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잠든 땅 (3)

검게 물든 뿌리

by 이샤라

모르티아의 가면 아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심연의 생명들에게 있어서 '소멸'이란 단순한 죽음이 아닌, 심연의 순환에서조차 벗어나 완전한 무(無)로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가면 너머의 시선을 팔을 잃은 존재와 비슷한 상처를 입은 이들로 향했다. 예리하게 잘려나가거나 베인 흉터들은 오래전 그녀가 실패로 끝낸 기억을 건드렸다. 과거, 자신의 계획을 가로막고 치명상을 입은 채 달아난 거인. 그 상처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기억과 함께, 불의 심판과 더불어 심연으로 추락한 치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놈에 대해서 알아야겠어. 그놈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이번에는 기운을 가져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야. 누구인지,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어떤 힘을 지녔는지 모든 걸 알아내. 분명 내 계획에 큰 차질을 빚을 것이 틀림없어."


모르티아의 말이 끝나자, 지상에서 돌아온 무리 중 가장 크고 날카로운 갑각을 가진 존재 하나가 몸을 떨며 목소리를 짜냈다.


"이 계획... 정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태고의 기운은 심연의 존재들에게 독과도 같았다. 생명과 순환을 품은 그 힘은 심연의 파괴와 부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으면 몸을 갉아먹고 존재를 좀먹었다. 게다가 부러진 칼날을 지닌 낯선 자의 그림자가 그들의 공포를 더 짙게 드리우고 있었고, 다른 이들 또한 불안에 휩싸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제 와서 겁을 먹은 거야?"


모르티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기 시작하자, 그녀의 말에 웅성거리던 이들이 순간 위축되어 움찔했다.


"이래서 나약한 버러지들은 안 되는 거야. 처음부터 힘을 원해서 내게 붙은 건 너희들이었잖아. 근본도 없는 것들이 심연의 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와 함께라면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 내 발 밑을 기으려 한 게 아니었나?"


모르티아의 조롱에 울루니아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기운을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붕괴한다!"


"오래 노출되면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도 있어!"


"그놈에게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을 네가 책임질 수 있느냐!"


분노와 공포가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가면 아래의 모르티아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비웃음 서린 하관의 선이 기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관두려고?"


그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일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얻어온 걸, 너희 손으로 버리겠다고?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짧게 혀를 차며 싸늘한 코웃음을 치자, 울루니아들은 또다시 움츠러들며 전전긍긍했다. 모르티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검은 뿌리를 쓸어내렸다. 뿌리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미묘하게 꿈틀거렸고, 손끝이 닿은 자리에서 검은빛이 번져나갔다. 힘을 탐하면서도 그 무게는 감당하기 싫어하는 모순덩어리들. 저 비겁한 눈빛들이야말로 패배자의 전형이 아닌가.


"힘이란 건 원래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심연의 지배자 아래에서 벌벌 기며 살아가는 것이 싫다며 내게 왔잖아. 더 강한 힘을 원한다며? 내가 그걸 주기 위해서 원대한 판을 짜고 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겁을 먹었다고?"


모르티아는 뿌리에서 손을 거두고 울루니아들을 하나하나 훑어본 뒤, 고개를 돌려 그리즈마를 마주했다.


"내가 세우려는 세계가 뭔지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가 바라는 건 뭐야? 지금처럼 나약해 빠진 자손들을 만들며 만족하는 거야? 아니면 심연 속에서 기어 다니며 먹이를 뜯고 약자를 짓밟으며 힘을 증명하는 것? 나는 그따위 시시한 질서를 만들 생각은 없어."


그리즈마는 모르티아의 가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조롱하고 깔보았으나, 그 언행 속에는 광기 어린 확신이 있었다.


"내가 설계한 세계가 완성되면 너희들은 더 이상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필요가 없어. 오히려 직접 먹이사슬을 만들 수 있겠지. 더 강한 자손들을, 아니, 그보다 더 거대한 세력을 너희 방식대로 창조할 수도 있어."


그녀의 말에 웅성거리던 무리들은 조용해졌다. 모르티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심연의 지배자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들은 많았지만, 끝내 실패해 소멸하거나 자취를 감춘 이들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가장 먼저 불평을 터뜨렸던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계획이 뭐지?"


모르티아는 답답하다는 듯 가면 안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뿌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물었다.


"이게 뭔지는 알고 있겠지."


그녀의 질문에 울루니아들 사이에서 잠시 웅성거림이 일더니, 그중 하나가 답했다.


"세계수의 뿌리 아닌가."


"그래... 세계수의 뿌리지."


모르티아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휘어 올랐다.


"나는 내 방식대로 세계수를 키울 거야."


"세계수를... 심연에서?"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멍청하긴. 이걸 심연에서부터 키워내겠다는 말이 아니잖아. 이 뿌리는 이미 오래전에 대지를 뚫고 이곳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온 거야. 나는 그저 이 거대한 뿌리를 내 양분으로 삼아 지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키워낼 뿐이야. 태고의 기운을 받아들이면서도... 심연의 본질을 간직한 새로운 형태로 말이지. 그렇게 되면 심연은 더 이상 부정과 소멸만을 반복하는 죽은 세계가 아니야. 생명과 만물의 순환을 품은 동시에, 기존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힘이 태어나는 거지."


