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두 사람이 다가서자, 오미누스가 품 안에서 작은 돌이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굵어진 빗줄기가 오미누스의 손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빗물에 젖어든 작은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미묘한 초록빛을 품고 있었으나, 그 빛은 빗방울에 부딪힐 때마다 불안하게 산란하며 떨리고 있었다.
라사리아는 그것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엘라마가 남긴 정수의 마지막 혈석이다. 엘나의 기운이 깃든 곳이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지. 메렌은 이것을 통해 대륙과 이곳을 오갔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설명을 마친 라사리아는 오미누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두 사람을 잘 부탁하마."
오미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원석을 두 사람을 향해 내밀었다.
"여기에 손을 올려."
시즈와 아로스는 짧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동시에 손을 원석 위에 올렸고, 그 순간 원석의 중심에서 강렬한 빛이 일렁였다. 초록빛의 기운이 부드럽게 퍼져 나오더니 곧 세 사람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들바람과 같던 그 흔들림은 공기마저 진동시키는 파동으로 바뀌어 주변을 뒤흔들었고, 그 거대한 기류로 인해 헌과 미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화아아아악———
빛은 점점 강해져 마침내 눈을 뜨고는 차마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밝아졌다. 초록의 광휘가 숲 전체를 뒤덮은 순간, 강렬한 섬광이 번쩍이며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그 빛이 꺼지자, 시즈와 아로스, 오미누스 세 사람의 모습은 더는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섬광이 시야를 집어삼킨 직후, 시즈가 느낀 것은 땅이 꺼지는 듯한 부유감이었다. 숲의 온기도, 헌과 미사의 작별 인사도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대신 차가운 진공의 한기와 귀를 찢는 듯한 이명만이 감각을 지배했다.
눈을 떴을 때, 시즈와 아로스, 그리고 오미누스는 형체조차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숲에서 번쩍인 섬광은 세 사람을 단숨에 휘감아 올려 아공간의 틈새로 밀어 넣었다. 그 끝은 바람도 대지도 존재하지 않는 낯선 공간이었고, 빛과 어둠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흘러내린 파편들이 뒤엉킨 듯 끝없이 일렁이는 색채로 공간을 물들였다.
하지만 그 이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숲에서부터 그들을 쫓아온 그림자가 차원의 벽을 긁어대며 통로를 비틀고 있었다. 그 불가해한 힘 속에서, 너무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찾아왔다.
".......!"
세 사람의 손에 닿아 있던 엘라마의 혈석 표면이 미세하게 갈라지더니 번개처럼 흉한 금이 번져갔다. 은은하게 빛나던 생명의 파동은 불길하게 뒤틀리며 삭막한 파열음이 귓속을 울리는 순간, 오미누스의 시선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그 속에 묻은 긴박감은 뚜렷했다. 마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예견한 듯이 그의 손끝은 혈석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로스 또한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소용돌이의 벽이 비틀리며 거대한 균열이 형성되더니 눈부신 섬광과 함께 터져 나온 굉음이 모든 감각을 찢어발겼다.
"꽉 붙잡아──!"
오미누스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린 직후, 폭주한 차원의 흐름이 벼락처럼 아로스를 직격 했다.
"귀공!"
터져 나온 외침은 곧 절규로 변했다. 손끝은 아로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뻗었으나,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보이지 않는 힘에 휘말려 저 멀리 내던져지고 있었다. 순간의 공백이 두 사람을 갈라놓자 심장은 미친 듯 뛰었고, 시즈는 발을 내딛는다는 감각조차 잊은 채 아로스를 구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본능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오미누스의 손이 날카롭게 시즈의 팔목을 붙들었다.
"무슨 짓입니까! 놔주세요!"
"지금 저곳으로 따라간다고 해서 다시 만날 보장은 없어! 여기서 또 갈라지면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
설득에도 불구하고, 시즈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아로스를 쫓아가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마음을 찢어발겼지만 오미누스의 괴력은 단 한치도 벗어나게 두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폭풍 속에서, 결국 시즈는 눈앞의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로스──!!!"
