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감춘 반가운 얼굴
"...대체 그 얘기를 왜 지금 하는 건데?"
"내가 신랑 자랑하겠다는데 뭐가 어때서? 이 사람처럼 다재다능한 사람 없어요. 한 번은 우리가 전선의 병사들을 도우러 따라다닐 때였는데—"
"고마해라!"
"아니, 왜! 좀 더 들어봐요. 이거 꽤 대단한 이야기라—"
헌은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미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쑥스럽다.”
그 짧은 한마디에 미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곧이어 피식하며 웃음으로 터졌다.
"풉, 자기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
"아니다!"
"아니긴? 귀 끝까지 빨개진 거 다 보이는데?"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린 헌의 모습에, 시즈는 눈앞의 광경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숨조차 가쁘게 몰아쉬던 모습의 미사가 지금은 활기찬 목소리로 남편 자랑을 늘어놓으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즈의 마음 한켠이 따스하게 덥혀졌다.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 말에 미사는 다시 싱긋 웃으며 헌을 바라보았다.
"그치? 자기, 인정하지?"
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싫진 않았는지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시즈는 문득 미사가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 세월 동안 미사는 변함없이 헌 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인연이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결코 퇴색되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느껴진 시즈는 무심결에 옆에 있는 아로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때, 미사가 성큼 시즈 앞으로 다가섰다.
"...무녀님."
"네?"
"왼쪽에 가면... 그거 정식 무녀가 된 거 맞죠?"
미사의 손끝이 시즈의 얼굴을 가리켰다. 무녀들이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헌 또한 잠시 시즈를 바라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신기하네요. 처음 뵀을 때는 뭔가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인상이 확 바뀐 느낌이 있네. 이거 벗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때, 헌이 미사의 어깨를 툭 치며 제지했다.
"너무 지나친 건 실례다."
"아, 맞네."
미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다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시즈를 훑어보았다.
"그래도 정말 신기해요. 바로 앞에서 보니까 뭔가 신비롭고... 멋있어 보이는데요?"
"별로 특별한 건 아니에요."
"흠,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제 눈엔 꽤 특별해 보이는데."
미사는 가면을 흘깃거리며 여전히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으나, 헌이 다시 눈짓을 보내자 그제야 말을 멈췄다. 그러면서도 끝내 못 이긴 듯 씩 웃으며 한마디 더 던졌다.
"어쨌든... 잘 어울려요. 이제야 진짜 무녀님답다고 해야 하나?"
시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 미사는 능글맞게 웃으며 또다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근데 말이죠! 무녀님과 기사님 두 분 무슨 사이인가요?"
"...네?"
미사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다짜고짜 묻는 미사의 갑작스러운 기세에 시즈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꼈다.
"아까부터 보니까, 두 분 분위기가 살짝 묘하던데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래 알고 지낸 느낌, 아니면 둘만 아는 무언가가 있죠?”
"그게 무슨—"
시즈가 당황해 말을 잇기도 전에, 미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괜히 둘러대도 소용없어요. 제 눈은 못 속인다구요. 꽤 오래 알고 지낸 거 맞잖아요?"
"그야, 그렇긴 한데..."
"역시! 그럼 더 궁금해지잖아요. 도대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예요? 그냥 단순한 동료는 아닌 것 같던데요? 아니면... 그 이상?"
미사의 눈빛은 장난기와 진지함이 교차하며 반짝였다. 그녀는 시즈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곧 아로스에게까지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을 동시에 훑는 그 시선 속에는 이미 얼추 짐작해 버린 사람 특유의 장난스러운 확신이 묻어 있었다.
"기사님도 그렇죠? 무녀님이랑 오래 같이 다녔으니까, 그냥 동료라기엔 좀 더 특별한 사이 아닐까요?"
아로스는 말없이 잠자코 미사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침묵에도 미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신이 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예를 들면, 무녀님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든가~?"
아로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미사는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 어머! 반응이 너무 솔직한데?!"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시즈의 얼굴은 화끈거렸고,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진짜요? 근데 왜 얼굴이 그렇게 빨개요?"
"안 빨개졌어요!"
"아닌데? 딱 봐도 빨개졌는데?"
멈추지 않는 미사의 주책에 시즈는 아로스를 흘끗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미사의 질문을 듣고 있을 뿐, 어떤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는 침묵은 긍정보다 더 짙은 여운을 남기는 법이라지. 저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걸까.
시즈가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헌이 짧은 한숨과 함께 조용히 개입했다.
"고마해라."
"에이, 잠깐만!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데!"
"남에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니까? 이건 진짜 중요한 거다!"
"스읍, 그만."
"아이, 재미없게—"
"미사."
짧고 낮게 이름을 부르는 헌의 목소리에, 미사는 순간 움찔하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흥."
미사는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물러섰지만, 눈빛은 여전히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즈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깊은숨을 내쉬었지만, 곁에 선 아로스가 어느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그 또한 미사의 말을 마음속에 곱씹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불꽃 튀는 미사의 관심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 헌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고,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
"네에~ 알겠습니다~."
