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잠든 땅 (6)

영혼의 공명, 고독한 각오

by 이샤라

바람이 멎었다가 다시 불어오는 사이, 라사리아의 시선은 한동안 엘라마를 향해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의 침묵 속에는 단순한 무심함이 아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 어른거렸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이 진정한 안식일지, 아니면 고통스러운 기다림 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엘라마를 바라보고 있던 라사리아의 표정은 어느새 살짝 누그러져 있었다.


"모든 것은 결국 마지막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지. 하지만... 어떠한 존재도 그 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그 말은 단순한 교훈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잠든 엘라마를 향한 라사리아의 표정 속에서의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은 아로스와 시즈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또 한 번의 긴 정적이 흐르고, 한동안 침묵했던 라사리아는 돌연 아로스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라사리아의 손끝이 천천히 아로스의 품을 향했다. 그 손짓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챈 아로스는 조용히 품 속으로 손을 넣어 환시의 등불을 꺼내 들었다. 라사리아가 등불의 빛을 오래도록 응시하자, 그 차가운 시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흔적이 번져갔다.


"환시를 품은 이여. 너는 홀로 엘라마와 마주해야 한다."


단호한 목소리에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이 잠시 일렁였으나 라사리아의 태도 속에 어떤 필연이 있음을 직감한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잠시 나를 따라오너라."


라사리아는 시즈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길을 따라 내려앉은 외진 곳이었다. 그러나 시즈는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불안이 그대로 묻어난 그녀의 모습에 아로스는 '별일 없을 것이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즈의 시선이 끝내 아로스를 떠나지 못하자, 뒤편에서 오미누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라사리아 님이 계속 기다리게 할 거야?"


그제야 시즈는 어깨를 움츠리며 라사리아의 뒤를 따랐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발걸음을 삼켰고, 남겨진 아로스는 조용히 엘라마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 가득히 드리워진 엘라마의 형체는 멀리서 보았을 때도 압도적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그 위용은 상상조차 불가능할 만큼 불어나고 있었다. 거대한 뿌리와 나무줄기에 둘러 쌓인 상반신은 감히 오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바위 절벽처럼 높았고, 머리칼은 숲의 덩굴과 착각될 만큼 길게 흘러내려앉았으며, 닿지 못할 만큼 멀리 있음에도 고요한 얼굴은 차갑게 잠든 하늘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아로스를 감싸온 것은 압박이 아니라 이상한 평온이었다. 숲의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듯했지만, 그 흐름은 위협이 아닌 안식의 숨결처럼 다가왔다. 무겁게 짓눌리는 듯했던 공기마저도 어느 순간 부드럽게 가라앉아, 깊은숨을 내쉴 때마다 폐 안으로 맑은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차갑게만 보였던 고요한 얼굴은 세상을 품은 어머니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눈을 감은 이목구비에는 따스한 정적이 깃들어 있었고, 그 평온은 아로스의 가슴속 불안을 가라앉혔다.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은 더 이상 방랑자나 전사가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안식을 찾아온 아이처럼, 대지의 품 앞에서 그저 잠잠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로스는 품 속에서 환시의 등불을 꺼내 들었다. 작디작은 불빛은 바람조차 없는 숲 속에서 스스로 숨을 쉬는 듯 피어올랐고, 그 빛이 잠든 거인과 미묘하게 공명하는 순간, 그의 안쪽에서 낯선 울림이 일었다. 오래도록 닫혀 있던 공간에 맑은 물이 스며드는 듯, 조용한 파문이 가슴속을 번져 나갔다.


그것은 격렬한 힘도, 눈부신 섬광도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어둠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빛이자 잊고 있던 온기였다.


아로스는 눈을 감았다. 억눌린 호흡이 자연스레 풀리며, 차갑게 굳어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렸다. 공허했던 자리에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함이 흘러 들어왔고, 그 따스함은 바람처럼 스쳐가 버릴 것이 아닌 놓쳐서는 안 될 손길처럼 심장에 고여 머물렀다.


