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아래의 섬광
터질듯한 호흡이 갈비뼈를 때렸다. 입안에서는 여전히 쇠 맛이 맴돌았다. 멈추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달아나는 것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아로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던져준 돌 덕에 잠시 틈을 얻었지만 결국 언젠가는 붙잡히리라는 것은 자명한 결말이었다.
그 순간이 오면 더 이상 시즈를 지킬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불안이 현실이 된 듯, 끝내 눈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가로막았다. 뒤로는 뒤틀린 기사들이 광폭한 짐승처럼 거칠게 날뛰며 다가오고 있었고, 더 이상 물러설 길은 없었다. 궁지에 몰린 아로스는 시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검을 뽑았다. 절벽 아래를 뒤흔드는 삐걱거리는 관절음과 쇳덩이가 끌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어둠 속에서 뒤틀린 네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떨렸다. 한 명만으로도 위협적인 존재가 네 명이나 몰려오고 있었다. 목을 베고 허리를 끊어도 되살아나는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절벽 위에서 던져준 청록빛의 작은 돌을 떠올렸다. 놈들이 그것을 본 직후 광폭하게 변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이 돌 속에... 놈들을 꺾을 수 있는 실마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아로스는 달려드는 기사의 칼을 받아치며 벌어진 가슴팍에 돌을 밀어 넣고 자신의 칼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그러자 돌이 터져나가듯 빛을 발하며 청록색 광채가 칼끝을 타고 번졌다.
"그르르으으아아아아아악──!"
괴성이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기사의 몸은 비틀리며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처박히며 흔들렸다. 절벽 위의 누군가가 던져준 돌은 뒤틀린 기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아로스는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확신했다. 잠시나마 이 돌이 단지 눈앞의 기사들뿐 아니라 모든 심연의 힘을 지닌 존재들에게도 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스쳤다.
그러나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투구 너머에서 보랏빛 불길이 번득였고, 거친 발걸음마다 땅이 갈라지며 썩은 흙먼지가 튀었다.
첫 번째로 파고든 검격은 간신히 받아쳤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 팔이 저릿하도록 충격이 전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받아냈다. 이어진 두 번째 기사의 무기가 옆구리로 파고들어 왔으나 검의 측면으로 억지로 흘려냈다. 세 번째 일격은 바위가 낙하하듯이 무겁게 내려 꽂혔다. 검과 팔목을 타고 전해오는 힘에 뼈가 부러질 듯 흔들리면서 결국 균형이 무너졌다. 아로스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을 버텨내야 했으나 곧바로 검은 도끼가 머리 위에서 곤두박질쳤다. 그는 전신을 틀어 피하려 했으나 날은 어깨를 깊숙이 갈랐다. 둔탁한 고통과 함께 살을 찢으며 파고든 도끼는 단순한 철이 아니었다. 도끼날의 이빨 사이에서 쇄골을 꿰뚫었던 검은 기운이 흐르며 상처 안으로 파고들었다.
낮게 신음을 삼키며 억지로 도끼를 뽑아내자, 새까만 액체가 터져 나오면서 순식간에 고여 드는 피와 뒤엉켰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기사가 뼈를 닮은 듯한 기묘하게 비틀린 무기를 허리춤에서 꺼내 들고 다가왔다. 짐승의 등뼈를 그대로 찢어낸 듯 불규칙하게 꺾인 날들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명의 기사의 검격은 연이어 쏟아졌지만 아로스는 허리를 낮추고 몸을 굴리며 버텨냈다. 그러나 잇따른 공격 속에서 방어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팔뚝이 베이며 피가 흘렀고, 감각이 무뎌지면서 더는 힘을 받쳐낼 수 없었다.
그 사이, 아로스의 뒤로 벽에 기댄 채 늘어져 있던 시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흐릿한 시야가 흔들리며 초점을 잡으려 했고, 곧 눈앞에 홀로 뒤틀린 기사들과 맞서 싸우는 아로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움직이려 했으나 허리의 관통상은 여전히 몸을 짓눌렀다. 절벽에서 떨어진 충격도 뼛속 깊이 남아 있었다. 손끝을 떨며 억지로 허공을 붙잡았지만 마력은 모래처럼 흩어져 흘러내렸다.