모르티아의 목소리는 광적인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손끝을 가볍게 튕기자, 검은 뿌리가 요동치며 울루니아들이 가져온 석관을 집어삼켰다. 검은 액체와 뒤섞인 태고의 기운이 뿌리 깊숙이 스며들자 거대한 줄기가 살아 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렸고, 심장박동 같은 진동이 심연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울루니아들은 깨달았다. 이 힘은 단순히 위험한 것이 아닌, 기존의 섭리를 송두리째 뒤엎을 힘이었다.


"...너는 심연과 대지를 하나로 잇겠다는 거군."


"그래."


모르티아의 가면 아래서 미소가 번졌다.


"심연의 끝없는 파괴와 무의미한 먹이사슬이 아닌... 대지와 하나로 융합시켜 내가 만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거야."


울루니아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세계의 순환과 먹이사슬은 완전히 뒤집힐 것이다. 더 이상 포악한 왕의 그림자 아래서 쫓기듯 살아갈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즈마는 찢어진 입가를 핥으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웃음을 흘렸다.


"......흥. 그건 마음에 드는군."




호수의 중심에는 여전히 시즈가 아로스를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극심한 피로에 짓눌려 있던 아로스의 몸은 숲의 기운을 받아 점차 따스한 기운을 되찾았다.


무겁게 눌리던 기색이 옅어진 그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순간적으로 시즈가 품을 더욱 끌어안으며 놓지 않았다. 마치 다시는 곁에서 잃고 싶지 않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아로스의 모습을 확인하자 숨을 고르듯 짧은 떨림 끝에 아쉬움 가득한 손길을 거두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아로스는 무덤덤하게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가볍게 몸을 움직인 그는 번쩍 시즈를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


시즈는 당황한 듯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거예요?"


"호수에서 나가야 하니 말입니다."


"...제가 직접 걸어도 되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속엔 미묘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시즈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로스가 자신을 들어 올린 것은 단지 걷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끌어안던 순간, 흘러내린 눈물까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걸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단지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품고 싶었던 것일까. 이유를 묻지 않았고, 그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아로스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즈를 안은 채 천천히 호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즈 또한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품에 몸을 맡기며, 두 사람을 감싸는 물결이 잦아드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호수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자, 아로스의 눈앞에 거대한 숲의 경관이 펼쳐졌다.


"...보셨나요?"


"...네."


아로스는 시즈의 물음에 짧게 대답하고, 그녀를 품에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천천히 숲의 경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또 왜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막연한 불안이 여전히 가슴 깊숙이 남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숲의 기운이 자신과 맞닿으며 내면 어딘가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이 낯선 땅의 기운이 왜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운 것일까. 마치 잃어버린 것을 찾은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안식이 전신을 휘감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희미하게 잠들어 있던 감정이 서서히 반응하는 듯 파문처럼 번져갔다.


그때, 울림을 깊이 음미할 틈도 없이 멀리서 인기척이 다가왔다. 시즈와 아로스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들이 숲의 빛을 헤치고 나타났다.


"......!"


헌과 미사가 풀숲을 헤치며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특히 미사의 모습은 믿기 어려울 만큼 달라져 있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병마로 쇠약해져 겨우 몸을 지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맑은 기운이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무녀님......?"


미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고, 창백했던 피부에는 생기가 돌았다. 한때 병색과 곰팡이 자국으로 얼룩졌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기를 되찾은 그녀의 얼굴은 경이로울 만큼 달라진 강인함을 품고 있었다.


"옴마나! 진짜로 무녀님이 맞네!"


반가움으로 가득한 외침 뒤로, 곁에 선 헌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싱싱한 약초가 한가득 담긴 소쿠리를 내려놓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즈와 아로스는 여전히 말문이 막혀 있었다. 달라진 미사의 모습에 차마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제야 미사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설마,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으신 건 아니겠죠?”


그 장난기 섞인 말투에 시즈는 말없이 웃었고, 다시금 미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숲의 힘 때문일 터였다.


"두 분은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곳에 오신 건가요?"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시즈의 물음에, 헌이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조금 길어질 것 같습니다."



헌은 미사의 병세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던 날 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산을 오른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이미 드렸던 그대로입니다. 마지막 희망처럼 아내를 업고 산을 헤맨 끝에, 숲이 저희 앞에 길을 열어주었죠."


담담히 이야기를 마친 헌의 곁으로, 미사가 가볍게 웃으며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자기가 그때 울던 모습을 못 봐서 아쉽네. 꽤 볼 만했을 것 같은데?"


헌은 얼굴을 찌푸리며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


"그래, 인정할게. 그땐 정말 심각했으니까. 근데 말이지—"


미사는 장난기 어린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 하나 살리겠다고 필사적으로 산을 오르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 나 완전 감동받았다."


"...갑자기 또 왜 그라는 건데."


"있는 사실을 말하는 건데?"


흥분을 감추지 못한 미사의 시선은 시즈와 아로스에게로 향했다.


"이 사람, 진짜 못하는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지, 바느질도 곧잘 하지, 칼 쓰는 솜씨에 약 다루는 실력까지. 거기다 말재주도 좋고, 은근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거든."


시즈는 불쑥 쏟아지는 칭찬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미사는 곧장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괜히 이 사람을 따라나선 게 아니에요. 얼마나 쫓아다녔었지? 10년 좀 넘었나?"


미사의 말에 시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10년이나요?”


"그렇다니까요!"


미사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시큰둥해 보여도, 은근히 붙잡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니까. 내가 참을성이 있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진작 포기했을지도 몰라."


천연덕스럽게 자랑을 쏟아내는 미사의 모습에, 헌은 옆에서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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