라사리아를 따라 걷던 시즈는 문득 걸음을 늦췄다. 숲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침묵이 아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발밑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의 배경처럼 이따금씩 아주 높은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바람을 타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숲 전체를 낮게 울렸다. 그 소리에 거대한 나무들의 꼭대기가 파도처럼 가볍게 술렁일 때면, 놀란 작은 새들의 날갯짓이 햇살 사이로 흩어지곤 했다.


이따금씩 라사리아의 어깨 위에는 작은 새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즈가 그동안 알고 있던 새와는 전혀 다른, 본 적 없는 종들이었다. 부리 끝에서 옅은 초록빛이 흐르는 새, 날개가 반투명하여 햇살을 받을 때마다 수정처럼 빛나는 새, 꼬리깃이 나뭇잎처럼 길게 늘어져 바람을 스치며 은은한 향을 흘리는 새까지. 지금까지 살면서 결코 만나본 적 없는 고대의 그림 속에나 있을 법한 생명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새들은 라사리아의 어깨뿐 아니라 그의 가면 위에도 가볍게 내려앉았다. 길게 삐죽이 솟은 가면의 돌기마다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나뭇가지 위에 새들이 모여든 풍경처럼 보였다. 라사리아는 그들을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돌려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작은 새 하나가 손끝으로 날아올랐고, 그는 새의 부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손가락에 부리를 비비는 새의 모습과, 그것을 담담히 받아내는 라사리아의 손길은 오래도록 이 숲과 함께 호흡해 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교감 같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시즈는 마음 깊숙이 일렁이는 감각을 느꼈다. 눈앞의 존재는 단지 숲의 주인이 아닌 이곳의 모든 생명을 아끼는 진정한 수호자였다. 말없이 걷는 그의 뒷모습에서조차, 이 숲과 그 안의 생명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따뜻한 온기처럼 번져 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숲의 고목들이 맞물리며 닫히는 듯한 풍경이 펼쳐졌고, 그와 동시에 라사리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하늘을 뒤덮은 가지 사이로 커다란 빛기둥이 스며들어 공간을 비추고 있던 그곳은 다른 곳보다 한층 더 밝았으며, 은은히 번지는 빛은 숲 속 깊은 어둠을 밀어내며 맑은 기운을 채워 넣고 있었다. 빛 아래 드러난 곳은 도시의 웅장함이나 성채의 위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숲이 스스로 품어낸 작은 성소 같았다. 가지와 덩굴이 엮여 지붕을 이룬 오두막만 한 공간이 있었고, 주변은 이끼와 꽃으로 덮여 있었다. 인간이 억지로 세운 건축물이 아닌 오랜 세월 동안 숲과 더불어 자라난 듯한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랜 세월로 풍화된 나무 밑동과 다듬어진 작은 바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탁자와 의자처럼 보였다. 아무 장식도 없는 단출함 때문인지 오히려 숲의 숨결을 더욱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쪽에는 이끼가 가득한 돌계단과 함께 덩굴과 뿌리들이 얽혀 형성된 벽면이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오래된 두꺼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자연의 품 안에 지어진 서고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아우로라의 도서관에서 조차 본 적 없는 고문서들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종이마다 묵직한 세월의 향기가 스며 있었다.


시즈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숲과 한 몸처럼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그 고요한 장면에 마음을 빼앗겼다.


라사리아는 이끼가 내려앉은 돌계단을 밟아 오르며 쏟아지는 빛기둥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빛을 올려다보던 그는 문득 시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텐시아는... 잘 지내고 있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시즈는 눈을 크게 뜨고는 당황스레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이 몇 차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지만, 적절한 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라사리아는 잔잔히 이어서 말했다.


"그녀는 여타 다른 용들과는 사뭇 달랐다. 남매였던 아틸리엔도 마찬가지였지."


