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날개의 둥지 (5)

잿빛 냉소

by 이샤라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불길한 감각이 뼛속까지 파고들자, 온몸이 후들거리며 식은땀이 흘러내렸음에도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수레 위에서 손이 검집을 더듬었고, 마침내 칼을 집어 들어 사내를 향해 겨누었다.


그 광경을 본 벨라미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이봐, 형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내는 아로스의 칼끝을 잠시 바라보더니, 깊고 쓴 비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세상의 환멸을 맛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지독히도 비관적인 냉소였다.


"허, 아직도 운명의 장난에 휘말린 놈이 살아있었나."


그는 붓을 내려놓고 곁에 세워 둔 낡은 칼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세월에 닳아 부식된 흔적이 아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강제로 꺾여 버린 흉물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움켜쥔 채 성큼성큼 아로스를 향해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지저분한 더벅머리 아래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왼쪽 눈 주변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눈은 실명된 듯 초점을 잃은 채 공허하게 흔들렸다. 부러진 칼을 쥔 검게 물든 오른손은 핏줄이 부풀어 오르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지금껏 봐왔던 놈들 중에서도 제일 나약해 보이는데."


사내의 냉소가 끝나기 무섭게,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카강———


하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부러진 칼날로 순식간에 아로스의 검격을 쳐냈다. 이어지는 발길질이 그의 명치를 무자비하게 걷어차버리자, 무게중심을 잃은 아로스의 몸이 수레 위로 거칠게 나뒹굴었다.


"크윽......!"


"약해 빠졌군. 그따위 힘으로 여지껏 어떻게 살아 남은 거지?"


사내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당장 여기서 꺼져."


차갑게 내뱉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사내는 부러진 칼을 휙 던져버리고는 곧장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벨라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는 수레 옆에 쭈그려 앉아 낮게 속삭였다.


"어이 형씨... 저 사람 아는 사람이야?"


아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벨라미를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거칠게 말을 뱉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너, 저자를 어떻게 아는 거지?"


벨라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이 산맥엔 인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놈들이 있어. 나도 거기 끌려갔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가 우연히 여기로 흘러들었는데, 그때 저 사람이 날 도와줬거든."


그는 오두막 문쪽을 흘겨보며 덧붙였다.


"근데 말이야, 나한테는 방금처럼 공격적으로 굴진 않았어. 딱히 말도 잘 안 붙이긴 했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오두막 뒤편으로 사라진 벨라미는 정체 모를 잔해를 집어 든 채 돌아왔다. 그것은 납작하게 뭉개진 것도 모자라 군데군데 깨지고 갈라져 원래 무엇이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정황상 등불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것 좀 봐. 뭔진 모르겠는데, 그때 내가 몸살 나서 끙끙 앓을 때 이걸 쥐고 있으니까 희한하게 몸이 좀 괜찮아지더라고? 형씨도 이거 한번 쥐어봐. 혹시 알아? 뼛조각이라도 좀 빨리 붙을지."


벨라미가 툭 던지듯 건넨 등불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아로스는 품속에 잠들어 있는 환시의 등불과 같은 기운이 잔해의 틈새를 따라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음을 느꼈다. 오래전 불타오르다 사라진 불씨가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듯, 그 잔향이 아로스의 심장을 덮쳤다.


하지만 벨라미의 말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부러진 뼈와 금이 간 관절은 쉽사리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봉합되듯 아물어야 했을 부상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분명 무언가가 치유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시즈가 떠올랐다.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순간, 이대로 무너져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삐걱거리는 관절이 비명을 내지르듯 뒤틀렸지만, 아로스는 이를 악문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수레 밖으로 겨우 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는 곧장 차가운 흙바닥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본 벨라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꼴로 어딜 가려는 거야? 지금은 기어가기도 벅차 보이는데."


아로스를 잠시 내려다보던 벨라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괜한 객기 부리지 마. 산 위에서 놈들이 언제 내려올지 몰라서 눈에 띄면 다시 잡혀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며칠 죽은 사람처럼 눌러앉아 있다가 몸이 추스러지고 나서 생각해. 그게 살 길이야."