'제발...! 지금이라도... 제발, 제발!"
간절한 절규가 속으로 터져 나왔지만 몸은 끝내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즈는 이를 악물며 다시금 손을 뻗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고, 온몸이 비명을 지르듯 저항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발현되지 않았다. 절박하게 내민 손끝은 허공을 움켜쥘 뿐,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순간, 아로스의 방어가 무너지는 동시에 차갑고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귀공!"
시즈의 비명이 절벽 아래로 메아리쳤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흔들렸다. 그러나 아로스는 칼날이 더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밀려나면 칼은 그대로 시즈에게 닿을 터였다. 이를 악물고 기사의 다리를 힘껏 걷어차 넘어뜨렸지만 곧바로 또 다른 기사가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터어어엉—————
세상이 흔들렸다. 눈앞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아로스의 몸이 무겁게 무너지며 시즈의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안 돼——!!!"
시즈는 절규하며 온몸으로 아로스와 기사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검게 그을린 손끝에서 불길처럼 이능이 피어오르더니, 거칠게 튀어나온 마력이 전신을 감싸면서 원을 그리듯 앞으로 퍼져 나갔다. 시즈는 죽을힘을 다해 보호막을 펼쳐내고 있었다.
"...무녀님...... 어서...... 도망을......"
아로스의 희미한 목소리가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싫어요!"
"......제발...... 무녀님만이라도......"
"싫어요! 싫단 말이야!"
시즈의 목소리는 터져 나오듯 떨렸다. 눈앞의 모든 고통을 삼켜내며, 그녀는 끝내 외쳤다.
"내 무력함 때문에, 더는... 더는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검게 타버린 손의 균열에서 푸른 벼락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왼쪽 눈에서는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능의 과부하로 인해 육체가 마력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시즈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죽여버리겠어!"
죽음을 각오한 외침과 함께 푸른 벼락이 떨어졌다.
콰과과광———————
정통으로 맞은 기사 하나는 괴성조차 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과부하에 짓눌린 몸은 더 이상 마력을 받아내지 못하면서 보호막마저 흩어져 사라졌고, 그보다 더한 공포가 눈앞에 놓였다.
아로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귀공?"
시즈의 떨리는 손끝이 쓰러진 어깨에 닿았다. 수 차례 흔들어봐도 미동조차 없었다. 피에 젖어 무너진 그의 형체 위에서, 그녀의 가슴은 얼어붙어갔다.
‘거짓말이야... 그렇지? 이렇게 쓰러질 리가...'
언제나 앞에 서서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 누구보다 강하게, 흔들림 없이 버텨온 그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리 없었다.
"일어나요..."
새어 나온 목소리는 간절한 기도와도 같았다. 억눌러온 감정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낯설고도 간절한 이름이 터져 나왔다.
"아로스... 제발...!"
그 부름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고,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이 떨어져 그의 피 위로 번졌다.
"싫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떨렸다.
"언제나 내 곁에 있었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떠나버리면 어떡해...!"
대답 대신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훑었다. 뒤를 돌아보자 뒤틀린 기사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 시선은 시즈가 아닌 그녀의 뒤에 쓰러진 아로스를 향한 것이었다.
"오지 마!"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이 폭발했다. 시즈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든 채, 아로스를 향해 들어오는 칼을 맨손으로 붙잡고 앞을 막아서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다가오지 마! 그에게 털끝 하나도 닿을 수 없어! 절대로 안 돼!"
타버린 검은손에서 피가 흘러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기운이 그녀의 몸을 좀먹어 들어갔지만 시즈는 물러서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마! 그를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거야!"
그 순간, 뒤틀린 기사 하나가 허리춤에서 또 다른 칼을 뽑아들며 그대로 시즈의 왼쪽 어깨를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차가운 칼날이 천천히 아로스의 심장을 향해 가까워져 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절규가 절벽을 가득 채웠다. 검은 연기가 꿰뚫린 어깨를 타며 몸속으로 파고들면서 피부마저 새까맣게 물들여갔다. 감각이 하나둘 무너졌고, 피가 식어가며 의식마저 흐려졌다.
