남아, 주민들 모두가 무사히 떠나는 모습을 확인할 뿐입니다. 이 늙은 전사에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몸도 쉴 수 있을 듯합니다."
시즈는 그의 말에서 단단한 각오와 오래된 피로를 함께 느꼈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부디 그 소명을 완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그나르 경"
곁에서 듣고 있던 자이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우려가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자, 그는 주춤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장로님. 정녕 혼자 가셔야만 하는 겁니까? 일부 검은 늑대와 함께 가시는 길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한번 저희와 남쪽으로 함께 이동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지......"
말끝은 자연스레 흐려졌고, 눈빛에는 커다란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라그나르는 깊은숨을 내쉰 뒤, 부드럽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젠 자네가 주민들을 이끌어야 하네. 내가 더 이상 젊은이들 앞을 막고 서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충분히 살았네. 어쩌면 너무 오래 산 건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이제는 그 삶이... 나를 지치게 만들고 있어."
라그나르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세월의 무게가 있었다.
"이 여정은 노병에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야. 나를 구했던 이들에 대한, 아주 오래된 빚을 갚는 길이기도 하지. 그러니 자네는 그 손에 쥔 무거운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게. 주민들을 끝까지 잘 지켜주게. 그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일세."
"......장로님."
자이론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울대 아래로 삼킨 숨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라그나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말게. 그때는 아무리 자네라도 가만두지 않을 걸세."
눈빛만으로도 확연히 선을 그은 그는, 곧 다시 평소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시즈와 아로스를 향해 마지막 말을 건넸다.
"자,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요. 두 분도 더 늦기 전에 떠나시지요.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이 게으르면 쓰겠습니까."
밝은 웃음소리는 짧게나마 어둡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걷어냈다. 하지만 시즈는 자이론이 남긴 말이 자꾸만 되새겨졌다. 이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마지막 모습이라면... 정말 이대로, 라그나르 경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걸까. 불안이 조용히 마음속을 눌렀지만, 그녀는 끝내 그 감정을 밀어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라그나르 경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보여주신 배려와 가르침,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아로스도 고개를 숙이며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라그나르는 조용히 웃었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 없이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
"노병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보다 두 분의 여정이 더 염려되니, 부디 무탈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그나르 경. 아텐시아의 지혜가 언제나 함께하시길."
시즈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라그나르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두 사람을 배웅한 뒤, 자이론과 검은 늑대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두 분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아까 했던 말은... 두 번 하지 않겠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자이론은 시즈와 아로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그나르는 두 사람과 검은 늑대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본 뒤, 이내 조용히 속삭였다.
"...전신 카야의 가호가 언제까지나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