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
그때, 고요한 달빛 속에 이질적인 기척이 라사리아의 곁에 스며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만큼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오미누스였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라사리아는 달빛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늘이 드리운 그의 하관은 착잡함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오미누스의 푸른 눈동자가 의구심으로 흔들렸으나, 라사리아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겨 아로스 앞으로 향한 뒤 조용히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엘라마와의 공명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아로스는 잠시 말이 막힌 듯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느꼈습니다. 제 안에 비어 있던 자리가 메워지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빛도 어둠도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맥박 같았죠. 그리고... 그 위를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빛이 서로 맞닿는 순간, 서로의 존재를 삼켜버리는 그림자가 되는 광경이었는데... 그 짙은 그림자는 저를 향해 다가오다가 눈을 뜨기 직전, 아주 작고 희미한 한 점의 빛으로 변해 스며들더군요.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느껴졌습니다."
라사리아는 대답 대신 호수 위로 흩어지는 반딧불의 군무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로스가 본 그 추상적인 환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림자와 빛의 실체가 무엇인지 지금의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숲의 주인으로서 마주한 아로스의 눈빛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변화의 기류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하관에는 묵직한 정적이 감돌았으나, 그는 이내 길게 머물던 시선을 거두며 시즈와 아로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육신의 상흔은 숲의 기운으로 덮었으나, 벼랑 끝으로 몰렸던 영혼의 비명까지 잦아들게 하는 데는 오롯이 너희만의 시간이 필요할 터. 가야 할 길은 너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떠밀지 않더라도 적당한 때를 맞춰 움직이리라 믿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엘라마의 품이 너희의 흔적을 세상으로부터 지워줄 것이다. 그러니 온전히 추스른 뒤에 나를 찾아오너라."
라사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안갯속으로 스며들듯 자취를 감추었다. 오미누스 역시 바위 위에서 무심히 일어서더니, 두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숲의 음영 속으로 사라졌다.
비현실적인 고요함이 호숫가에 내려앉았다.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 내뿜는 빛의 파편들만이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깎아내고 있었다. 시즈는 팽팽하게 조여졌던 긴장이 풀린 듯,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로스는 그런 시즈의 옆에서 한 걸음 떨어진 채 묵묵히 주위를 살폈다.
"귀공… 정말로 괜찮으신 거죠? 아까 말씀하신... 그 그림자라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시즈가 무릎을 감싸 쥔 채 고개를 들어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가면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로스를 향한 순수한 걱정과 그를 잃을 뻔했던 기억이 남긴 희미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아로스는 천천히 그녀의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평소라면 엄격히 지켰을 기사와 무녀 사이의 '간격'이 숲의 온기 속에 아주 조금은 좁혀져 있었다.
정적은 길게 이어졌다. 아로스는 시즈의 물음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 얹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펴며, 공명과 함께 다가온 맥박이라는 생소한 박자가 실어 나르는 감정의 잔상들을 가다듬는 듯했다.
"그림자가 저를 향해 가까워진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마주했을 때 제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로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무뚝뚝했다. 하지만 그 무미건조함 속에는 이전부터 늘 그래왔듯 시즈를 안심시키려는 배려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전에도 그녀를 향한 마음은 본능처럼 그의 검 끝에 머물러 있었으나 감정의 결이 모자란 탓에 스스로 그 무게를 자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맥박이 무심했던 헌신에 '연모'라는 선명한 색을 입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미묘한 울림을 놓치지 않은 시즈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아로스 쪽으로 몸을 바싹 기울여 앉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반딧불의 빛 아래에서 아주 잠깐 겹쳐졌지만 아로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 미세하게 몸을 곧게 세우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귀공은 참 여전하시네요. 매번 그렇게 저를 안심시키려고만 하시고."
시즈는 장난스러운 핀잔을 섞어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녀의 '정결'이라는 엄격한 규율과 종교적 위계가 여전히 견고하게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오늘 밤만큼은 그 보이지 않는 벽조차 숲의 온기에 녹아든 듯 부드럽게 느껴졌다.
"헌과 미사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어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를 지탱해 온 두 분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죠? 만약... 언젠가 저희도... 사명이나 섭리 같은 무거운 것들을 다 내려놓고 마주 볼 날이 올까요?"
시즈의 목소리에 섞인 막연한 기대에 아로스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그에게 '사명 없는 미래'는 여전히 낯선 영역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밀어내기보다 함께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로스는 시즈의 발치 어딘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만... 적어도 무녀님께서 마주할 그 끝에 제가 함께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확신보다는 간절한 바람에 가까운,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투박하고도 진실한 대답이었다. 여전한 무뚝뚝함이 그의 입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오히려 한마디 다정하게 건네지 못하는 저 서툰 마음이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도 자신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 걸지도.
하지만 설레는 마음 한편으로, 라사리아의 경고가 섬뜩한 파문이 되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타인의 온기에 기댈수록 영혼의 불꽃이 위태로워진다는 그 예언은... 정녕 서로를 향해가는 자신들을 겨눈 칼날일까.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이 가혹한 굴레가 오직 '사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유효한 시련이라면... 모든 여정이 끝난 뒤에는 서로를 향해 투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는 않을는지.