아우로라에서 수도 없이 기도했던 순간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랐던 모든 기도들.
그러나 시즈는 더 이상 기도할 힘조차 없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온몸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렇게 시야 끝자락이 암흑으로 잠기려는 찰나, 푸른 오라에 둘러싸인 청록빛 궤적이 어둠을 가르며 번졌다. 눈부신 선이 일순간 시야를 채웠으나, 그 뒤를 확인하기도 전에 시즈의 의식은 끝내 꺼져 내렸다. 곧이어 청록빛 섬광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절벽 아래를 뒤덮었고, 그 빛은 절벽 위에 서 있던 비디아와 오베디안의 눈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뭐냐, 저 빛은......!?"
섬광에 얼굴이 일그러진 오베디안과 달리, 비디아는 놀라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한순간에 섬광이 터진 곳으로 몸을 옮겼다. 공기를 가르는 움직임은 발걸음이라기보다 마치 허공을 스쳐 흘러가는 듯했으나 그 속도는 다급했다.
절벽 아래에 펼쳐진 광경에 비디아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토막 난 뒤틀린 기사들의 형체가 흙더미처럼 삭아들고 있었고, 잊혀진 태고의 잔향이 그 자리를 청록빛으로 감싸고 있었다.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기운이 눈앞에서 배어 나오는 광경에 비디아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한순간 입매가 떨리며 억눌린 분노가 새어 나왔다.
"......감히 이런 치욕을 제게 안겨주시다니... 대체 무슨 흉계이십니까."
100일이 넘는 시간이었다. 헌의 지극정성으로 간신히 버텨왔지만 미사의 상태는 마침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곰팡이 같은 검보랏빛 부패의 흔적은 온몸으로 음습하게 번져 나갔고, 피가 맺힐 정도로 메마르고 갈라진 손마디는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피부 아래로 검게 죽어가는 핏줄이 선명해질수록 호흡 또한 불규칙하게 가빠졌고, 가늘게 끊어지는 숨소리는 곁을 지키는 이의 가슴을 서서히 저미어왔다.
결국, 밤이 깊어갈수록 고열에 시달린 미사는 몸을 가누지 못하며 기침과 함께 검은 피를 토했다. 헌은 무너져 가는 그녀를 서둘러 안아 올린 뒤 곧장 등에 업은 채 단숨에 산길로 몸을 던졌다.
"......미, 미안타."
축 늘어진 채 흘러나온 목소리는 희미했고, 입가에서는 검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전해진 그 한마디에 헌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더 깊은 산속으로 몰아넣었다.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의 몸은 완전히 축 늘어졌다. 숨결마저 희미해지자 헌의 온몸에 당황과 절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등을 스치는 체온이 사라져 가는 듯한 감각에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아 내렸다. 현실을 부정하는 듯 두 손으로 창백한 얼굴을 감싸며 연신 이름을 불렀다.
"야, 정신 좀 차려봐라...! 미사, 눈 좀 떠봐라!"
목소리는 울먹이며 갈라졌다. 헌은 그녀의 뺨을 연신 쓰다듬었으나 눈꺼풀은 끝내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된다, 제발...!"
숨 넘어가듯 끊기는 울음 속에서 말들이 부서져 나왔다. 살릴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헌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미사는 이미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고, 차갑게 식어가는 체온만이 손바닥에 남았다.
그때였다. 서러운 울음 사이에서 숲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이 서서히 잠잠해지고, 나뭇잎들이 잔잔히 떨리며 어둠 속에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땅은 고동 하듯 낮게 울렸고, 한순간 길이 열리듯 어둠이 갈라졌다.
눈물로 얼룩진 채 고개를 든 헌의 눈앞으로 알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함이 공기 속에 스며들면서 발걸음을 이끄는 듯한 은은한 빛이 숲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헌은 미사를 품에 안은 채, 흐느낌을 삼키며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 빛 속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