가슴을 찢는 외침은 균열 속으로 삼켜졌다. 눈부신 틈은 이내 닫혀버리고, 소용돌이의 색채는 서서히 사그라졌다. 홀로 다른 차원 속으로 내던져진 아로스를 뒤로 한 채, 시즈와 오미누스는 서로 엉킨 채 또 다른 공간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야는 휘몰아치는 돌풍으로 끝없이 흔들렸지만, 이윽고 차원의 균열이 닫힘과 동시에 한없이 추락하던 시즈와 오미누스의 몸은 이내 땅과 부딪혔다. 거친 충격이 온몸을 파고들자 숨이 막히는 고통이 밀려왔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수습한 시즈의 눈앞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붉게 물든 하늘이었다. 구름 사이로는 흩어진 햇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았지만 공기는 기묘하게 탁했으며, 짠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침과 동시에 멀리서 파도가 부서지는 음성이 울려왔다. 곧장 몸을 일으킨 시즈의 눈동자가 다급히 사방을 훑었다.
"아로스...?!"
목소리가 떨렸다. 본능처럼 발걸음이 움직였고, 모래가 흩날리는 해변을 달렸다. 그러나 시야 어디에도 아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로스!! 대답해 주세요!"
절박한 외침이 바닷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어깨가 떨리고, 가슴은 불안으로 조여왔다. 균열이 찢어지던 마지막 순간, 그는 분명 손이 닿지 못할 저 멀리로 내던져졌다. 대체... 어디로 떨어진 것인가?
시즈의 시선은 또다시 허망하게 흔들렸다. 어디에도 그가 없었다.
"아로스... 대체 어디에......?"
발끝에 힘이 풀리며 몸이 기울었다. 무릎이 모래 위에 내려앉자, 숨이 헐떡이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절망이 쏟아졌다. 방금 전까지 숲에서 나누었던 따스한 차의 온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손끝에 남은 것은 거친 모래의 감촉뿐, 자신을 지탱해 주던 단단한 손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대한 고립감. 낯선 하늘과 비릿한 바다 냄새 속에서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는 상실감이었다.
"정신 차려!"
오미누스는 다급히 시즈의 앞으로 달려와 품 속에서 엘라마의 혈석을 꺼내 들었다. 금이 간 표면은 여전히 불길하게 갈라져 있었지만, 그 틈새에서는 아직 청록빛이 아른거리며 희미한 맥박처럼 깜빡였다.
"......그 인간이 어디로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빛이 강해지는 곳을 따라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해."
시즈는 혈석에서 흘러나오는 빛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오미누스의 설명도, 멀리서 울리는 파도 소리도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떨고 있는 그 모습은 오히려 오미누스에게는 낯선 불합리처럼 보였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결국 짜증과 함께 거친 말로 뱉어졌다.
"눈앞에서 죽은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불안해서 몸조차 가누지도 못하는 거야?"
"그럼... 당신은 걱정도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사하다는 확신조차 없는데... 그저 찾으면 된다고요?"
시즈의 목소리는 크게 갈라져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 사이로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왔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빛이 오미누스를 향해 매섭게 꽂혔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희는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겼어요. 얼마나 위험한 순간이 많았는지, 얼마나 서로 간신히 버텨왔는지... 그걸 당신이 아시나요?"
오미누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숲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담담한 여인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붕괴 직전의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낯선 모습만이 있었다. 그녀의 왼쪽 가면이 감정의 파동에 반응했는지, 푸른빛으로 달아오르며 마력을 스멀스멀 뿜어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입장이 아니에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급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비정한 일이 아닌가요......?"
시즈의 모습을 바라보던 오미누스는 불현듯 카노르 평원의 절벽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지던 두 사람의 모습. 처음 그 광경을 보았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 때문인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기에 너무도 당연히 드러나는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어."
짧게 내뱉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건조했지만, 더는 시즈를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다. 뜻밖의 반응에 시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를 찾아보자."
오미누스는 손에 쥔 엘라마의 혈석을 내려다보았다. 금이 간 표면은 불길하게 갈라져 있었으나, 그 중심에서는 여전히 청록빛이 가느다란 맥처럼 일렁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빛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그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겠어."
