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의 무녀 (3)

창은의 강

by 이샤라

압도적인 형상이 하늘을 가르며 내려섰다. 거대한 날개는 공간 자체를 휘어잡는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빛을 받아 번뜩이는 비늘 하나하나에는 태고의 시간이 새겨진 듯했다. 날카롭게 뻗은 발톱은 닿지 않아도 꿰뚫는 위력을 지닌 듯 허공을 갈랐다.


태초의 고룡, 아우로라의 지배자 아텐시아.


존재 그 자체가 말 없는 진실이었으며, 시간마저도 숨을 멈춘 듯 멎어있었다.


아텐시아는 위엄을 거두지 않은 채 우아하게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만으로 공기를 바꾸는 듯한 위압이 뻗어 나오자, 아로스는 마치 본능처럼 고룡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시즈의 말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


고룡의 눈은 지금껏 그가 마주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깊은 푸른빛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과 무게를 머금고 있었고, 그 안에 깃든 통찰은 단지 '이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았다. 세상의 진리를 넘어, 모든 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 자의 눈. 그것은 존재를 꿰뚫되, 결코 침범하지 않는 시선이었다.


「반년 만이로구나.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이곳에 있는 모두의 의식 너머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세월과 함께 쌓인 지혜와 고요를 품은, 분명한 여성의 음성이었다. 아텐시아의 시선이 대륙 너머의 먼 하늘과 시즈 사이를 오갔다. 그녀는 천천히 시즈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심신이 무사하여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실로 다행이로구나.」


"아닙니다, 지고의 존재시여. 당신의 은혜와 수많은 이들의 호의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시즈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답례하자, 아텐시아의 시선이 옆에 서있던 아로스에게로 천천히 옮겨졌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곧이어 부드럽고도 깊은 울림이 그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


「환시를 품은 이여. 드디어 그대와 마주하게 되었구나.」


아로스는 경외심과 놀라움 속에서 눈을 들어 아텐시아를 바라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담아, 무릎을 꿇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우로라의 지배자시여."


「나의 권속을 이 험난한 여정 속에서 무사히 지켜 주었구나. 그대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응하는 그의 어조와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텐시아는, 눈매와 입가로 엷은 미소를 띠었다.


「겸손하구나.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이 아이가 반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먼저 누리게 하라.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긴 여정 끝에 쌓인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하여라.」


한없는 세월을 품은 존재만이 낼 수 있는 부드럽고도 깊은 목소리는, 단순한 말이 아닌 헤아릴 수 없는 여운을 남기며 듣는 이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텐시아의 마지막 말은 권유를 넘어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가올 무언가를 예고하듯, 고요하고도 무게 있는 말이었다.


말을 마친 고룡은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녀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서쪽 끝 히드니스 산맥을 향해 사라지자, 빛의 다리 또한 먼지처럼 흩어지며 공중에서 사라졌다.


"남쪽으로 돌아갔다면 정말 오래 걸렸을 텐데... 아텐시아께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이렇게 빨리 도착했네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시즈는 창은의 강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사와 안도, 그리고 가벼운 들뜸이 실려 있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그보다는 라그나르 경께서 어찌 이리 정확히 예견하신 건지 그게 더 궁금하군요. 아우로라의 지배자께서 무슨 귀띔이라도 주셨던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다른 건 몰라도—"


시즈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에스트라 가도를 포함해서, 창은의 강이 보이는 저 너머는 모두 아텐시아께서 다스리는 영역이에요. 그 누구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죠. 그러니, 당분간은 저희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셔도 좋아요."


밝은 웃음소리가 길 위를 맑게 울려 퍼지자, 아로스는 시즈의 얼굴에서 오랜 시간 굳어 있던 긴장이 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리안의 휴식 속에서도, 병자의 마을의 아늑함 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고요히 피어난 미소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녀의 들뜬 마음은 이제 막 도착할 창은의 강을 그리며 천천히 빛나고 있었다.


"빨리 오세요! 귀공께서는 창은의 강을 처음 보시잖아요?"


마침내, 두 사람과 아우로라의 기사들이 가도의 산마루를 넘는 순간 시야에 펼쳐진 풍경은 누구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신비롭고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강은 새벽의 빛을 머금고 은빛으로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다. 대지 위를 굽이치는 물결은 찬 공기를 안은 안개와 어우러져 마치 천상에서 드리운 베일처럼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강을 따라 펼쳐진 완만한 경사의 계곡은 굳건히 뿌리를 내린 나무들로 빼곡했고, 이파리들은 고요한 물 위로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물살은 바위와 바위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며 흐르고 있었으며, 그 잔잔한 울림은 대지가 숨을 쉬는 듯한 음률처럼 퍼졌다.


수정처럼 맑은 강물 아래로는 햇살에 반짝이는 자갈들과 여린 물고기들이 아른거렸다. 강가의 잎들은 이슬을 머금고 빛을 쪼개며 반짝였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작은 빛의 점들이 흩어지듯 춤을 췄다. 물가를 따라 난 덤불과 이끼 낀 바위는 강이 오랜 시간 빚어낸 자연의 조각품처럼 보였고, 그 위로 새벽빛이 천천히 내려앉아 모든 것을 감쌌다.