미사는 아쉬운 듯 손을 휘휘 저었으나, 곧 헌의 말에 맞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시즈와 아로스를 번갈아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여전히 호기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보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화제를 돌린 헌의 질문에 시즈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대답을 이었다.
"저희도 처음부터 이곳을 목적지로 삼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요."
시즈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곳에 닿기까지의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뒤틀린 기사들과 망령 기마대의 끝없는 추격 속에서 점점 밀려나던 형세, 그리고 아로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도망칠 길조차 보이지 않던 그 순간까지.
헌과 미사는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말은 길지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뒤틀린 기사와 망령 기마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마주친 적도 없었지만 그 존재들의 이름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굉장히 위험했겠군요. 도망칠 틈조차 없는 상황에서, 싸우면서 빠져나와야 했다면......"
헌은 짧게 말을 흐렸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두 사람이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렸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아로스에게 머물렀다. 그저 과묵한 호위 기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끔찍한 존재들에게 쫓기면서까지 시즈를 지켜냈다는 사실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헌은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단순한 순례길이 아니었군요. 기사님께서도 그저 호위만 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두 분께서 그런 사명을 짊어지고 계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정말로 모든 게 끝나는구나 싶었던 순간...... 저희는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두 분 또한 이곳이 살렸군요."
대답과 함께 헌은 숲의 깊은 수풀과 맑게 흐르는 샘물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모두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단순한 숲이 아님을, 네 사람 모두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느꼈습니다. 이 숲은 단순한 숲이 아니에요. 괜히 전설 속 생명의 숲이라 불린 게 아니겠죠."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내 몸이 이렇게 씻은 듯이 나을 줄 누가 알았겠어."
"우리를 이 숲으로 이끈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헌이 미사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자, 그 말에 시즈가 대신 답했다.
"이곳에 잠들었다는 마지막 생명의 거인이 아닐까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전설대로라면 거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숲이 유지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저 또한, 이곳에 들어온 뒤부터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로스의 말에 시즈는 잠시 놀란 듯 눈길을 돌렸으나, 곧 감정을 가라앉히고 헌과 미사에게 물었다.
"두 분은 혹시, 이 숲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한 명 있었는데... 키가 굉장히 크고 기묘한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언뜻 보기엔 이 숲의 원주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원주민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아마 이곳을 다스리는 신이거나 더 근본적인 존재일지도 몰라."
헌은 곧장 미사의 말을 고쳐준 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관찰하는 듯했지만, 적대적인 기색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곳에 낯선 이들이 들어온 걸 탐탁지 않게 여기더군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네요...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못 보셨나요?"
"다른 사람이라뇨?"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안대를 한 사람이었어요. 키는 겨우 15살이 됐나 싶을 정도로 작았죠. 그리고 체구에 맞지 않게 큰 칼날을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이미 부러져 있었어요. 부러진 칼날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온전했을 때는 얼마나 거대했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죠."
시즈의 설명에 헌과 미사는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미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본 적 없어요. 우리 앞에 나타난 건 오직 가면을 쓴 그 자뿐이에요."
"그렇군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시즈는 이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위험한 인물은 아닐 거예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를 위협하지도, 적대감을 가지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말씀만 들어도 심상치 않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만..."
"자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처음 볼 땐 괜히 겁먹게 생겼는데."
"지금 그 얘기가 갑자기 또 왜 나와?"
순간 시즈가 고개를 돌리며 '푸흡'하고 웃음을 참자 헌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미사가 깔깔 웃으며 뒤로 넘어가자, 헌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내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혹시 두 분도 이곳에서 만난 신과 같은 존재에게서 뭔가 들은 것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당분간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든가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시즈가 놀란 듯이 묻자, 헌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그는 저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 분명했습니다. 동시에 이곳의 존재 자체가 바깥세상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 듯 보였죠. 저희 두 사람에게는 당분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너희를 믿지 않으니 말이지."
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고도 냉담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네 사람의 앞에, 기척도 없이 라사리아가 나타나 있었다.
"이 땅은 세상에서 잊힌 장소이다. 그 누구도 존재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고, 나는 그 사실이 변하지 않도록 감춰왔다. 세상 밖으로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
라사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헌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이곳에 발을 들일수 있던 것은 내가 아닌 엘라마 때문이다. 네가 절규하던 순간... 그녀는 주저 없이 받아들이길 원했지."
헌이 미사를 바라보는 사이, 라사리아는 다시 차갑게 시선을 거두었다.
"너희가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이다. 엘라마가 길을 열어 주길 원했을지 언정, 나는 너희를 그냥 내보내줄 생각이 없다."
바람이 스쳐가듯 낮게 이어진 목소리는, 설명이라기보다 냉소에 가까웠다.
"필멸자는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무언가를 흘리지. 말로든, 행위로든... 그 불신을 키워 끝내 모든 것을 더럽히고 말아. 이곳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과거의 악몽은 다시 깨어날 것이다. 탐욕은 반복되고, 파멸이 되풀이 될터... 나는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