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잠든 땅 (1)

구멍 난 기억

by 이샤라
아주 먼 옛날, 세상은 하나의 품속에 있었단다. 그 품은 넓고도 따스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태어나고 살아갔지. 대지의 어머니는 그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감싸 안으며, 뭇 생명들을 길러내셨지. 그녀에게는 든든한 아들들과 마음이 따뜻한 딸 하나가 있었어. 아들들은 크고 강인하여 산과 바람이 되었고, 딸은 조용하고 깊어서 강과 들판이 되었단다. 무엇보다도 딸은 어머니를 꼭 닮아,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사랑했지. 그렇게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세상을 가꾸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욕심 많은 이들이 나타나고 말았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믿었던 어머니의 심장을 탐하여, 기어코 그것을 제 것으로 삼으려 했단다. 아들들과 딸은 어머니를 지키려 맞섰지만, 하나둘 쓰러지면서 어머니의 몸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어. 그 가운데에서 홀로 살아남은 딸은, 어머니의 조각 중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단다. 하지만 탐욕에 눈먼 무리는 오래가지 못했어. 세상의 이치를 지키려 했던 다른 이방인들의 심판을 받아 빛도, 소리도 닿지 않는 끝없는 어둠으로 추락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깊은 상처를 입은 어머니의 몸은 갈라지고, 심장은 멎어 버렸지. 그 비극을 지켜보던 이방인들이 힘을 모아 찢어진 틈을 메우고, 꺼져가던 숨결을 다시 불어넣었단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눈을 떴지만, 모든 것이 예전 같지는 않았어. 어딘가 허전했고, 심장에는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사라진 듯했단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야기하지. 그때 떠나간 딸은 무엇을 품고 어디로 갔을까? 그 대답은 여태껏 아무도 알지 못한단다.

대륙 어딘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



거인이 잠든 땅



어둠이었다.


깊고, 차갑고, 끝없는 어둠.


시즈는 자신이 천천히 침잠하고 있음을 느꼈다. 육신이 아닌 의식 자체가, 차갑고 깊은 물속으로 하염없이 끌려 내려가는 듯 사방이 무겁게 짓눌렀다. 고통도 두려움도, 심지어 살아 있다는 실감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수면 위로 흔들리는 기억의 파편이 밀려왔다.


불길은 마을을 삼키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들이 그림자처럼 덮쳐와 지붕을 찢고, 터져 나온 화마는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어린 시즈는 무너져 가는 집 안에 웅크린 채, 매캐한 연기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귀는 먹먹하게 울리며, 세상은 무너져 내리는 파열음뿐이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눈부신 불빛 사이로 한 소년이 뛰어들었다. 망설임도 없이 시즈의 손을 낚아챈 그 온기는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을 붙들게 해주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기억에서 도려낸 흔적처럼,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보아도 형체는 선명히 잡히지 않았다.


"여긴 위험해! 어서 빨리 나와!"


짧은 외침과 함께, 시즈는 저항할 틈도 없이 이끌렸다. 다리가 땅을 밟는 감각조차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그저 손을 잡아주는 힘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며 포화 속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을 뚫고 나타난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도 그 얼굴만은 선명했다.


어머니였다.


"얘들아... 무사했구나!"


걱정과 안도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시즈의 입술이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향해 팔을 뻗었으려던 바로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불덩이가 작렬하며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쾅————


잡고 있던 손이 사정없이 끊어졌다. 소년의 몸이 폭발의 충격에 휩쓸려 절벽 아래의 강물로 튕겨나가더니 거센 물살 속으로 삼켜졌다. 손끝의 감각이 차갑게 사라지자 시즈는 숨소리조차 잃은 채 얼어붙었고, 다급히 달려온 어머니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거친 숨결이 귓가를 스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부짖음으로 변한 순간,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괴물에게 무참히 도륙당한 시스테나 전선의 병사들.


부패로부터 구해내지 못한 부상병들의 절규.


에리스 협곡에서 비극의 끝을 맞은 파트로곤과 로엔나의 차가운 시신.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아로스.


짧은 잔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시즈의 가슴을 짓눌렀다. 모든 순간마다 그녀는 무력했다. 누구도 구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더 깊이 가라앉기 직전, 눈앞에 다시 아로스의 마지막 순간이 겹쳐졌다. 그 처절한 모습에 시즈의 내면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다.


'안 돼... 제발 안 돼.'


그 부정의 외침은 절벽 아래의 어둠 속에서 타오른 마지막 의지였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았다. 끊어진 숨을 몰아쉬듯 짧고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돼──!"


차가운 어둠 속에서 청록빛 섬광이 휘몰아치자 시즈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거칠게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었다. 익숙한 잿빛 천장 대신 옅은 녹빛과 푸른 빛줄기가 뒤섞여 몽환적인 장막을 드리운 하늘은, 마치 거대한 생명의 숨결이 허공을 감싼 듯 은은하게 파동치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빛은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 사이를 가르며 작은 새들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공기조차 달랐다. 부패와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황폐한 대지가 아닌 따뜻하고 맑은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꽃이 만개한 듯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감돌았고, 바람은 놀라우리 만큼 온화하게 뺨을 어루만졌다. 바닥의 대지는 촉촉한 이끼와 부드러운 풀로 덮여 있었고, 그 둘레에는 하늘을 찌를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성벽처럼 빽빽이 서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숲의 일부라 하기엔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줄기 사이로는 맑은 물줄기가 흘러내려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물속에서는 알 수 없는 작은 생명들이 춤을 추듯 유영했고, 호수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빛을 내뿜는 존재들이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생명들의 모습에 놀라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예상보다 깊은 나른함이 사지를 감싸면서 다리를 휘청이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상처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상으로 벗겨진 손을 시작으로 전투 속에서 묻은 피와 먼지, 찢어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다치지 않았던 것처럼 흠결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득, 옆구리를 꿰뚫던 날카로운 고통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피가 솟구치며 불길처럼 온몸을 파고들던 감각은 여전히 생생했고, 반사적으로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치명상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매끈한 살결만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완벽히 봉합된 듯한 그 부재가 현실감을 앗아갔고, 비현실적인 불안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싸늘한 바닥 위에 쓰러져 있던 아로스의 모습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쳤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던 그의 몸,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몰려들던 뒤틀린 기사들의 검날이 잔혹하게 겹쳐졌다.