벨라미가 억지를 부리듯 사내에게 매달린 덕에, 아로스는 간신히 지붕이 구멍 난 낡고 빈 창고에 몸을 눕힐 수 있었다. 밤이면 바람이 드나들어 사방이 싸늘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 불편함마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부활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무력한 상황을 겪은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최대한 빠르게 수긍하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창고 구석에는 벨라미가 들고 온 부서진 등불이 놓여 있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기운은 서서히 골수에 스며들었고, 금이 간 뼈마디와 비틀린 관절은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때때로 벨라미는 음식을 찾아와 내밀기도 했다. 한참을 물에 불려야 겨우 씹을 수 있을 것 같은 돌처럼 딱딱한 빵, 간신히 초록빛을 벗어난 한입거리 정도의 감자 따위였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그런 음식조차 귀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로스는 그런 정성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벨라미는 매번 투덜거리며 돌아서곤 했지만 꾸준히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로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뒤틀린 기사들과 같은 불길한 힘을 지닌 그 사내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붓을 들고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며 지내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평온해 보였으나, 그 기운은 여전히 살을 에는 듯 음울하게 번지고 있었다.


아로스는 창고 안에서 굴러다니는 긴 막대기를 목발 삼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들며 기척을 쓸어내리는 그 순간, 오두막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오늘따라 주변 풍경은 어수선했다. 이젤 주변에는 구겨진 양피지들이 흩어져 있었고, 사내의 손끝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지다 만 듯한 양피지가 들려있었다. 그가 이내 그것을 두 손으로 거칠게 구겨 그대로 뒤로 던지자, 공처럼 구르던 양피지는 바람을 타다 아로스의 발 앞에서 멈췄다.


아로스는 발치에 멈춰 선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구겨진 주름을 조심스레 펼치자, 안에는 여성의 얼굴이 그려지다 만 초상이 드러났다. 윤곽만 남은 듯 희미했지만, 분명 누군가의 흔적을 담으려 한 그림이었다. 사내의 붓끝은 여전히 비슷한 얼굴을 양피지 위에 그려내고 있었으나 금세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종이를 구겨 들었다. 또 한 번 그것을 던져버리려던 찰나, 아로스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알아차린 그는 붓을 멈추지도 않은 채 낮게 내뱉었다.


"움직일 만큼 몸뚱아리가 괜찮아진 모양이군. 그렇다면 당장 여기서 꺼져."


말투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존재 자체를 귀찮게 여기는 듯한 냉담함이 배어 있었지만 아로스는 개의치 않은 채 손에 들린 양피지를 훑으며 물었다.


"......이 초상화, 누구의 얼굴이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 질문 따위는 바람결에 흘러가도 상관없다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침묵이 한동안 늘어지자 아로스는 차갑게 깔린 공기를 가르듯 다시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내가 운명의 장난에 휘말렸다고 했어.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알면 뭐가 바뀔 것 같나? 너도 얼마 못 가 다른 놈들처럼 정신을 잡아먹힐 거다. 언령이니 사명이니... 다 허울일 뿐이다. 우리 같은 자들은 결국 꺼져가는 등불의 불씨야."


사내는 다시 붓을 들며 던져놓은 말을 주워 담듯 낮게 웃었다.


"언령이란 늘 그렇지. 불길을 붙들고 있노라면 처음엔 세상을 태울 힘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불은 결코 세상을 밝히지 않아. 불씨는 우리의 살과 피를 먼저 집어삼키지. 끝에 남는 건... 불길을 붙잡던 손아귀에 남은 잿더미뿐."


아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렇다 해도... 불길을 붙드는 순간만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었나. 내가 이 땅을 딛는 까닭도 언령 때문일진대,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남는 게 뭐가 있지?"


사내는 붓끝을 탁 내려놓았다. 말 대신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잿빛 미소를 흘렸다.


"남는 게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이 저주받은 사명의 끝에서 내가 배운 거지."


"그럼, 당신은 언령을 받았을 때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겼단 말인가?"


"처음에는 믿었다. 내면에서 들려온 신의 목소리, 사명을 마주한 운명... 그게 전부라 여겼지. 하지만 그것을 신성한 불길이라 여겼던 자들이 하나둘 휘말려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서 알았다. 사명은 세상을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잠식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달라."