시즈는 그의 말에 깊게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았지만, 가라앉지 않는 가슴을 억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혈석의 빛이 한 점으로 모였다가 이내 방향을 가리키듯 길게 뻗어 나갔다.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그곳에 있다는 신호였고, 시즈와 오미누스는 혈석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다와 맞닿은 동쪽 끝, 마르프록스 산맥은 검은 파도 위로 솟구친 바위 성벽처럼 하늘을 가르며 뻗어 있었다. 바람과 안개가 늘 산등성이를 휘감아 외부에서는 그 안을 엿볼 수 없었고, 구름 속 깊은 곳에는 은밀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산맥의 꼭대기 아래 절벽에는 굴방 하나가 있었다. 바위틈에서 뻗어 내린 수정 덩이가 천장을 메우며 아주 희미하게 짙은 연둣빛을 흘렸고, 그 빛은 살아 있는 듯 숨결처럼 일렁이며 공간을 물들였다. 그 빛을 받아 굴방 양옆에 세워진 두 개의 거대한 뱀 조각상이 형체를 드러냈다. 매끄럽게 휘어진 몸통과 독니를 드러낸 턱, 서로를 노려보듯 마주 선 그 형상은 돌로 빚어졌음에도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 빛이 스칠 때마다 비늘의 굴곡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 아래에는 짙은 암녹빛 로브를 두른 거구의 익인이 앉아 있었다. 두툼한 어깨와 길게 뻗은 칠흑빛 부리, 듬성듬성 드러난 검은 깃털. 어깨를 뒤덮은 로브 탓에 더 거대해 보이는 형체는 그림자와 하나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언제부턴가 사라진 기척에 말을 걸었다.
"......오늘도 말씀이 없으시군요."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메아리 없이 흩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베리엘의 두터운 로브 자락이 발목을 스치며 바닥을 쓸었고, 묵직한 기척이 바위틈의 고요를 흔들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굴방을 벗어나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절벽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 아래의 절벽에는 깊게 파인 구멍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익인들의 둥지였다. 멀리서 보면 벌집처럼 얼기설기 이어진 바위 구멍들은 안쪽에서 울려 나오는 날카로운 울음과 메마른 숨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거친 벽을 기어오르며 몸을 부딪쳤고, 어른들은 손에 굳은살이 박힌 도구를 움켜쥔 채 바위를 다듬었다. 절벽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울리는 그 바람 소리는 마치 잃어버린 날갯짓의 환청처럼 서글프게 둥지 속을 파고들었다.
절벽을 지나 산맥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숨겨진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것 그대로의 바위벽을 파내 만든 이곳은 불규칙하게 솟은 돌기둥과 이끼로 덮여 있었고, 불씨를 담은 화로에서만 희미한 빛이 깜박였다. 기름과 피, 그리고 녹슨 금속의 비릿한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중심에는 노년의 익인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두 날개 사이가 벌어진 틈새로는 날 선 철편을 박아 관절을 억지로 잇는 기괴한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위 위에 펼쳐진 도구들은 날이 무뎌진 송곳과 정교하지 못한 집게뿐이었고, 피에 젖은 붕대가 돌무더기 옆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익인의 이마에서는 고통 때문인지 굵은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부리는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꾹 다물려 있었다. 베리엘은 그의 곁에 다가서며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어르신, 더는 무리하지 마시지요. 이런 열악한 자리에서 상처가 덧나실까 염려됩니다."
목소리에는 단호함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노년의 익인은 짧게 숨을 고른 뒤 낮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수장이 아니었다면 이곳 모두가 하늘을 나는 일은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오. 이 늙은이가 지금이라도 날갯짓을 흉내 낼 수 있는 건 모두 그대의 손길 덕분이니 더는 걱정 마시오."
그는 손끝으로 덧댄 관절을 조심스레 만지며 말을 이었다.
"비록 진정한 비행은 아닐지언정... 이 노쇠한 몸이 선조들처럼 창공의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