'아로스......!'


거칠게 숨을 몰아쉰 시즈는 본능처럼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에 그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홀로 남겨두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곁에 있으리라,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바로 그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낯선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리며 등 뒤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일어났네."


시즈가 황급히 뒤를 돌자, 검은 망토를 두르고 팔과 다리를 붕대로 칭칭 감은 청소년의 체구를 지닌 인물이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부러진 거대한 칼날이 바닥 깊이 박혀있었다.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그 무게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복면 뒤로 감춰진 얼굴선은 묘하게 시선을 끄는 중성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지만 인상은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무엇보다 왼쪽에 드러난 푸른 눈빛은 살얼음처럼 냉랭했고, 어떠한 감정의 결도 비치지 않았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 시즈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자세를 낮췄다. 이능이 번져 나오진 않았지만, 경계의 끈만큼은 늦추지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짧은 침묵 끝에, 그가 고개를 아주 느리게 저으며 답했다.


"...지금 네 몸으론 싸울 수 없어."


무심한 어조에는 위협도, 연민도 없었다. 마치 돌에 새겨진 문장을 읊는 듯한 말투에, 시즈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저와 함께 있던 기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 있어. 숲의 주인께서 치료하고 있지."


그 짧은 대답에 시즈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안도의 숨이 새어 나오려던 순간, 문득 기억 속의 이야기가 번개처럼 스쳤다.


라그나르가 말했던 존재. 살아 있는 자들이 감히 다니지 못하는 길을 홀로 걸으며, 허리춤에는 체구에 맞지 않는 부러진 거대한 칼날을 지녔다는 벽안의 소유자.


죽음을 거니는 자, 오미누스.


시즈는 눈앞의 푸른 눈과 무표정한 얼굴을 다시금 응시했다.


'......틀림없어. 분명 이 사람이야.'


오미누스는 잠시 시즈를 훑듯 바라보았다. 침묵 속의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눈빛 어딘가에 미세한 파문이 스쳤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적인 흔들림이었지만, 그조차도 금세 사라지며 다시 차갑고 무심한 눈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를 찾으려는 이유가 뭐야?"


"저를 지켜주었으니까요."


시즈는 단호히 목소리를 세웠다.


"그러니 저도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오미누스는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웃음인지, 냉소인지 알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이 입가를 스쳤다.


"그렇게 약해빠진 몸으로?"


툭 던진듯한 짧은 한마디는 시즈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벼 팠다. 그렇다고 주저할 수는 없었다. 흔들림 없는 두 시선의 충돌이 서로를 꿰뚫는 듯 이어졌고, 침묵이 길게 드리워지는 정적 속에서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갔다. 그러다 마침내, 오미누스가 입을 열었다.


"...그 집착, 그리 나쁘진 않네."


시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말에는 감정의 온기 대신 차갑게 거리를 두는 낯선 평가만이 배어 있었다. 여전히 불길한 기운이 맴돌았으나 지금 시즈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인지가 아니었다.


"숲의 주인을 만나게 해 주세요."


짧고 단호한 요구에, 오미누스는 재밌다는 듯 미세하게 눈썹을 치켜올린 뒤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직접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살아 있는지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과 함께, 오미누스는 순식간에 칼날을 뽑아 들어 허리춤에 건 뒤 숲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자, 시즈는 주먹을 굳게 움켜쥔 채 멈칫하다가 곧 발걸음을 뒤따랐다.


숲은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깊어졌다. 초록과 청록이 뒤섞인 하늘빛이 허공을 물결치듯 감쌌고, 공기에는 생명의 향기가 잔잔히 넘실거렸다. 익숙한 자연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동식물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밑을 스치는 풀잎은 은빛 잎맥을 따라 숨결처럼 흔들렸고, 작은 꽃망울이 터질 때마다 빛나는 가루가 흩어져 바람에 섞였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살아 있는 듯 미묘히 떨렸으며, 껍질 틈새로 흐르는 청록빛은 혈관처럼 대지를 타고 뻗어갔다. 단순한 숲이 아닌,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품속으로 들어선 듯한 감각이었다.


숲을 가로지르며 가로지를수록 나무들은 점점 더 거대해졌다. 그 모습에 카노라스의 중심을 지탱했다는 전설 속 세계수가 떠오르면서 혹시 이 나무들이 그 잔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울창한 나무들 사이가 서서히 벌어지더니 시야 앞에 탁 트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거대한 숨결이 숲의 품을 열어젖힌 듯한 공터가 천천히 시즈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터를 둘러싼 수목들은 단순한 나무의 무리가 아니었다. 각각이 독립된 생명이자 동시에 하나의 형체였고, 가지와 잎은 맞물려 움직이며 거대한 유기체처럼 호흡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수목은 햇빛을 받아 잎마다 은은히 빛났고, 아래로 내려앉은 숲의 그늘은 고요한 숨결로 대지를 감쌌다. 바람이 스며들 때마다 나뭇잎은 부드럽게 떨리며,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힘이 미묘히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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