아로스는 무심히 내뱉었지만, 그 어조엔 굳센 기운이 스며 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그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 위에 던져진 채,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말이야. 하지만... 그때 우연히 만난 누군가 있었다."


아로스의 시선이 잠시 멎었다. 텅 비어 있던 내면에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얼굴, 여정 속에서 함께하며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려 준 존재. 그 기억은 언제나 시즈를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 거다."


사내는 붓을 다시 들며 고개를 젓더니, 비죽 웃으며 손에 쥔 붓을 양피지 위에 억지로 긋듯 휘갈기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더 위험하지. 누군가를 붙들고 나아가면 언령의 잔혹한 속삭임은 더 깊숙이 스며들어. 언젠가 네가 지키고자 한 것들이 무너지게 된다면... 남는 건 절망뿐이다. 네가 죽음을 겪고 살아 돌아왔는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아. 세상은 내가 꿈꾸던 대로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무너진 건 내가 붙든 얼굴들이었지. 그때 깨달았다. 언령이란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그 길 위에서 무엇을 잃게 될지 속삭이는 목소리라는 걸."


사내는 구겨진 양피지를 하나 더 움켜쥐고는 발밑에 내던지며 낮게 내뱉었다.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다만... 이것만큼은 기억해 둬라. 그 사명은 너를 올바른 길로 이끌지도, 구원하지도 않아."


아로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멸이 서려 있어 반박할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결국 삼켜 버렸다. 삐걱거리는 이젤 앞에서 붓을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은 어찌 보면 평범한 화가처럼 보였으나, 어깨너머로 스며 나오는 기운은 여전히 뒤틀린 기사들에게서 느꼈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너져 버린 자의 기척, 삶을 거부하면서도 버티듯 붙잡은 채 남아 있는 기척이었다.


심장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뱉어낸 사내의 말들이 귓가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언령은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잠식하는 것이라는 단언, 남는 것은 불씨에 그을린 잿더미뿐이라는 냉소. 그 환멸이 단순한 비관이 아닌 실제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고백임을 아로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잃은 걸까. 누구의 얼굴을 수 없이 그려내다 찢어 버리고 있는 걸까.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등만 바라보는 지금조차도 아로스의 마음속에는 그 질문이 날카롭게 남았다. 언령을 품은 자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결말이 저것이라면, 자신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인가. 아니면 그녀와 함께 걸어온 길이 다른 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마구잡이로 뭉쳐진 양피지 덩어리들이 바람을 따라 구르며 발밑을 스쳤다. 아로스는 목발을 짚은 손끝에 힘을 주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발걸음은 무거웠으나, 시선을 거두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뒤에 남겨진 사내의 그림자는 여전히 오두막 앞에 드리워져 있었고, 그 기척은 골짜기 위에서 불어내려 오는 바람결에 섞여 따라붙는 듯했다.


아로스의 가슴속은 묘하게 더 답답했다. 사내의 말이 남긴 잔향이 지워지지 않은 탓이었다. 목구멍 끝에 맴돌던 반박은 이미 삼켜 버렸건만, 그 허무한 울림이 오히려 더 크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발을 떼려는 찰나, 비탈 아래쪽에서 수레바퀴가 돌을 긁는 소리와 함께 굽어진 길목을 돌아 벨라미가 나타났다. 어깨에 밧줄을 걸고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던 그는 아로스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멈칫했다.


"어, 형씨! 어디 가는 거야? 내가 뭐 괜히 귀찮게 해서 그런 건 아니지?"


말끝은 가볍게 던진 농처럼 들렸으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당황이 스쳤다. 아로스는 목발을 바짝 세워 붙들고 고개만 돌렸다.


"신경 끄시지."


가시가 돋친 짧은 대답에, 벨라미는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혹시... 에드바르가 무슨 말 안 했어? 사명이나 언령 같은 거 말이야."


"에드바르...? 아까 그 남자의 이름인가."


사내의 이름을 곱씹던 아로스는 순간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아, 그게... 뭐, 전에 술김에 중얼거린 걸 내가 들은 적이 있어서 그래. 괜히 오해하지 마. 별 대단한 건 아니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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