강 건너에는 작은 마을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계곡과 숲, 강의 품 안에 고요히 스며든 그 마을은 마치 처음부터 이곳 자연의 일부였던 것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와 돌로 지어진 집들, 강가에서 물을 긷는 사람들, 돌담에 기대어 바느질을 하는 이들, 나뭇가지 사이로 손을 뻗는 이들의 모습까지. 모든 움직임이 강물처럼 유려하고, 자연처럼 조용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창은의 강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시즈의 목소리에는 벅찬 감동과 뿌듯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새벽의 물빛을 닮아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레클레스와 다리아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리아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 윤기 나는 갈기는 강물의 은빛을 받아 조용히 흔들렸고, 레클레스는 깊은숨을 내쉬며 느긋하게 발을 땅에 디뎠다. 그들은 바위틈에 피어난 풀 내음을 맡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이곳에 깃든 청명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듯이.


"이 녀석들도, 이곳이 특별하다는 걸 아는 모양이군요."


아로스가 낮게 웃으며 말하자, 시즈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레클레스와 다리아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강가를 거닐며 이슬 맺힌 풀을 입으로 뜯었다. 두 말의 몸짓에는 긴 여정을 마친 이들의 여유와 평온이 스며 있었다. 그들은 강과 계곡의 바람을 받아들이며, 마치 이 땅에 묻어 있는 평화의 결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음미하고 있었다.


시즈는 그런 두 말의 곁을 이끌면서 창은의 강을 구경시켜 주려는 듯 이곳저곳을 함께 거닐었고,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로스는 왜 서쪽 대륙이 세상과 단절되어야 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텐시아. 아우로라의 지배자이자, 서쪽 대륙의 수호자.


그녀는 부패의 손길로부터 이 세계의 일부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길을 끊어냈다. 그 선택은 결과만으로 본다면 틀림없이 옳았다. 강 주변의 자연은 여전히 순수했고, 마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안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평온은 부패와 혼돈으로 가득 찬 외부 세계에서는 더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기적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복잡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선택은 권속들을 위한 최선이었을지언정, 그 외의 이들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서쪽으로 향하던 피난민들에게 있어서 길이 끊긴 것은 침묵 속의 절망이었을 터였다. 아텐시아는 부패를 막아냈지만, 그와 함께 무수한 가능성과 생명의 길도 끊어내고 말았을 것이다.


아로스는 말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희생이라는 대가 위에 쌓인 기적이었다. 그렇다고 그 결정을 비판할 수도, 완전히 옹호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이자, 한쪽의 생존을 위해 다른 쪽의 가능성을 기꺼이 잘라낸 냉혹한 결단이을 터.


단절된 생존. 그것이 이 눈부신 평화의 진짜 이름 아닐까.


씁쓸함이 가슴 깊이 밀려들었지만 아로스는 그것을 구태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즈의 환한 얼굴에 자신의 무거운 심경을 드리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곁에 서 있던 아우로라의 기사 중 하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서쪽 대륙이 아직도 이토록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텐시아님의 힘 덕분입니다. 대륙의 길을 끊어 외부의 위협은 막아냈지만... 부패의 기운은 여전히 바람을 타고 스며들고 있죠. 하지만 그 기운마저도 아텐시아께서는 온몸으로 막아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 그분의 힘은 서쪽 대륙 전체를 감싸고 있는 셈이지요."


기사는 강물의 잔잔한 흐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힘이 다한다면, 이 땅 역시 끝내 무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평화도 결국 유한한 것일 뿐, 그 끝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아로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의 말이 잔잔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었고, 그제야 자신이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고룡의 결정을 단순히 차악이라 치부했던 것은... 그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편협적인 시선이었다는 것을.


아텐시아는 단순히 길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그 결단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뇌가 있었을까. 무엇을 포기하고, 누구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걸까. 그 생각과 동시에 아로스가 바라보던 창은의 강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흐르는 은빛 물결 너머, 평화라 불리던 이 풍경은 태고의 존재가 온몸으로 버티며 세운 마지막 장벽이었던 것이다.


기사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말을 맺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 바랍니다. 먼 길을 오신 두 분께 걱정을 안기고자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부디, 이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신 뒤 신전으로 돌아가시지요."


"알겠습니다."


간결하게 응답한 아로스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기사가 물러난 뒤에도, 그는 한동안 말없이 강을 바라보았다. 침묵은 더는 공허하지 않았고, 그의 눈길에는 조용한 존경과 깊은 성찰이 스며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들뜬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시즈가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열흘 정도 가면 제가 견습 무녀가 되기 전에 머물던 집이 있어요. 귀공께서도 편히 쉬실 수 있을 거예요."


시즈는 고개를 돌려 아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익숙한 미소가 번져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을 언저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저거 시즈 아니야?"


"맞네! 정말로 돌아왔구나!"


"언니!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아이들이 먼저 달려와 시즈에게 안겼고, 뒤이어 다소 주름진 손을 한 할머니가 허리를 펴며 다가왔다.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랬는데... 어쩜, 이렇게 밝은 얼굴로...!"


시즈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다들 잘 지내셨어요?"


"아무렴. 네 소식이 없을 때마다 애들이며 어른들이며 마음 졸이면서도... 그래도 넌 꼭 돌아올 거라 믿었단다."


"정말...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시즈의 웃음에 어른들도 따라 웃었고, 아이들은 옷자락을 잡고 여기저기서 순례 이야기를 해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지만, 아로스는 알아챘다. 그 눈빛 어딘가에는 말없이 삼켜낸 정서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향은 분명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 위안은, 오랜 시간 지워두었던 마음의 언저리를 다시 마주해야 하는 고요한 떨림이기도 했다.


아로스는 시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그 변화를 느꼈다.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언어보다 분명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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