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거래
...그들은 본래 신들의 곁을 보좌하던 사자들 중 하나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발걸음을 따르던 그들의 노래와 날갯짓은 한때 창공을 울리며 세계를 가득 메웠으나, 시간이 흘러 그 눈은 빛이 사라지면서 탐욕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결국 축복은 저주로 바뀌었고, 대죄의 장본인들은 세계의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들의 날개는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힘을 잃고 흉측하게 오그라들었으며, 다시는 창공을 가를 수 없는 저주를 이어받은 후손들의 운명은 대대로 이어졌다...
엘나 역사서, 불의 심판 비록(祕錄) 中
오베디안의 숨결은 여전히 거칠게 뒤틀려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끓는 분노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얼마 전 겪은 굴욕이 아직도 머릿속을 헤집으며 서슬 퍼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날의 상흔은 단순한 전투의 실책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무녀의 벼락은 예측의 범주를 벗어난 힘이었고, 뒤틀린 기사들과 대면했을 때 느낀 감각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원초적인 공포. 그것은 패룡의 위대한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용인의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균열을 남겼다. 그러나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님을, 오베디안은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힘 앞에서 의지와 무관하게 온몸을 지배했던 그 감각의 의미를 끝내 파헤치지 못한 채, 그는 생각의 문을 닫아버렸다.
어둠 속에서는 여전히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이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공기의 흐름마저 무겁게 일그러졌고, 오베디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눈빛은 곧 사브라트의 것이었으며, 자신의 실책이 곧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보아라.」
깊이를 알 수 없는 의식이 협곡의 적막을 찢었다. 오베디안은 온몸을 조여 오는 압박 속에서 거칠게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무녀의 힘은 제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두가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그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네게 변명을 듣고자 했더냐?」
사브라트의 의식이 협곡의 중심을 쪼개듯 파고들었다. 그것은 쐐기처럼 정수리를 짓누르며 정신을 으깨듯 몰아쳤고, 오베디안이 그 힘을 견디려 이를 악물었음에도 발아래의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잠시 후, 거대한 힘이 서서히 거두어지면서 협곡을 뒤덮었던 진동이 가라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가 스며들자, 무너질 듯 휘청이던 오베디안은 간신히 무릎을 짚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허억... 헉...... 뒤, 뒤틀린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가쁜 호흡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연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압박과는 다른 떨림이 서려 있었다.
"놈들은 단순한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이 세계에서 본 적 없는, 불안정한 힘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어둠 속의 황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오베디안의 말에는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이 묻어났으나, 동시에 그것은 사브라트가 오래도록 고대해 온 이질적인 힘이 모습을 드러냈음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힘을 직접 목도했다는 말이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놈들의 모습은 너무도 기괴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이 스스로 의지를 품고 활보하는 듯했습니다. 감히 아뢰건대, 그 힘은 위험합니다. 불안정하고, 예측조차 불가합니다. 저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베디안은 황금빛 눈이 깃든 어둠을 똑바로 응시하며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사브라트의 낮은 웃음이었다.
「나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네가 두려움을 입에 담을 정도라면, 되려 그만큼 값어치 있는 힘이겠지.」
"하지만—"
「나는 대전쟁 이후, 힘을 잃은 채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왔다.」
어둠 저편에서 두 개의 황금빛 항성이 떠오르면서, 태고의 검은 불꽃을 닮은 짙은 반사광이 거대한 존재의 윤곽을 비췄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공간을 메아리쳤고, 짙은 공기가 일순간 무너져내리는 듯한 압박이 몰려왔다. 잠들어 있던 기척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움직임 만으로도 협곡의 중심을 휘감던 어둠이 찢겨나갔고, 그 형체가 드러나는 순간 협곡 안의 모든 생명은 그 앞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강철과 같은 검붉은 비늘 사이로 붉은 마력이 용암처럼 들끓으며 주위 공기를 태울 듯이 휘몰아쳤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선명했다. 사라진 왼쪽 날개와 팔, 목에서 옆구리까지 가로지른 아직도 아물지 않은 듯한 깊은 흉터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지만, 그러한 결핍조차 위압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상흔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곡 전체를 삼킬 만한 힘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거대한 형체가 완연히 드러나자 협곡은 그 무게에 짓눌려 숨을 멎었다. 홀로 남은 오른쪽 날개가 천천히 펼쳐지며 드리운 그림자가 중앙 홀을 집어삼키자, 마치 고대의 존재가 봉인으로부터 다시 깨어나는 듯한 기운이 공간을 뒤덮었다.
오베디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매번 느끼는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도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뒤틀린 기사들이 내뿜던 불길한 기운, 심연의 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힘은 위험합니다. 혹여 그것이 사브라트님께 까지 해를 미친다면—"
말은 끝내 맺지 못했다. 사브라트의 황금빛 눈이 어둠을 가르며 내려왔고, 그 시선은 우려를 비웃듯 흔들림도 없었다.
「주교는 나에게 힘을 약속했다. 그리고 네가 본 것은 그 약속이 허언이 아님을 밝히는 산 증거다. 네 눈앞의 존재를 보아라.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이냐.」
"저는 그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충분하다.」
사브라트의 의식이 다시 한번 오베디안을 짓눌렀다. 황금빛 눈은 그를 꿰뚫을 듯 응시하며 무겁게 선언했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단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오베디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우려가 크더라도, 협곡의 지배자는 이미 나아갈 길을 정해 둔 뒤였다.
그때, 오베디안의 등 뒤 어둠 속에서 비디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변함없이 가면 아래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그림자처럼 유유히 걸어왔다.
"참으로 장엄하시군요. 이런 위용을 제 눈앞에서 뵙게 되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입에 발린 말 따위는 필요 없다.」
사브라트는 냉정하게 말을 잘라내며 이내 덧붙였다.