시즈는 아로스가 친 마지막 벽을 무리하게 허무는 대신 그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진심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고의 무게보다 내 곁을 지키겠노라 말하는 이 사내의 체온이 훨씬 더 간절했으니까.
어느덧 호수 위를 부유하던 반딧불의 빛이 하나둘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숲의 장막 너머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스며들며,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아..."
시즈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여명은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온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생명의 고동이 묻어나는 찬란하고도 경건한 빛은 두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오늘의 여명은... 정말 특별하네요. 마치 저희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시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얼른 두 사람에게 돌아가야겠어요. 밖에서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게 분명할 거예요. 너무 늦으면 미사가 분명 또 잔소리를 늘어놓겠죠?"
시즈가 생긋 웃으며 앞장서자, 아로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숲의 깊은 그늘을 벗어날수록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여명의 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현실적인 고요함이 지배하던 호숫가를 뒤로하고, 시즈와 아로스는 숲길을 따라 헌과 미사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한편, 헌과 미사는 여전히 숲의 입구 밖에서 밤을 지새우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연하게 소쿠리에 가득 담긴 약초를 손질하고 있는 헌과 달리, 걱정으로 잠을 설친 미사는 제자리를 빙빙 돌며 안절부절못했다.
"가만히 좀 있어라. 몇 번을 말하나."
"어떻게 가만히 있는데!? 날이 밝아도 오질 않는데!"
걱정 어린 표정으로 쏘아붙인 미사의 말에 헌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있는다고 오는 것도 아니잖아. 정신 사납게 그러지 말고 와서 이거 손질이나 좀 도와라."
말은 대수롭지 않게 했지만, 헌 역시 시즈와 아로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신의 형상을 띈 존재는 겉보기에는 차가워 보였어도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할 것 같진 않았다. 마음만 먹었더라면 일찍부터 자신들은 진작에 명줄이 끊겼을지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채 거대한 칼날을 지닌 정체불명의 인물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살면서 그토록 감정이 메마른 표정을 본 적이 없었기에, 혹여나 그 자가 두 사람에게 해코지라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참말로 태평하다, 태평해. 이거 지금 조금 덜 하면 무슨 사달이라도 나?"
미사가 옆으로 와서 핀잔을 주었지만, 헌은 묵묵히 손끝에만 집중했다.
"너가 이게 뭔지 몰라서 그런다. 이건 보이는 대로 최대한 많이 챙겨야 한다. 언제가 여길 나가게 되면—"
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미사가 벌떡 일어나 울창한 숲으로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시즈와 아로스가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왔다! 왔네, 왔어!"
시즈가 손을 흔들자 미사는 헐레벌떡 달려 나갔다. 어찌나 급했는지 발끝에 걸린 소쿠리가 뒤집어지며 밤새 손질한 약초들이 바닥에 엎질러지는 바람에, 약초들의 하얀 뒷면이 흙바닥 위로 무질서하게 흩뿌려졌다. 헌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엎어진 것들을 주워 담았지만 두 사람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삭 가시는 듯했다.
"무녀님! 기사님! 대체 뭐 하다가 이제야 오시는 거예요! 나 잠 한숨도 못 잤단 말이에요."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좀 늦었네요."
시즈는 미안함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미사의 호들갑을 받아냈다. 뒤이어 다가온 헌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모두 별일 없으신듯해서 다행입니다."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이네? 어젯밤에 두 발 뻗고 잘만 자더만."
미사의 퉁명스러운 말에 헌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또 그런다. 누군 걱정 아예 안 한 줄 아나?"
"그런 사람이 아침 내내 무념무상으로 풀때기만 붙들고 있어?"
"갑자기 왜 또 그라는 건데?"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시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아로스 역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서로를 향해 투박한 핀잔을 던지면서도 그 안에 깊은 신뢰를 담아내는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해진 사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색하게 느껴지곤 했으니. 어쩌면 대단한 구원보다도 누군가를 걱정하고 다시 마주 앉아 실없는 농담을 나누는 이 소박한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이 험난한 여정을 지탱하며 나아가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그때, 두 사람의 모습에 미사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시즈 앞으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흐음......"
"어...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예요?"
"무녀님, 안에서 기사님 하고 무슨 일 있었죠?"
뜻밖의 질문에 시즈의 말문이 막혔다. 미사는 짓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시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방금 기사님이 무녀님 보던 눈빛, 아주 그냥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요? 빨리 말해. 둘이 안에서 뭐 했어요? 손이라도 잡았나?"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시즈의 얼굴이 금세 시뻘게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옆에 선 아로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아로스는 시즈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짐짓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릴 뿐이었다.
"우리 무녀님 귀 빨개진 것 좀 봐! 기사님도 고개 돌린다고 끝날 줄 알아요? 무뚝뚝한 기사님 눈에서 그런 빛이 나는 건 또 처음 보네. 둘이 손만 잡은 게 아니라 아주 속삭임이라도 나눈 거 아니에요? 예를 들면...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같이 살자는 그런 거!"
미사의 추궁이 선을 넘기 시작하자, 얼굴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시즈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소매 끝만 만지작거렸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야 했지만, 호숫가에서 아로스가 보여준 그 서툰 진심과 흔들리던 눈빛이 떠오르면서 차마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헌은 뒤집어진 약초를 다 정리하고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