라사리아는 그 말을 뒤로 다시 한번 천장 사이로 내려오는 빛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담담한 말투 속에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부드러운 그리움이 묻어 있었고, 시즈는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온기만으로 직감할 수 있었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들과... 가까우셨나요?"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우로라를 지배하는 고룡이자 수많은 이들이 경외하는 존재. 시즈는 모두가 이야기하는 온화함 너머의 이면을 알고 싶었고, 라사리아는 잠시 빛기둥을 응시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텐시아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힘과 지배에 매달리던 동족들 사이에서 유달리 다른 결을 지녔지. 아틸리엔은 그보다도 더했고 말이다."


라사리아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모습에는 오래전에 덮어둔 기억을 반갑게 꺼내는 듯한 기색이 은근히 스며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기색도 잠시, 그는 본래의 차가운 태도로 돌아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즈를 내려다본 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와 물었다.


"네 안에 흐르는 마력의 결이 얼마나 강대한지 알고 있느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


뜻밖의 물음에 시즈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대답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고, 그런 시즈의 모습을 바라보던 라사리아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등을 돌린 채 몇 걸음 옮긴 그는 빛기둥이 내려앉는 자리에 다시 멈추면서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텐시아는... 너에게 많은 것을 넘겼다. 그녀는 분명 상상 이상으로 쇠약해졌을 것이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시즈의 목소리가 떨리며 터져 나왔다.


"지고의 존재께서는... 그 누구보다 강대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약해지다니... 말도 안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강한 부정이 터져 나왔음에도, 라사리아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용은 누구에게도 쉽게 자신의 힘을 내어주지 않는다. 하물며 자신과 동격의 권능을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시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례를 받은 순간부터 자신이 받은 힘의 무게가 얼마나 막중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아텐시아에게 큰 부담으로 이어진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느냐? 이 여정 속에서, 너와 환시를 품은 이가 짊어진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말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과 더불어, 시즈는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아텐시아가 약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한 고룡의 쇠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고향 아우로라의 안위가, 더 나아가 창은의 강에 살아가는 이들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너희의 여정 앞에는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명을 잊은 망령들보다도 더한 위협...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들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테지."


"사명을 잊은... 망령들...?"


시즈는 쿠베르 교역소에 들어서기 전에 만난 노인을 떠올렸다. 무겁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지나치듯 흘려보냈던 그의 불길한 말. 그때는 막연히 흘려들었지만 자신과 아로스를 위기에 몰아넣은 뒤틀린 기사들의 모습, 그리고 지금 라사리아의 입에서 나온 '사명을 잊은 망령'은 그것을 선명하게 되살려 주었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환시를 품은 이들이었나요?"


"확언할 수는 없다. 모두가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뜻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그 의미를 잃어버린 자들은 결국 다른 길로 흘러들어 간다. 어쩌면... 그 곁에서 마음을 흔들고 의지를 무너뜨리는 속삭임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르지."


시즈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라사리아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진정한 각오는 홀로 서는 것이다. 명심하거라. 너희와 같은 길을 걷는 자들은 타인의 온기에 기댈수록, 그 영혼의 불꽃이 위태로워지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가장 가혹한 굴레일지라도 말이다."


라사리아의 '타인의 온기에 기댈수록 영혼의 불꽃이 위태로워진다'라는 말은 섬뜩한 예언처럼 시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사명을 잊은 망령들' 또한, 누군가의 온기를 저버리지 못했기에 그리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은 곧 아로스를 향한 서늘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만약 '망령들'이 정말 뒤틀린 기사들이라면, 아로스 또한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사리아의 말은 아리송했지만, 결국 그 끝은 환시를 품은 자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마주할 위협에 대비하여 네가 가진 힘을 온전히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날과 같은 일이 언제든 너희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라사리아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앞에 놓인 집채 만한 바위를 가리켰다.


"확인해 보겠다. 이 자리에서... 아텐시아의 힘을 보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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