「나의 권속들이 그날 일을 그르쳤더군.」
그 말에 비디아는 고개를 약간 돌려 오베디안을 바라보았다. 가면 아래로 조소 어린 미소가 능글맞게 번지자 오베디안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직접적인 책망은 없었지만, 그 시선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불편한 기색이 번지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그와 동시에, 너희의 힘 또한 확인했다. 네가 처음 말했던 강대한 힘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말이지.」
"이제야 제 말을 믿어주시는군요."
비디아는 유감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작 확실히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제 실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디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지만, 가면 아래에 숨은 의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순간, 협곡 깊숙한 곳에서 다시 거대한 의식이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공간을 짓누르는 진동이 중앙 홀을 흔들었지만, 비디아는 그 압력의 중심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태연한 태도에 사브라트의 눈빛이 되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더욱 단순한 말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너희가 말한 힘의 일부를, 지금 내 눈앞으로 보여라.」
"사브라트시여!"
오베디안이 눈을 크게 치켜뜨며 외쳤으나, 사브라트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이미 확인한 이상, 빈손으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 너희가 어떤 존재이며 그 힘이 진정 내게 필요한 것인지... 그 일부를 직접 보도록 하겠다.」
찰나의 적막이 흘렀다. 강렬한 선언이 협곡을 울렸음에도, 비디아는 가면 아래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흔들림 없는 태도로 맞섰다.
"좋습니다. 협곡의 지배자께서 직접 확인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비디아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작은 그릇을 풀어내어 조심스레 덮개를 열었다. 그 안에는 새까만 액체가 괴어 잠들어 있었다. 완전한 정적 속에 웅크린 듯 고여 있는 어둠. 그릇 안의 검은 액체는 미동조차 없이 잠들어 있었으나, 그것이 단순한 액체가 아님은 곧 드러났다.
서서히 퍼져나간 것은 비릿하면서도 역한 향기와 함께 짙은 검은 오오라였다.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공기 속으로 번지더니 단순한 어둠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촉수처럼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며 주변을 더듬었고, 이질적인 시선이 스며드는 듯한 감각을 남겼다. 피부 위로 스쳐가는 냉기 또한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존재의 본질을 더듬어 내리는 듯한, 형언하기 어려운 그 위화감은 뼛속 깊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생경한 감각. 그것은 명백히,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제가 섬기는 이의 세계에서 흐르고 있는, 그분의 정수입니다"
비디아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울렸으나,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사브라트는 말없이 액체를 응시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잊힌 기억을 더듬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잠시 후, 그의 의식이 협곡 전역으로 흐르자 어둠 속에서 네 줄기의 황금빛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부름에 응답한 두 마리의 용인이었다. 그들은 주저 없이 중심을 향해 날아들었으나 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본능적으로 저항을 일으켰다. 호전적인 본성마저 억누른 채 발걸음은 무겁게 느려졌고, 근육은 긴장했으며, 숨결은 거칠어졌다. 그러나 사브라트 앞에서 멈출 수는 없었기에 두 용인은 끝내 검은 액체를 중심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그것의 눈앞에 이르자 발끝이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순간, 사브라트의 보이지 않는 의식의 손길이 서서히 두 용인에게 달라붙었다. 본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몸은 강한 의지에 휘말린 듯 어색한 그 움직임 속에서 홀린 듯이 한 용인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치 정해진 길을 따르는 듯한 발걸음 끝에 어느덧 용인의 손은 검은 액체가 담긴 그릇을 향해 뻗쳤다. 그렇게 망설임조차 없이 액체를 입에 머금는 순간, 용인의 온몸이 격렬히 경련했다.
"쿠윽, 후욹...!"
피부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부풀어 오르며 혈관이 검게 물들었다. 실핏줄이 살을 뚫고 번져 나왔고, 비늘은 일그러졌다가 무너져내리기를 반복했다. 울부짖음이 목구멍 깊숙이 걸려 나오며, 검고 끈적한 피가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어서 뒤틀린 몸이 휘청이며 등 뒤로 갑작스럽게 뼈가 튀어나왔고, 용인의 형체는 순식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크욹, 흐아아아아아아악———!!"
금빛 눈동자에 핏발이 서더니 이내 검은 피눈물을 쏟아냈다. 찢어지는 주둥이 사이로 살점과 피가 역류했고, 마지막 절규는 살이 터지는 굉음에 묻혔다.
푸지직— 퍼어어엉———
부풀어 오른 몸은 한계에 다다른 가죽 주머니처럼 터져나가며 사방에 끔찍한 잔해를 흩뿌렸다. 산산조각 난 동족의 끔찍한 잔해를 바라보던 또 다른 용인은 숨조차 잊은 채 새파랗게 질려 차갑게 얼어붙은 듯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자리에 남은 것은 처참히 찢긴 살점뿐이었고, 협곡은 숨죽인 듯 고요해졌다.
오베디안조차도 눈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경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귀한 용의 피가 저토록 허무하게 터져나가 검은 찌꺼기가 되다니. 이것이 저자가 말한 힘의 대가인가, 아니면 예고된 우리의 미래인가. 주먹을 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잊은 채 깨질 듯한 이빨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고, 억누르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동요가 서린 눈빛에 서렸다.
그 참혹한 광경을 즐기듯, 비디아는 말없이 가면 아래서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사브라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피로 얼룩진 땅을 천천히 훑었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시선은 검은 피로 뒤덮인 잔해를 지나 곧 비디아에게로 옮겨갔다.
「가져온 것이 이것뿐일 리는 없겠지.」
명령이 아닌 확인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늘한 압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비디아는 그 기색마저 즐기는 듯 느릿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또 하나의 그릇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